262화
똑똑.
나는 왕십리 종합병원 하성우 원장 진료실 앞에서 노크를 한 뒤.
목을 가다듬으며 조심스레 진료실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번 리본 정형외과 강 원장과의 술자리에서 하 원장을 만난 이후.
이제야 그에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이지.
내 인사에 하 원장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이고. 민 대표, 어서 와요.”
“잘 지내셨습니까, 원장님?”
나는 하 원장에게 다가가 커피와 쿠키를 건네며 말했고.
그는 그것들을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냥 놀러 오라니까. 뭐 이런 거까지 사서 왔어.”
“아유. 별거 아닙니다. 식사는 하셨을 것 같아서 커피랑 디저트로 사 왔습니다.”
“잘 먹을게.”
하 원장은 커피를 꺼내 빨대로 흡입하며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그의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자, 역시나 발이 넓은 인물다운 진료실의 모습이었다.
진료실 한쪽에 놓인 사진들.
그 많은 액자 중 절반이 넘는 사진이 모두 단체 사진이었다.
현수막을 들고 찍은 단체 사진들.
‘왕십리 골프 모임’, ‘서울 의사 골프 모임’, ‘17회 한우리 모임’…….
셀 수 없이 많은 모임에 나는 입을 떡 벌렸고.
그 모습을 본 하 원장은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이거?”
“와아. 원장님 정말 모임이 많으시네요?”
“하하. 내 취미잖아. 알잖아, 결혼을 아직 안 해서 부부 동반 모임 빼고는 전부 다 나갈 수 있어.”
아직 하 원장은 미혼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병원에서 퇴근하고 나면, 모임을 쉽게 나가고는 했지.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그는 홀로 빈 집에 들어가는 것보다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는 모임이 좋다고 말을 했었다.
“민 대표는 그날 더 마시다가 갔지?”
그때 강 원장과의 술자리에 대해 묻는 모양.
“네. 저희는 몇 시간 더 마시고 들어갔습니다. 다음에는 하 원장님과도 더 길게 뵙고 싶습니다.”
“나는 너무 좋지.”
“그럼 그때는…….”
영업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와의 사적인 대화는 점점 더 길어졌고.
나 역시 이런 사담을 나누는 지금이 홀가분하듯 편했다.
물건을 팔아야 한다는 압박감도.
그가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 어느 메디컬의 제품을 쓰고 있는지 알아내려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니까.
그저 나는 하 원장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앞으로 제품을 만들게 되면, 실제로 사용하게 될 원장들의 피드백이 필요했고.
더불어 소비자가 될 의사들과의 연줄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게 좋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서로 부담 없이 관계를 이어 나가는 지금, 하 원장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지.
몇십 분간 하 원장과 사담을 나누던 중.
“원장님 오늘 오후는 계속 오프이십니까?”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그래서 좀 전까지 계속 기구 보다가 왔지.”
“기구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물었고.
“어. 항상 받는 메디컬이 있는데, 거기서 외상 수술 기구를 바꿨더라고. 근데 그게 좀 복잡해서 말이야.”
“그럼 예전 기구로 하시면 안 되는 겁니까?”
“그게 제조사에서 아예 기구가 리뉴얼된 거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다른 방법이 없어. 내가 공부하는 수밖에.”
“아…….”
제조사에서 수술 기구가 바뀌게 되면, 자동적으로 병원에는 바뀐 기구가 나가게 된다.
물론 바뀌기 전 기구를 그대로 쓸 수도 있지만.
이전 기구가 생산이 중단되어 버리기 때문에, 재고가 모두 소진되고 나면 그 기구를 더이상 쓸 수가 없게 되는 것이지.
“거래처에 재고도 많이 없었나 보네요.”
“그러게. 제일 많이 쓰는 스크류 사이즈가 있는데, 그 재고를 꼴랑 다섯 개 정도인가? 그것만 놔뒀다고 하더라.”
“어떤 수술인지 여쭤봐도 됩니까?”
내 말에 하 원장은 자신의 허벅지 쪽을 툭툭 치며 답했다.
“distal femur 수술인데, 그 외에도 proximal femur랑 tibia 쪽도 전부 기구가 바뀌었대.”
그의 말과 동시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면 하 원장이 쓰는 기구가 대부분이 바뀌었다는 뜻이니까.
“근데 보통 기구가 리뉴얼되는 거면, 재고를 좀 넉넉히 챙겨 뒀거나 할 텐데… 아쉽네요.”
“내 말이 그 말이야. 새로 리뉴얼된 기구가 조금 바뀐 게 아니라, 완전히 바뀌어 버려서 나는 너무 불편하더라고. 그게 익숙해지면 편할 거라고 하기는 하는데. 원…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이렇게 써야 하려나.”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아예 다른 제조사 기구로 바꾸시는 건 어떠십니까?”
“아니야. 나는 그 제조사 제품이 제일 낫더라고. 이번에 바뀐 게 마음에 안 들기는 하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써 봤던 다른 제조사들 제품 생각하면… 우선 연습해 봐야지.”
하 원장은 카탈로그를 내게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이거 봐. 스크류도 좀 이상하지?”
그의 말에 나는 카탈로그를 바라보았고.
거기에 적혀 있는 이름은 너무나도 익숙한 제조사였다.
“어? 이거 메디온더 제품이네요?”
그는 내 말에 눈썹을 들썩이며 말했다.
“맞아. 민 대표도 아는 곳인가?”
그러더니 이내 탄성을 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 민 대표도 메디컬에서 영업 쪽으로 오래 있었다고 했지?”
“네. 영업만 했었고, 제조로 온 게 처음입니다. 하하.”
“민 대표네 회사에서도 취급하던 제품인가?”
메디온더 제조 제품을 취급하는 회사는 국내에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광주에 있을 때도, 코리아 메디컬에 있을 때도 직접 판매를 해 본 적은 없었지.
단지 메디온더 제품에 대해서 공부는 많이 했었다.
직접 판매는 하지 않아도, 경쟁사 제품에 대해 공부를 해야 내 제품의 장점을 어필해 판매할 수 있었으니까.
“아니요. 제가 일했던 곳들에서는 취급하지는 않았습니다.”
“아… 그러면 잘 모르겠네.”
“네, 그래도 메디온더 제품의 장단점을 파악할 정도로는 알고 있습니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생각.
“아!”
나는 탄성을 내질렀고.
손가락을 튕기며 소리치는 나를 보며, 하 원장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무슨 일 있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에게 말했다.
“원장님. 죄송한데, 저 잠시 통화 좀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응, 그럼.”
그는 내게 나갔다 오라는 듯한 손짓을 보냈고.
곧장 시선을 자신의 앞에 놓인 카탈로그로 옮겨 갔다.
나는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저 민지훈인데요. 통화 가능하세요?”
- 당연하죠. 무슨 일 있으세요?
“혹시 메디온더 제품 구형 재고도 가지고 있어요?”
- 이번에 제품 바뀐 것도 알고 계시네요? 저희가 총판이라 지금 예전 제품 재고 엄청 쌓여 있죠. 근데 왜요?
“…됐다. 잠시만요.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 아, 네. 알겠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진료실 문을 벌컥 열었다.
“원장님. 저 메디온더 제품 재고 납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하 원장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내게 물었다.
“정말이야?”
“네!”
* * *
오랜만에 병원이 아닌, 사무실로 출근한 오늘.
대표실을 열심히 꾸며 뒀지만, 생각보다 이 자리에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시간에 나는 회사가 아닌, 병원과 제조 공장에 머물렀으니까.
등이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책상 위에 쌓인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직 업무라고는 총판 업무와 제조 시작 단계뿐인데, 항상 책상 위에 올려진 서류는 산더미였다.
“하아… 오늘도 할 일이 많네.”
나는 서류를 넘기며 체크를 하고 있었고.
그때.
지이잉.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전화에 진동이 세차게 울려 퍼졌다.
[발신인 : 왕십리 종합병원 하성우 원장님]
전화임에도 나는 기대고 있던 등을 일으켜 공손한 자세로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원장님.”
- 어. 민 대표, 통화 가능한가?
“그럼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 아니. 별일은 아닌데, 혹시 오늘 점심에 뭐 하나 해서.
하 원장의 밝은 목소리.
무슨 일로 나를 부르려는 것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좋은 일임은 분명했다.
나는 그와 같이 환한 목소리로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저 점심에는 아마 왕십리 종합병원에서 하 원장님 뵙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 말에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하하하. 자네도 참. 그럼 굳이 약속 안 잡아도 되겠구먼. 아니지, 이미 나와 약속이 된 건가?
“그럼요. 몇 시까지… 아, 병원 점심시간 1시부터 시죠?”
- 나 오늘 오전 진료 없으니까, 12시에 밥이나 한 끼 하자고.
“예, 그럼 시간 맞춰서 가겠습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원장님.”
- 그래. 조심히 오게.
“넵.”
하 원장과의 전화를 끊은 후.
급히 잡힌 일정 탓에 나는 빠르게 사무실 업무를 마무리 지었다.
몇 시간이 지난 후.
11시 50분.
왕십리 종합병원 하 원장 진료실 앞에 다가서자, 문이 열린 틈으로 하 원장과 눈이 마주쳤다.
“민 대표 왔어?”
그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내게 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원장님, 업무 보고 계시던 거 아니십니까?”
“아니야. 오전에 수술 있었는데, 수술이 일찍 마무리돼서 민 대표 기다리고 있었어.”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답했다.
“아이고. 그럼 연락 주셨으면, 더 일찍 올 걸 그랬네요.”
“에이. 점심시간이 지금인데, 뭐.”
하 원장은 진료실 앞에서 밖으로 이동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서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듯이.
나는 그런 하 원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다른 분 더 오시는 겁니까?”
“아, 그게…….”
하 원장이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하던 순간.
“원장님!”
당찬 목소리로 다가오는 사람.
다름 아닌 거대 메디컬의 한민아 과장이었다.
그녀의 등장에 하 원장은 밝은 미소로 화답했고.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과장님이 여기에는 왜…….”
그녀는 내 말에 방긋 웃으며 말했다.
“민 대표님 덕분에 제가 여기에 왔죠.”
“병원 앞에 스시 집 알지? 거기로 가자고.”
하 원장은 턱짓으로 병원 앞을 가리켰고, 우리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습니다.”
식당에 도착하자, 하 원장은 나와 한 과장을 향해 말했다.
“먼저 들어가 있을래? 나 잠깐 통화 좀. 내 이름으로 예약해 뒀어.”
“예, 알겠습니다.”
하 원장은 뒤를 돌아 바로 통화를 시작했고.
나와 한 과장은 곧장 예약된 룸으로 함께 향했다.
“한 과장님. 뭐예요?”
내 말에 그녀는 빙그레 눈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안 그래도 대표님한테 감사해서 한턱 쏘려고 했는데, 시간 좀 내주세요.”
한 과장은 룸에 앉으며, 말을 이어 갔다.
“어제 대표님 덕에 하 원장님께 메디온더 제품 납품했거든요.”
“그러니까요. 하 원장님이 메디온더 구형 제품을 꼭 쓰고 싶다고 하셔서요. 거대 메디컬이 메디온더 총판인 거 알고 있었거든요.”
“이야. 민 대표님 코리아 메디컬에서 근무하신 짬이 이렇게 티가 나네요. 하하.”
그녀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 딱 거대 메디컬이 기억이 나서, 바로 한 과장님께 연락드렸죠.”
“메디온더 구형 제품 재고 잔뜩 가지고 있었는데, 저희야 너무 감사하죠. 그리고 왕십리 종합병원이 저희 거래처도 아니었는데, 이게 다 민 대표님 덕분입니다.”
“하하. 이제 저희 사업 파트너인데, 이런 일 있을 때 한 과장님께 토스하는 게 맞죠.”
그녀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했다.
“정말 감사해요. 꼭 시간 내주세요. 아셨죠?”
“괜찮은데…….”
그때, 문이 열리며 하 원장이 들어왔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있게 해?”
그는 남은 한자리에 앉으며, 내게 말했다.
“민 대표 덕에 오늘 아침에 수술 잘했어. 메디온더 새 제품으로 공부하다가 손에 익은 기존 제품 쓰니까, 완벽하게 그리고 빠르게 수술 마쳤어.”
“다행입니다, 원장님.”
그는 흡족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그 순간.
[민 대표, 자기 물건 팔아서 돈이 남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대가도 없이 나한테 신경 써 주고 진짜 고맙네. 그럼 나도 그 정보… 민 대표한테 줘도 되겠는데?]
선명하게 들려오는 하 원장의 속마음 소리.
나는 그 이야기에 집중해 미간을 찌푸렸다.
‘정보…? 무슨 정보를 내게 준다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