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서 이사와 나는 옥상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난간에 기대어 섰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민 차장. 아이디어 뭐야? 너무 좋던데?”
“그렇습니까? 국내에서 그런 제품을 만드는 것 자체가 의미도 있고, 좋을 것 같다고 항상 생각했었습니다.”
“그러게. 진짜 지훈이 너, 천재 아니야? 하하.”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물론 해외에서 하는 메디컬 기구의 우세함이 분명히 있지만, 국내에도 충분히 좋은 제품들이 있지 않습니까. 디벨롭시켜서 개발만 잘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응.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근데 백 이사도 그렇고, 분명 임 차장도 임 사장한테 제조는 아직 이르다고 설득한다면……. 당장 시작은 힘들지 않을까 싶어 걱정이네.”
“그렇겠죠? 추진한다고 하더라도 스타트가 굉장히 늦을 것 같습니다.”
“이놈의 회사는 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꿈을 펼칠 수도 없네. 발전이 없어, 발전이. 하.”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새하얀 연기가 앞을 감싸고, 그가 진정할 때쯤, 그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내게 질문을 던졌다.
“아! 민 차장 너, 거대 메디컬에서 스카우트 제의받았다며? 아침에 오자마자 물어본다는 걸 이제야 물어본다.”
나는 그의 말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친한 서 이사이지만, 직장 상사에게 라이벌 회사에서 받은 스카우트를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었다.
“아… 말씀 안 드리려고 했던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조 차장이랑 이야기하다가 듣게 됐어.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생각은 다 했어?”
“아직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는 내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뻐끔거리며 담배를 피우던 서 이사는 긴 연기를 내뿜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같은 회사를 다니면서, 이렇게 말해 주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에 나는 서 이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훈이 넌 대단한 인재라고 생각해. 메디컬 업계에서 앞으로도 충분히 더 가능성 있고 말이야.”
“과찬이십니다, 이사님.”
“아니야. 잘 한번 생각해 봐. 그저 회사만을 위해서 남아라, 거대 메디컬로 가는 게 낫겠다, 같은 조언은 섣불리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면서 진지하게 고민해 봐.”
그는 말을 마친 뒤, 담배에 남아 있던 불을 꺼트렸다.
“이사님. 조언 감사합니다. 정말요.”
“감사는 무슨. 아무튼, 나 먼저 내려갈 테니까. 복잡한 것도 많을 텐데 생각이나 하면서 농땡이 좀 부리고 내려와.”
그는 내게 미소를 보이고는 옥상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내려가고 옥상에 홀로 남은 나.
나는 그의 말대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옥상만큼 생각 정리가 잘 되는 곳이 또 없다.
요즘 항상 틈만 났다 하면 이 생각 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거대 메디컬로 이직을 하느냐, 코리아 메디컬에 남느냐와 같은 단순한 고민은 아니다.
물론 지금 그 선택의 기로가 단순할 만큼 가볍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내게 가장 필요한 선택은 그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 이사의 말대로 당장 눈앞에 있는 나무가 아닌, 숲을 보며 멀리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 나이 서른셋.
앞으로 인생을 바라보았을 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게 더 현명할까.
우선 거대 메디컬로 가는 것은 거의 결정을 짓기는 했다.
거대 메디컬도 사장의 딸인 한민아 과장이 일하고 있으니 가족 회사인 셈이다.
가족 회사에서 이미 델 대로 데었기에, 굳이 재차 가족 회사를 가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거대 메디컬은 내가 생각하고 겪었던 임 사장, 임 차장과는 전혀 다를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가족 회사라는 명목이 내가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하는 데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그저 더 큰 고민이 많았기에, 거대 메디컬과 코리아 메디컬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매우 작게 느껴졌을 뿐.
내가 많은 것을 얻는 것도 아니었고, 당장 몸값을 부풀리며 회사를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막연하게 메디컬에서 최고가 되자, 가장 높은 곳으로 오르자는 게 목표였다.
신입 시절에는 그저 거래처 하나만 더 따오자, 병원 몇 군데를 목표로 영업 해오자. 이런 단순하고 명료한 목표가 있었다면, 지금은 그 목표치가 커진 것이지.
그리고 나는 한 단계씩 차근차근 올라왔고, 여전히 오르고 있는 중이다.
내가 원하는 최고란 뭘까?
내가 원하는 메디컬에서 가장 높은 단계란 뭘까?
코리아 메디컬의 이사가 되는 것?
더 나아가 임정준 사장에게, 임 차장 대신 내가 회사를 물려받는 것?
그것은 내가 막연하게 생각해 왔던 최고와 다르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코리아 메디컬의 우두머리, 그게 메디컬의 최고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과정이 내가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거대 메디컬도 아니고, 코리아 메디컬도 아닌 나의 회사를 차려, 그들의 적수가 되어서 대한민국의 1인자가 되는 것.
어쩌면 오히려 이게 더 내가 생각한 메디컬의 꼭대기, 그 정상에 가까운 것 아닐까?
* * *
그날 저녁.
기나긴 회의와 많은 생각들로 머리가 과부하에 걸릴 것처럼 바쁜 하루를 보냈다.
이대로 집으로 간다면 아무 생각 없이 침대로 다이빙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지칠 대로 지친 오늘이었지만, 사랑스러운 내 여자 친구, 김사랑과의 선약이 있었기에 나는 머리를 세차게 가로저으며 털어버리고, 그녀를 만나러 향했다.
오히려 그게 더 내게는 힐링이 되는 요소일 테니까.
“지훈아!”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하고 한걸음에 달려와 아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는 그녀.
내 품에 폭 들어오는 그녀는 나를 안은 채, 등을 토닥였다.
힘든 일은 털어버리고 그녀를 만나러 간 것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내가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 지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
내 품에서 나온 그녀는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뭐야,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배고프겠다, 얼른 밥 먹으러 가자! 오늘 병원에 환자는 많았어?”
“힝. 오늘 환자가 얼마나 많이 왔었는 줄 알아?”
그녀는 귀여운 투정을 부리며, 내 왼편에 서서 팔짱을 끼고 걸었다.
식사를 마친 그녀와 나는 자연스레 우리가 자주 가는 와인바로 향했다.
“왔어?”
“네, 저희 왔어요!”
오픈 때부터, 그리고 우리의 연애가 시작되기 전부터 오던 곳.
이제는 단골이 되어 사장님과 편하게 인사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녀와 나는 항상 우리가 앉는 자리로 걸어가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보통의 연인들과 마찬가지로 서로의 직장, 회사에 관한 이야기를 시시콜콜 나누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서 바로 옆에 원장실 있지?”
“어. 거기가 박 원장님 진료실 아니야?”
그녀는 내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그 원장님 진짜 완전 꼰대 다 되셨다니까? 나보고 아침에 옷가지고 뭐라고 하시는 거야. 병원에 그렇게 입고 오냐는 둥, 평소에는 무슨 옷을 입냐는 둥.”
“어차피 자기는 병원에서 옷도 다 갈아입잖아. 항상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서 가운까지 걸치는데, 왜 그러시는 거야, 대체?”
“내 말이! 나 진짜 스트레스받았다니까?”
“그러게. 진짜 스트레스받았겠네. 고생했겠다, 사랑이.”
그녀는 내 말에 기분이 풀린 듯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근데 지훈이는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응? 나, 왜?”
“얼굴이 안 좋아 보여서…….”
“오늘 회의 있었지.”
“뭐? 그럼 또 그 임 차장인가 뭔가가 거슬리게 한 거야?”
그녀는 우리 회사에 대해 평소 궁금해했고, 우리 회사의 직원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니야. 그냥 회의하고 나면 알잖아. 진이 빠지는 거.”
“그건 맞지. 무슨 회의였는데 오늘 유독 힘들어하는 거야? 걱정된다.”
그녀의 물음에 순간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이 메디컬 업계에서 나보다, 우리 회사 직원들보다 더 직접적인 현장에서 뛰고 있는 그녀다.
여자 친구이지만, 병원 의사인 그녀에게 물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랑아.”
“응?”
“혹시 외상 수술 말이야. 플레이트랑 스크루를 추후에 리무발 수술하지 않고, 녹는…….”
나는 그녀에게 내 아이디어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고, 그녀는 누구보다 집중한 얼굴로 내 말을 경청했다.
한참이나 내 이야기는 이어졌고, 모든 설명이 끝나자 그녀는 미간을 한껏 찡그린 채 입을 열었다.
“헐. 뭐야? 너무 대단한데?”
“정말이야?”
“어! 너무 좋은데? 아니, 이건 남자 친구라서가 아니라 진짜 괜찮다. 아니지.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
그녀는 정말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의사의 입장에서 그녀는 내 아이디어를 냉철하게 평가하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럼 그 플레이트는 어느 부위든……”
그렇게 우리는 데이트에서 마치 학회를 하는 분위기로 넘어가 서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앞에 있는 와인은 단 한 잔도 마시지 않은 채 이야기에 집중했다.
이렇게 일적인 면에서도 나와 잘 통하는 그녀다.
나는 이런 그녀의 모든 면이 좋았다.
* * *
몇 주의 시간이 훌쩍 지났다.
뭐가 그리 급한지, 길가에는 벌써 꽃봉오리를 피우는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길가를 지나, 행복 정형외과로 향했다.
오늘은 병원장의 호출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나와 약속을 잡은 병원장.
하지만 그의 진료실 문 앞 진료 알림 표에는 ‘진료 중’이 아닌, ‘휴진’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나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건가?
나는 서둘러 그에게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전화를 들었다.
딩동.
그 순간 동시에 울리는 문자 알림음.
[민 차장. 오늘은 진료실 말고 병원장실로 올라오게.]
나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행복 정형외과의 병원장실.
병원에 그동안 찾아오며,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곳이다.
그곳은 완전한 개인 공간으로 알고 있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용도, 혹은 그가 쉬는 개인 공간일 거라는 것도 내 예상이었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왜냐, 항상 나는 그를 진료실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대체 왜 오늘은 병원장실로 부르는 거지?
똑똑.
나는 병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안녕하십니까, 병원장님!”
문을 여는 순간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병원장실 안의 공간이 생각보다 훨씬 넓었기 때문이다.
역시 우리나라에서 제일가는 정형외과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을 정도로 커다란 규모에 놀라고 말았다.
“어서 와. 병원장실에는 처음 왔지?”
내 인사에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나를 반기는 병원장.
“예. 처음 왔습니다. 굉장히 좋은데요, 병원장님?”
“그래? 하하. 메디컬 직원들 중에 이곳에 온 사람은 아마 민 차장이 처음인 것 같은데?”
규모에도 놀랐지만, 이곳에 내가 처음 방문하는 메디컬 직원이라니.
나는 재차 놀라 입을 떡하니 벌렸다.
“정말입니까? 와. 영광입니다, 병원장님!”
“여기는 거의 나 혼자만 쓰는 곳이거든. 내 개인적인 지인들만 초대하는 공간이야. 병원에 다른 의사들도 잘 올라오지는 않는 곳이니까.”
“아……. 진료실이 있으니 대부분 거기서 만나셨겠네요.”
“맞아.”
“이런 공간이 있는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병원장실이 진짜 멋있습니다.”
그는 뿌듯하다는 듯 자신의 방을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료실에서 볼 수 없었던, 병원장의 상패와 각종 자료들.
이 병원장실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책장들에 모든 자료가 정렬되어 있었다.
그리고 또 한쪽 벽면 가득 책장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책장에는 책들도 꽂혀 있었지만, 그의 취미 생활로 보이는 것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 미간을 모아 집중했다.
내 시선을 확인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하하. 가서 봐도 괜찮아.”
병원장은 턱으로 그 책장을 가리키며, 흔쾌히 보여주었고 나는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