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화
[발신인 : 코리아 메디컬 임승재 차장]
뭐야.
임 차장이 나한테 왜 전화를 한 거지?
나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전화가 끊어질 때쯤, 수신 버튼을 클릭했다.
“여보세요?”
- 민 차장님. 나예요, 임 차장.
“네, 알죠.”
- 만나서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가능해요?
“예? 갑자기 전화해서 만나자니, 무슨 일 있으세요?”
- 줄기세포 연골 주사. 그거 민 차장님 회사에 수입한다면서요.
코리아 메디컬을 퇴사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
몇 개월 만에 전화해서 하는 이야기가 제품 이야기라니.
다소 황당함이 느껴졌지만, 나는 최대한 감정을 눌러 내며 답했다.
“그래서요?”
- 그래서는 이라니요. 총판 아직 안 정하신 것 같던데,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사무실이세요?
임 차장과 굳이 만남을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이런 태도의 임 차장과는.
하지만 이건 임 차장과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코리아 메디컬과 JH 메디컬 사이의 공적인 일이었다.
총판을 지정할 메디컬 업체 중 코리아 메디컬을 배제해도 되는 일이었지만.
코리아 메디컬은 현재 메디컬 업계에서 1, 2위를 다투고 있는 회사였다.
이성적으로 판단한다면, 코리아 메디컬과의 미팅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지.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임 차장에게 답했다.
“스케줄 보고 문자로 시간이랑 주소 보낼게요. 맞춰 오세요.”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책상 위에 올려진 메디컬 목록 마지막 줄에 ‘코리아 메디컬’을 적어 내려갔다.
‘미팅하러 와서 얼마나 잘 영업하는지 보자.’
* * *
줄기세포 복원 주사의 총판을 몇 군데, 어느 지역에 두면 좋을까 하는 생각에 밤새 고민을 했었다.
나는 항상 총판을 따내기 위해 본사에 열띤 영업을 했었다.
내가 총판을 내주는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더더욱 고민됐다.
어느 회사에 총판을 줘야, 내가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도 원활하게 일이 될까?
또 그 회사의 뛰어난 영업력으로 많은 제품을 팔아야 하기에, 회사의 능력도 중요했지.
그러던 중.
지이잉.
[발신인 : NA 바이오 이태현]
본사 담당자인 이태현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수신 버튼을 재빨리 눌렀다.
“여보세요?”
- 네, 민 대표님. 이태현입니다.
“잘 지내셨습니까?”
- 그럼요. 대표님도 잘 계시죠?
“하하.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예. 한국으로 보낼 제품들 허가 다 받고 난 후에, 정리 좀 하느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 제품은 곧 받을 수 있는 거죠?”
- 네. 이달 안으로 정리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표님.
“예, 말씀하십시오.”
- 직접 병원에 판매 안 하시고, 메디컬 쪽으로 총판 잡으신다고 하셨죠?
그의 말에 나는 책상 위 목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안 그래도 저도 총판 회사를 잡느라, 지금 고민 중에 있습니다.”
- 아… 그러셨구나. 이제 잡아 두셔야 할 것 같아요. 제품도 곧 발주 주시는 대로 보낼 수 있습니다.
“혹시 NA 바이오 쪽에서는 저희가 총판을 여러 군데 잡는 건 상관없으실까요?”
내 말에 이태현은 쓰읍 소리를 내며 답했다.
- 이렇게 말씀드려도 되나 모르겠습니다만. 하하.
그는 자신감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 사실 저희 줄기세포 복원 주사가 한국에서 많은 연락을 받았지 않습니까?
“네, 그렇죠.”
- 그래서 총판을 몇 개 두시든, 큰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재작년부터 저희 제품을 한국에서 원하고 있다고 대표님도 말씀하셨잖습니까?
“맞습니다. 이번에 수입한다는 이야기에, 총판 문의도 쏟아지더라고요.”
- 예. 총판을 몇 개 두시든지 매출은 걱정 안 하셔도 될 정도일 것 같습니다. 오히려 총판을 많이 두게 되면, 대표님께서 관리하시기가 더 힘드실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도 저는 이 제품을 더 많은 병원에서 원활하게 받게 하려면, 여러 지역에 총판을 둬야 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고민이 되더라고요.”
나는 목록을 손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어 갔다.
“뭐… 서울에만 총판을 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지방까지 물건이 가는 데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확실히 지방에도 총판을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 민 대표님 제조에 뛰어드신다더니, 여전히 돈이 아니라 환자들을 생각하시는 마음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하.
“아유, 제조나 판매나 메디컬 업계에서 일하려면, 환자에게 맞고 좋은 제품을 찾는 건 같은 일이잖습니까.”
- 이래서 제가 민 대표님과 일하고 싶었던 겁니다. 저희 NA 바이오의 취지와 같은 마음을 가진 회사는 많지만, 대부분은 지키지를 못하시잖아요.
“저를 믿고 맡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표님이 회사를 차리신다고 들었을 때, 당연히 저희는 민 대표님을 믿고 수출을 결심했으니까. 따라 나가는 게 맞았죠.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하하. 그럼 제가 조만간 총판 정리하고, 발주 수량 정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 네. 감사합니다. 부족하신 서류나 문의 주실 거 있으시면, 언제든 편히 연락 주세요.
“예.”
전화를 끊은 뒤.
나는 조금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메디컬 목록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 * *
회사 운영을 시작하니, 생각보다 해야 할 업무들이 상당했다.
단순히 내 업무만을 해야 할 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회사의 직원으로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게 주어진 업무를 진행해야 했고.
내가 직원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것도 해야 했지.
더불어 회사가 굴러가게 만들 자금 관리부터.
사소하게는 회사의 관리비, 직원들의 월급, 하다못해 직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까지가 모두 대표의 몫이었다.
아무리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에서는 직원을 뽑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었다.
아무나 뽑을 수도 없었고, 잘 따져 보지 않고 뽑게 되면 쉽게 그만두는 직원들도 있었으니까.
항상 외근을 하고 들어오면, 내 책상 위에는 수많은 결재 서류들이 가득했다.
나는 쌓여 있는 서류를 보며, 신경 쓸 일이 많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때.
똑똑.
나는 노크 소리에 감았던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네, 들어오세요.”
신소율이 문을 빼꼼 열어 내게 말했다.
“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그녀의 말에 내가 눈썹을 들썩이자, 신소율은 조금 더 고개를 내밀어 말을 이어갔다.
“코리아 메디컬에서 대표님과 약속하셨다고…….”
“아, 네. 들어오시라고 해 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신소율은 곧장 앞에 있던 손님을 안내했고.
머지않아 닫혔던 대표실의 문이 재차 열리며 손님이 들어왔다.
“이야. 민 차장 회사 엄청나게 좋다.”
입을 떡 벌리고 들어오는 임승재 차장의 모습.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 가운데 있는 소파로 발길을 옮겼다.
“오랜만이네요. 임 차장님.”
“그러게요.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차장님도 잘 지내셨어요?”
내 말에 임 차장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내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여기, 제 명함입니다.”
“아, 네. 저도 인사 왔는데, 명함 드려야죠.”
그리고 임 차장은 자신의 명함을 내게 내밀었고.
내 명함을 빤히 바라본 뒤, 자신의 주머니 속으로 명함을 집어넣었다.
“앉으시죠.”
내 말에 임 차장은 소파에 앉았고.
나는 대표실 한쪽에 마련된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차장님, 커피로 드릴까요?”
“예, 뭐든 좋습니다. 근데 커피 머신이 대표실 안에 있네요?”
그는 놀란 듯한 얼굴로 커피 머신을 바라보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어차피 제 손님인데, 직원들한테 커피 심부름을 부탁할 수는 없잖습니까. 제가 여기서 커피 내려서 드리는 게 편하고요.”
그는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임 차장의 표정.
나는 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서둘러 커피가 담긴 잔을 두 개 챙겨 소파에 앉았다.
“잘 마시겠습니다.”
“네.”
임 차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자신의 가방을 곁눈질로 살폈다.
평소 임 차장과 사적인 친분이 없던 나는, 굳이 그와 사담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고, 업무 이야기로만 시간을 보내기에도 바빴으니까.
나는 그의 가방을 눈으로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차장님. 오늘 저를 뵙자고 하신 이유가…….”
내 말에 임 차장은 들고 있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내게 말했다.
“아, 줄기세포 복원 주사 총판 때문에요.”
그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뭐? 라는 식의 눈빛으로.
이제 내게 할 일은 없었다.
총판을 따내기 위한 임 차장의 어필을 들을 시간일 뿐.
총판을 가져가기만 하면 돈을 버는 것은 따 놓은 당상.
그렇기에 자신의 회사에 총판을 달라고, 내게 설득을 해야 하는 것이지.
나는 들을 준비를 모두 마쳤고.
임 차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는 나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눈썹을 들썩이는 임 차장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뭐… 말씀하세요.”
내 말에 임 차장은 비즈니스적인 말투가 아닌, 장난스러운 말투로 내게 답했다.
“총판 저희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아무런 설득과 회사의 어필도 없이 다짜고짜 총판을 달라니.
이게 무슨 경우지?
임 차장을 빤히 바라보며 답을 하지 않자, 그는 너스레를 떨 듯 입을 열었다.
“에이. 그래도 코리아 메디컬에 근무할 때, NA 바이오 총판 따내 온 거잖아요. 근데 민 차장님이 회사 차린다고 그걸 쏙 빼 들고 가셨으면, 총판은 인간적으로 저희한테 주셔야죠.”
그의 황당한 요구에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이 터졌고.
임 차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인간적이 아니라, 당연히 저희한테 총판 주셔야죠. 저는 당연히 민 차장님이 연락 주시겠지, 하고 있었는데. 하도 연락을 안 주셔서 제가 먼저 찾아온 겁니다.”
그의 말에 내 얼굴은 점점 일그러졌고.
“제가 총판을 당연히 코리아 메디컬에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굳은 얼굴로 묻는 내게, 임 차장은 밝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삼촌, 아니 저희 대표님도 줄기세포 복원 주사 판매 리스트 뽑고 계시는데요.”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닫았다.
최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하려, 차분히 심호흡을 내뱉었고.
“애초에 저희 회사로 왔던 총판인데, 원래는 수입 자체도 코리아 메디컬 거였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민 차장님?”
“아니죠. NA 바이오에서 수입을 하게 만들었던 건, 제가…….”
임 차장은 내 말을 잘라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민 차장님. 아무리 그래도 민 차장님이 코리아 메디컬에 계실 때, 학회를 가서 받으신 건데.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회사 차리시면서 가져가시는 게 아니었죠.”
“저기요, 임 차장님.”
“까놓고 말할게요. 회사 나갈 때, 거래처 들고 나가는 거. 업계에서 상도덕 아니지 않습니까?”
임 차장의 선 넘은 발언에, 나는 결국 참았던 분노 버튼이 눌리고 말았다.
“임승재 차장님. 지금 상도덕이라고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