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한 과장은 서류가 담긴 파일철을 꺼내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게 뭡니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가방 속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그리고는 PPT 화면을 열어 내게 보여 주었다.
“JH 메디컬에서 저희 거대 메디컬에게 총판을 주셨으면 해서요. 저희가 왜 총판이 되어야 하는지, 총판을 주셨을 때의 기대 효과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과장은 내게 보여 줄 자료와 PPT 파일을 작성해 온 모양.
아직 자료와 PPT를 보기도 전이었지만.
이미 거대 메디컬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이렇게까지 준비를 해 온 메디컬은 단 한 곳도 없었으니까.
특히 코리아 메디컬 임 차장과 너무나 상반된 총판 제안이었다.
물론 이 자료 준비로 인해 총판을 결정하지는 않을 테지만.
자료를 보고 총판 결정을 하는데, 도움은 될 터.
거대 메디컬이라는 회사는 코리아 메디컬과 1위를 다투는 회사였고.
그 말은 즉, 이미 증명된 메디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한 과장의 능력 또한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기에.
나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으로 한 과장의 PPT를 바라보았다.
한 과장은 목을 가다듬으며, PPT 첫 장을 읽어 내려갔다.
“저희 거대 메디컬에 줄기세포 복원 주사의 총판을 주신다면,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나는 한순간도 그녀의 PPT에서 눈을 떼지 않고, 귀를 쫑긋 세운 채 경청했다.
십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PPT가 넘어가자, 나는 감탄을 쏟아 냈다.
“이야. 언제 이렇게 준비하셨어요?”
내 말에 한 과장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뭐, 이 정도야. 아무튼, 거대 메디컬에 총판 주시면 방금 말씀드렸던 대로 매출은 문제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네. 근데 사실 NA 바이오 제품이면, 어느 메디컬에서 총판을 가져가시던지 매출은 잘 나올 겁니다. 꼭 거대 메디컬이 아니어도요.”
내 말에 한 과장의 눈빛이 흔들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모든 메디컬, 대부분의 병원에서 이 제품을 원하고 있었으니까.
어떤 메디컬에 총판을 주더라도, 매출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정도였지.
하지만 어떤 메디컬 회사에 가느냐에 따라, 매출과는 별개로 내가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많아지느냐가 고민이었다.
발주에 이상이 생긴다든지, 물건에 대한 피드백 등.
사소한 일들로 인해 병원이나 작은 메디컬들에서 문의가 들어올 때.
그걸 해결해 낼 능력이 있느냐의 문제였다.
그건 그만큼 총판을 많이 겪어 본 대형 메디컬 회사라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기는 했다.
거대 메디컬은 수많은 일을 경험해 봤을 테니까.
물론 매출 또한 내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더 해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매출이 높다는 건, 총판을 맡을 회사의 매출도 비례하게 늘어나는 것이니까.
거대 메디컬에서 자신들의 매출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더 열심히 영업을 할 것이다.
내 차갑고 단호한 말에 한 과장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나는 그녀를 향해 재차 입을 열었다.
“저는 매출 말고도 거래처 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나 서울권에만 이 제품을 영업하는 게 아니라, 지방에도 널리 영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한 과장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그런 거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희 지방에도 지사가 있으니까, 매출은 문제없어요.”
“네, 매출도 매출이지만. 이 제품을 많은 병원에서 써 보게 하고 싶어요. 한 과장님도 아시잖아요. 좋은 제품이라는 거. 그래서 많은 병원 원장님들이 원했다는 걸요.”
그녀는 내 말을 이해했는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민 대표님은 이 제품을 환자들에게 빨리 보여 주고 싶으신 거죠?”
한 과장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예, 기존 한국에 깔려 있던 제품보다 치료 효과가 몇 배는 좋으니까요. 고통에 오래 머무는 환자가 없게 해야죠.”
내 말이 끝나자 한 과장은 눈을 반짝였다.
“저… 꼭 총판 받고 싶어요. 제가 민 대표님이 말씀해 주신대로 할 수 있게 만들어 볼게요.”
한 과장과 나는 허공에서 눈빛이 마주쳤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선 자료 다시 검토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나는 앞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커피 얼른 드세요. 얼음이 다 녹아 버렸네, 다시 해 드릴까요?”
한 과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커피를 들이켰다.
“아니요. 딱 좋아요.”
“오늘 고생하셨어요. 이렇게 자료도 정리해 오시고, 잘 봤습니다.”
“뭘요. 이 정도 노력은 해야죠. 그나저나 민 대표님은 이제 병원으로 직접 판매는 아예 안 하시는 거예요?”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답했다.
“음… 아직은요.”
“제품 제조하시면, 그것도 메디컬로만 판매하시고요?”
“네, 그것도 아직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한 과장은 내게 궁금한 게 많은지, 질문 세례를 퍼부었고.
“그럼 여자친구도 아직 잘 만나고 계시고요?”
“……”
갑자기 물어보는 사적인 질문에 나는 순간 아무런 답 없이 눈을 깜빡였다.
한 과장은 작년, 내게 관심을 표했었고.
나는 그 마음을 거절했었다.
그리고 내가 김사랑과 만남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
대답을 망설이면 그녀가 오해라도 할세라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 잘 만나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저… 임자 있는 사람한테는 관심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한 과장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고.
그녀 역시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저도 이제 민 대표님한테 관심 접었으니까, 이제는 같이 좋은 메디컬 파트너? 아니 그건 너무 거창한가? 하하.”
한 과장은 쓰읍 소리를 내며 말을 이어 갔다.
“뭐, 메디컬 동료쯤으로 했으면 좋겠는데요. 어떠세요, 민 대표님?”
그녀의 말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 말에 흡족하다는 얼굴로 한 과장은 노트북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연락 주세요, 대표님.”
“그럴게요. 오늘 선물 고마워요.”
한 과장은 미소로 내게 답한 뒤, 대표실을 천천히 빠져나갔다.
* * *
내리쬐는 햇빛.
아직 오전 10시도 채 되지 않았는데, 하늘에서 뜨거운 태양이 몸을 달궜다.
“와아. 오늘 날씨 장난이 아니네요.”
나는 찌는 듯한 더위에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말했고.
리본 종합병원의 강 원장은 헤실거리며 답했다.
“이래야 웨이크 보드 타는 맛이 나는 거야. 하하.”
시끌벅적한 이곳.
가평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는 이곳에 도착하자, 다들 여름만을 기다렸다는 듯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쪽에는 물살을 튀기며 워터파크 기구들을 이용하고 있었고.
물에 첨벙첨벙 빠지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스트레스를 풀고 있다는 듯 행복해 보였다.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 시작도 전부터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서울에 올라와 정신없이 일만 하며 보냈던 시간들.
물론 틈틈이 여자친구인 김사랑과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여유롭게 취미다운 취미를 즐겨 본 적이 없었다.
그 시간에 쌓인 일들을 처리하기에 급급했으니까.
그런데 강 원장과 평화롭게 이 시간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벌써 가슴이 벅차 왔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며 감상하던 그때.
“민 대표, 얼른 와. 저기서 강습 짧게 받고 바로 시작할 거야.”
“네!”
강 원장의 말대로 나를 비롯한 함께 온 몇 명의 초보자가 함께 짧은 강습을 받고, 우리는 그대로 보트에 몸을 실었다.
가장 먼저 강 원장의 차례.
보드에 발을 올리고, 보트와 연결된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강 원장의 모습.
쿠와앙.
보트가 출발하자, 물속에서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던 강 원장은 순식간에 물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순식간에 거친 물살을 헤치고 웨이크 보드 위에 중심을 잡았다.
“우와.”
나는 그 모습에 감탄이 절로 쏟아졌고.
강 원장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얼굴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짜릿한 느낌.
한참이나 중심을 잃지 않고 달리던 강 원장은 스스로 줄을 놓으며, 물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금세 찾아온 내 순서.
“하아… 떨리는데, 기분은 좋습니다.”
나는 강 원장과는 달리, 줄이 아닌 보트에 달린 봉을 잡고 물 위에서 중심을 잡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몇 번의 시도가 계속됐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물에 젖고, 물을 수없이 먹었지만.
이내 나는 강 원장과 마찬가지로 줄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보드 위에 중심을 잡고 물 위에 뜨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차례 실패했던 기억은 온 데 간 데 사라지고 없었다.
지금의 뿌듯함과 행복감만이 남았을 뿐.
“와아!”
나는 바람을 가르며 아무런 고민 걱정 없이 중심을 잡기에 집중했고.
내 이런 모습을 보트에 타 있는 강 원장이 쉴 새 없이 찍고 있었다.
“민 대표, 성공이다!”
그는 나보다 더 기쁜 얼굴로 손뼉을 부딪쳤다.
* * *
하루 내내 물에서 놀고 난 뒤.
우리는 기진맥진한 몸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했다.
“오늘 너무 즐거웠습니다, 원장님.”
“나도 재밌었어.”
강 원장은 시간을 확인하며 내게 말했다.
“같이 저녁이나 먹고 들어갈래? 오늘 고생해서 힘들면 들어가서 쉬어도 괜찮고.”
그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닙니다. 같이 가시죠.”
“그럴까?”
동호회 사람들과 헤어진 우리는 단둘만이 함께 식당으로 향했고.
강 원장은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내게 물었다.
“민 대표, 왕십리 정형외과 아나?”
그의 말에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예, 당연히 알죠.”
“거기에 나 아는 지인이 있는데, 근처에 있다네?”
강 원장은 눈을 치켜뜨며 말을 이어 갔다.
“여기로 불러도 괜찮을까?”
그의 말에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너무 좋습니다.”
왕십리 정형외과.
서울 내에서 유명한 병원들 중에 이름을 올린 병원은 아니었지만.
그쪽 구에서는 나름 이름을 날리는 병원 중 하나였다.
내가 영업을 할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제조업이어도, 결국 내 제품을 쓰게 되는 건 의사들이니까.
최종 소비층인 의사들과 많은 친분을 쌓아 가게 되는 것인데, 내가 만남을 거부할 리는 없었지.
내 말에 강 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알겠어. 나보다 나이는 좀 더 많으신 선배님인데, 발이 아주 넓으셔.”
“제가 보기에는 강 원장님도 충분히 발이 넓으신 것 같은데요?”
“그래 보여? 하하.”
“그럼요. 해외에서 계속 계시다가 한국 오신 지 얼마 안 되셨다면서, 동호회에, 지역구마다 지인도 있으시고.”
내 말이 듣기 좋은 듯 강 원장은 입꼬리를 올렸다.
“에이. 나는 뭐, 그냥 몇 명 아는 거지.”
강 원장은 내게 술을 따라 주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민 대표랑 가까워진 기념으로, 우리 선배님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부르는 거야.”
“아유.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장님.”
나는 그에게 술병을 건네받아 강 원장의 잔을 가득 채웠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
“민 대표가 우리 선배님 만나면, 아마 나한테 고마워할걸?”
그때.
강 원장은 내 뒤쪽의 문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 선배님. 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