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 2부 시작
【 JH 메디컬 】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도심.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보기만 해도 푹신해 보이는 책상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와아. 좋다…….”
눈으로 보던 것과 마찬가지로 의자의 푹신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이 깊숙이 빨려 들어가듯 푹 기대졌고.
편안함만이 느껴질 것 같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다지 여유롭지만은 않았다.
어깨에 가득 내려앉은 부담감.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아니, 잘 해내야만 한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켰고, 그 고민들은 고스란히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내게 자리 잡았다.
그때.
똑똑.
누군가가 처음으로 내 방의 문을 두드렸다.
낯선 이 분위기.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재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아, 네!”
서둘러 노크에 답하자, 문이 스르르 열렸고.
회사의 사무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신소율이 밝게 웃으며 내게로 향했다.
“대표님. 이제 막 출근하신지라, 조금 이따가 들어오려고 했는데 죄송해요.”
신소율.
30살의 그녀는 160 중반 정도 되는 키에, 낮게 묶은 포니테일 머리.
쌍꺼풀이 진한 눈에 오뚝한 코.
메디컬 사무 업무에 경력이 있는 똑 부러진 직원이었다.
회사 면접 때, 대표인 나보다 내게 더 많은 질문을 던졌던 그녀였으니까.
신소율이라면 충분히 회사의 사무 업무 총괄을 맡겨도 손색이 없다고 느꼈었지.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아니, 죄송은요. 무슨 일인가요?”
신소율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결재판 서류를 내 책상에 내밀며 말했다.
“밤에 서류가 메일로 도착해 있더라고요. 저번에 말씀하셨던 긴급한 건인 것 같아서, 바로 보고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보시고 말씀해 주세요.”
“그럴게요.”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후, 내 방을 빠져나갔고.
나는 몸을 책상에 딱 붙이도록 의자에서 등을 떼 낸 후.
서둘러 서류를 펼쳤다.
[NA BIO]
NA 바이오에서 온 서류였다.
서류는 결재판이 닫히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고.
나는 차분히 서류의 모든 내용을 빠짐없이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NA 바이오 줄기세포 연골 주사.
한국 메디컬 계에서 줄기세포 연골 주사를 너무나도 필요로 해, 과거 광주 메디컬에 있을 당시 사기극까지 일어났던 그 물건.
그리고 내가 코리아 메디컬에 근무를 할 때, 학회에서 NA 바이오 이태현을 설득해 겨우 수입을 허가받았던 그 제품이다.
NA 바이오에서 처음으로 한국에 수출하는 것이었기에.
코리아 메디컬에 근무를 할 당시, 허가 후 곧장 물건이 오지는 않았었다.
세계에서 유명한 메디컬 기업이었기에, 당연히 윗선으로 보고가 올라가는 것도 한참.
서류 하나하나가 새로 올라가고, 허가되는 데도 당연히 오랜 시간이 걸렸었지.
그렇게 결국, 내가 코리아 메디컬을 퇴사할 때까지도 그 제품의 수출 건은 마무리를 보지 못했었다.
너무나도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때쯤.
NA 바이오의 이태현은 내게로 연락을 취했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지금.
[안녕하십니까. NA 바이오 이태현입니다.
드디어 서류가 통과되어 회신 드립니다.
첨부파일에 관련 서류 전부 첨부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민지훈 과장님. 아니, JH 회사 민지훈 대표님과의 신뢰로 한국에 저희 줄기세포 연골 주사를 수출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니…….
…….
…….
서류 검토해 보시고, 답변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이태현의 메일 내용을 확인하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렇게 나를 믿고 코리아 메디컬이 아닌, 내게 한국 총판을 주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웠다.
* * *
줄기세포 연골 주사의 카탈로그를 한 아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메디컬 제조업에 뛰어들기 위해, 회사를 박차고 나왔지만.
줄기세포 연골 주사를 보고도 판매에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한국의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메디컬 업계 단 한 곳도 빠지지 않고 이 제품을 원하고 있었고.
그런 제품이 한국에서 유일하게 내 손에 들어와 있으니까.
그런 상황이다 보니, 내가 굳이 병원에 판매를 가지 않아도.
메디컬 회사들에게 홍보를 하지 않아도.
자신들에게 판매를 해 달라 아우성이었지만, 나는 이를 무시하고 아직 정식 판매 전 병원에 시장 조사를 하기 위해 나섰다.
김준수, 그러니까 행복 정형외과의 병원장이자.
내 여자친구인 김사랑의 아버지로부터 투자를 받아 회사를 차리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물론 금전적인 면에서 부족함 없이 투자를 해 줬지만, 그저 그 투자금을 받기만 하며 제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메디컬 제조라는 게, 생각한 대로 뚝딱 완제품이 나오지는 않았으니까.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고.
메디컬 제조라는 게, 생각한 대로 뚝딱 완제품이 나오지는 않았으니까.
그 말은 즉, 돈이 줄줄줄 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제조에 몰두하되, 판매를 놓을 수는 없다는 말이지.
이 시점에서 내게 NA 바이오 줄기세포 복원 주사는 한 줄기의 빛 같은 존재였다.
그 제품만 있다면 나는 충분히 제조에 몰두할 자금이 마련될 터.
김준수 병원장에게 받은 투자금은 홀로서기를 하며 회사를 차리는 데만 해도 충분했다.
이후에 성장하는 건, 오롯이 내 몫이니까.
똑똑.
나는 문 앞에 서서 목을 가다듬은 뒤,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하얀 가운을 입은 김사랑은 환한 미소를 보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자기!”
그녀의 말에 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황급히 문을 닫으며,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쉿!”
그리고는 문을 빼꼼 열어 혹시나 주변에 누가 있는지 살펴본 후, 재차 문을 닫고 그녀에게로 향했다.
“공과 사는 구별하셔야죠, 원장님.”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야, 오늘 회사 첫 출근인데 우리 병원은 왜 왔어?”
김사랑은 눈을 깜빡이며 내게 물었고.
나는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읊조렸다.
“자기 보러 왔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김사랑은 배시시 웃으며 손을 툭 뻗었다.
“정말?”
“자기도 보고, 그리고 병원장님도 뵙고.”
“왜?”
“드디어 줄기세포 복원 주사 허가 났거든. 그거 시장 조사차 왔어.”
똑똑.
그녀의 진료실 문이 열리고.
김사랑은 놀란 얼굴로 목을 가다듬으며 답했다.
“네, 들어오세요.”
“원장님. 급하게 드릴 차트가 있어서요.”
간호사는 김사랑에게 차트를 건넨 후, 진료실을 빠져나갔고.
김사랑과 나는 눈을 마주치며 웃음을 참아 냈다.
다시 둘만 남은 진료실.
나는 다시 거래처로 돌아가 가방 속 카탈로그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원장님, 이거 줄기세포 복원 주사인데요. 한 번 보시고, 사용하실만한지 피드백 좀 부탁드릴게요.”
“뭐야, 갑자기.”
그녀는 내 사무적인 말투에 피식 웃음을 보였고.
나는 문밖으로 눈짓을 보내며, 그녀에게 말을 이어 갔다.
“워낙 유명한 제품이라 알고 계실 테지만, 이 제품은…….”
김사랑과 나는 언제 알콩달콩했냐는 듯, 병원 원장과 거래처의 신분으로 돌아와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몇십 분간 이어진 대화.
“오오. 그럼 바로 사용이 가능한 거야?”
“아니요. 병원들 조사해 본 뒤에, 저희를 통해서가 아니라 메디컬에서 행복 정형외과로 판매할 겁니다.”
“그럼 병원들 조사하고 얼마 안 지나서 우리가 써 볼 수 있겠네?”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빠르면 이달 내에, 아니면 다음 달에는 사용해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좋네. 안 그래도 학회에서만 본 제품이라, 언제 들어오나 했는데. 우선 자료 좀 보고, 수량 파악해 볼게.”
“감사합니다, 원장님.”
인사를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사랑은 고개를 들고 내게 물었다.
“그래서 오늘 저녁은?”
“일찍 마무리하고 여자친구랑 먹으려고요.”
내 말에 김사랑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의 앞 의자를 가리켰다.
“잠깐 앉았다가 가라. 응?”
그녀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고.
김사랑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때.
[이렇게 매일 보니까, 진짜 너무 좋다…….]
갑자기 들려오는 그녀의 속마음 소리.
그녀의 마음의 소리에 답을 하기도 전에, 김사랑은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좋다. 자기 이렇게 회사도 차리고, 시작부터 잘 되는 것 같아서.”
나는 김사랑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와 만남을 가진 뒤부터, 한순간도 빠지지 않고 내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다.
온 마음을 내게 쏟아붓는 그녀가 부담스럽기는커녕.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화목한 가정에서 세상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것 같은 그녀의 모습.
그래서 남에게도 자신의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그녀가, 너무나도 좋았다.
“고마워. 나도 사랑이랑 함께할 수 있어서 진짜 좋다.”
나는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말을 내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 * *
지이잉.
지이잉.
회사를 차린 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는데도 전화기는 불이 난 듯 쉼 없이 울려 댔다.
이유는 줄기세포 복원 주사 덕이었다.
회사로 쏟아지는 총판 문의.
그리고 개인 전화로도 연락해 한국에 내로라하는 메디컬 회사에서 줄기세포 복원 주사가 실제로 판매되는 것인지.
판매된다면, 어느 메디컬로 판매를 할 것인지.
단가는 어떻게 되는지 등.
질문 세례가 터지고 있었고.
나는 그 문제 해결을 위해 서둘러 회사로 향했다.
“대표님. 여기 문의 전화 목록은 따로 정리해 뒀고, 아직 총판에 대해서는 정해진 게 없다고 전달은 완료했습니다.”
신소율은 내게 서류를 건네며 말했다.
“고생했어요. 우선 목록 보고, 제가 다시 이야기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밝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고.
나는 건네받은 서류를 들고 대표실로 향했다.
문의가 온 곳은 셀 수가 없을 정도.
나는 이제 슬슬 총판을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목록을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직접 병원에 판매를 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아무 회사에나 총판을 넘길 수는 없었다.
물론 줄기세포 복원 주사의 판매는 판매처가 어딘가에 구애받지 않고, 충분히 판매가 잘 될 것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 JH 메디컬과의 첫 거래.
앞으로 몇 년, 아니 몇십 년을 함께 소통하며 지내야 할 회사이기에.
섣불리 결정할 수는 없을 터.
서울에 있는 유명한 메디컬 기업인 회사들.
조 차장과 한민아 과장이 있는 거대 메디컬에서까지 회사로 연락이 온 모양.
하지만 서류 몇 장을 아무리 뒤적여도 내가 발을 담그고 있던 코리아 메디컬에서는 문의가 온 적이 없었다.
왜지?
내가 회사를 퇴사하고 새로 차렸다고 하더라도, 이 제품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을 텐데…….
더군다나 내가 코리아 메디컬을 나올 당시.
나쁘지 않게, 그러니까 깔끔한 마무리를 짓고 나왔었다.
코리아 메디컬은 제조업까지 판을 벌리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었고.
이미 많은 실적을 냈던 내가 퇴사를 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표하며 붙잡았지만.
워낙 내 뜻이 확고했기에 임 대표는 나를 놓아주었었다.
보통 메디컬 회사에서 일반 퇴사가 아닌, 회사를 차려 나오게 되면 좋지 않게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특히 이쪽 업계는 자신의 거래처를 들고,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그간 많이 일궈 둔 병원 거래처를 고스란히 코리아 메디컬에 두고 왔고.
그 덕에 얼굴을 붉히지 않고, 웃으며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임 대표 역시 내가 나간다고 해서 회사에 손해는 전혀 없었으니까 놓아준 것이다.
단지 내 실적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임 대표는, 더 이상 내 영업력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했을 뿐.
코리아 메디컬을 떠올리며, 회상을 하던 그때.
지이잉.
휴대전화에 벨이 울리기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서류를 덮은 뒤,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면에 떠오른 뜬금없는 발신인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진 채, 울리는 전화만 뚫어지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