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 미안해해야 할 사람은, 네가 아니야 】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빠져나간 조용한 회의실.
이 회의실 안에 남은 사람은 총 두 명.
나와 조 차장이었다.
“아니, 부산으로 가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하.”
내 말에 조 차장은 아무런 대답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 부장은 담당 병원 원장과 중요한 선약이 있어 오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탓에 아직 조 차장의 발령 소식은 듣지 못한 상태였다.
“차장님, 죄송합니다.”
나는 조 차장을 향해 사과했다.
내가 조 차장의 발령에 관여한 것은 아니지만, 괜히 그에게 백 이사의 이야기를 해준 것은 아닌가,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조 차장이 발령까지 가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만감이 교차했다.
줄곧 무표정으로 있던 조 차장은 내 사과에 화가 난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민 과장이 나한테 왜 미안해. 저번에도 말했는데, 나도 백 이사님 의심하고 있었고, 내가 먼저 알게 됐다고 해도 바로 사장님께 말했을 거야. 민 과장이 미안해하거나 내 걱정할 거 아니니까 사과할 필요 없어.”
“그래도…….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부산은 좀 아니지 않습니까.”
“하.”
그는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휴대전화를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부장님. 접니다.”
그는 오늘 회의에 빠진 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렇게 서 부장에게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는 조 차장.
조 차장의 통화 음량이 큰 덕에 서 부장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서 부장 또한 화가 많이 난 듯한 음성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임 사장과 백 이사에게 이야기를 해볼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은 조 차장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처자식도 있는데, 서울에서 부산으로 보내는 건 진짜 아니지 않나. 하. 더럽네, 진짜.”
* * *
같은 날, 저녁.
우리 셋은 퇴근하자마자 자주 가던 술집에 모였다.
주문한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술병을 오픈하는 조 차장.
그는 연달아 소주를 들이켰다.
나는 그의 손에 있는 소주병을 잡아들고,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말이 좋아 인사이동이지. 그냥 좌천 아닙니까?”
서 부장은 조 차장의 말에 술을 들이켠 뒤 답했다.
“나도 찾아가서 이야기했는데, 무슨 생각인지 아주 확고하더라.”
“이유가 뭐랍니까?”
“부산에 매출이 너무 안 나와서, 직책 높고 실력 있는 사람 보내려고 하니까 조 차장이 적격이라더라고.”
“저도 따로 백 이사랑 이야기 다시 했는데, 같은 말만 반복하더라고요. 당장 준비해서 가라고.”
백 이사는 서 부장이 직접 찾아가 이야기했음에도 속뜻을 밝히지 않고, 회의실에서 한 말과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나 보다.
속뜻이 있을 거라는 것 또한 우리의 추측이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백 이사의 횡령 이야기를 임 사장에게 전한 것이 조 차장이었고, 직후에 조 차장의 발령이 결정 났으니, 이 둘은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추측하기에 충분했다.
“적격은 무슨……. 서 부장님, 아무리 그래도 제가 이렇게 갑자기 부산을 가는 건 진짜 아니지 않습니까? 숙소를 준다고 하는데, 그거야 뭐 당연한 거고요.”
서 부장은 확신에 찬 얼굴로 조 차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철아.”
“예.”
“다음 달이면 승진인 거 알지? 한 달만 거기서 버티고 있어 볼 수 있겠냐?”
얼마 지나지 않으면 회사에 승진일이 다가온다. 그리고 거기서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인 서 부장의 이사 승진 소식이 있지.
서 부장의 계획은 이러했다.
지금 임 사장, 백 이사의 생각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이 팩트. 그러니 자신이 이사직으로 올라갔을 때 조 차장을 다시 서울로 데려오겠다는 것이다.
서 부장의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지금 그가 나서서 회사에 따진다고 한들, 바뀌는 것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승진 직전에 오점이 찍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 차장과 나 역시 서 부장의 말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 네, 어차피 방법이 그거밖에 없지 않습니까.”
조 차장은 술을 한 잔 마시고는 혼잣말로 참아왔던 욕을 내뱉었다.
“X발.”
그의 마음을 알기에, 나와 서 부장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빈 술잔을 채워줄 뿐.
나는 조 차장을 바라보며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미안함’.
그리고 회사에 대한 ‘환멸감’.
나는 앞에 놓인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입에 털어 마셨다.
“지훈아.”
조 차장의 부름에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예, 차장님.”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일해. 백 이사 그 새끼가 내가 꼴 보기 싫어서 보내는 걸 수도 있지만, 임승재… 그 조카 때문에 내 자리를 없애려고 했던 걸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는 내게 술을 따라 부어주며 말을 이어 갔다.
“빈 차장 자리, 네가 꼭 올라가. 나도 금방 돌아올 테니까.”
조 차장은 스스로 다짐하듯 이야기했고, 나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던 서 부장이 술잔을 들며 입을 열었다.
“성철이 너도 부산 가서 조금만 참아. 오래도 아니야. 한 달만 바람 쐬면서 쉬고 있어. 내가 이사직 오르는 순간 바로 성철이 너부터 데리고 올라올 테니까.”
“네, 부장님. 부장님 꼭 이사직으로 올라가시고, 민 과장도 차장직 올라가서 있어. 저도 제 자리에서 최대한 열심히 하고 있겠습니다.”
회사라는 곳에서 이미 통보가 내려진 일을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특히나 사장과 이사, 위에서 모두 결정해 버린 일을 한참 아래 직원이 뒤바꾼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일.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뿐이었다.
* * *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조 차장은 사무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임 사장과 백 이사도 그를 한순간 부산으로 보낸다는 사실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지, 며칠의 짧은 휴가를 주었다고 들었다.
차장직에서 한 사람이 부산 지사로 이동했지만, 회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저 달라진 것이라고는 비어 있는 책상 하나.
그리고 아쉬워하는 사람이라고는 나와 서 부장뿐.
조 차장의 발령 전 마지막 출근 날에도 다른 직원들은 그에게 짧은 아쉬움만을 표출한 뒤 다시 정신없는 일상으로 급히 돌아갔다.
이제 승진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진 발표를 앞두고 있는 요즘, 모든 직원이 뒤숭숭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누가 승진을 하느냐, 누가 현재 직책에 머무느냐도 중요했지만, 조 차장이 부산 지사로 발령이 나면서 또 다른 직원도 지사 발령이 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다들 본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백 이사의 담당 병원이었던 라임 정형외과는 백 이사 담당 병원 목록이 적힌, 거래처 현황 목록 칠판에서 어느 순간 빠져 있었다.
조 차장이 임 사장에게 백 이사의 횡령에 대해 이야기를 한 뒤, 이후의 일을 그 누구에게도 자세히 이야기하거나, 언급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조 차장의 이야기로 인해 백 이사가 결국 라임 정형외과에서 손을 떼게 된 모양이다.
백 이사는 그저 목록에서 라임 정형외과 한 줄만 빼게 되었지만, 조 차장은 그 일로 인해 사무실에서 자리가 사라지게 되었다.
잘못을 한 것은 명명백백하게 백 이사다.
하지만 그저 ‘이사’라는 위치 하나만으로 결론이 이렇게 갈리게 된다는 사실에 나는 굉장한 회의감이 들고 말았다.
* * *
“당신, 무슨 일로 집에서 혼자 소주를 마셔?”
어두컴컴한 집 안.
조 차장이 앉아 있는 식탁을 비추는 조명만이 유일하게 켜져 있다.
아무런 안주 없이 소주와 소주잔 하나만을 식탁 위에 올려둔 조 차장을 보며, 아내가 부엌으로 다가왔다.
“…그냥. 오늘 혼자 한잔하고 싶어서. 왜 안 자고 나왔어?”
“당신이 이러고 있는데, 안주라도 하나 차려주려고 나왔다. 무슨 일 있어?”
“아니. 별일 아니야.”
“왜, 회사에 안 좋은 일 있는 거야?”
아내의 말에 조 차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시 뒤, 아내는 조 차장 앞에 작은 뚝배기 하나를 올려놓았다.
“속 버려. 이거 먹으면서 마셔. 힘든 일 있으면 혼자 끙끙대지 말고 말해.”
“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안주잖아?”
아내의 말을 들었는지, 듣고도 모른 체하는지 조 차장은 보글보글 끓고 있는 번데기탕에 수저를 푹 담갔다.
“술 많이 마시지 말고! 나 애들 재우러 들어간다?”
“응. 고마워. 먼저 자.”
조 차장의 수저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대로 한 입 먹는 그.
소주를 부었던 빈속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가족도 있는데, 축 처져 있을 때가 아니지. 열심히 살아야지…….”
조 차장은 혼잣말을 한 후 소주를 한 잔 들이켰다.
지이잉.
그때,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속이 상하는 마음에 혼자 술잔을 기울였던 그였지만, 오밤중에 걸려오는 전화에 자신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어 곧장 수신 버튼을 눌렀다.
“민식이냐?”
- 뭐야? 뭐 하고 있는데 이렇게 빨리 받냐? 혹시 나 기다렸냐?
“하하, 그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 술이나 한잔할까 해서 전화했지. 근데 목소리가 이미 술 마신 것 같다? 어디 술집이야?
“나 집에서 한잔했다.”
- 뭐? 네가 집에서 혼자? 무슨 일 있냐, 성철아?
역시 그의 친한 친구다운 답이었다.
전화를 건 상대는 거대 메디컬의 박민식 차장이었다.
항상 술친구를 자처하던 그였기에, 조 차장의 목소리와 말투로도 그가 무슨 일이 생긴 것임을 직감한 듯했다.
“하하하. 나 부산 가게 생겼다, 민식아. X발.”
- 어? 부산? 설마…….
“어. 부산 지사.”
- 야, 저번에 말했던 회사에서 거지 같은 통보가 그거였어?
“응. 좋은 말로 인사이동이지, 그만두라는 거 아니냐?”
- 미친. 제수씨랑 애들은 어쩌고?
“내 말이. 그렇다고 안 가면 진짜 그만두는 거잖아. 내 새끼들 먹여 살려야지.”
- 하. 야, 성철아. 잠깐만.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래.”
무슨 일이 생긴 듯 전화를 끊는 박민식 차장.
그와의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는 조 차장은 연달아 술을 들이켰다.
몇 분이 흐르고, 그의 앞에 소주는 벌써 반이 비었다.
그리고 재차 울리는 휴대전화.
“여보세요?”
- 어. 성철아 난데.
“응. 말해.”
- 너 우리 회사에 이력서 넣어보는 건 어떠냐?
“뭐? 나보고 거대 메디컬에 이력서를 넣으라고?”
- 뭘 그렇게 놀라.
“인마.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라이벌 회사에 가는 건 좀 그렇지 않냐?”
- 안 될 게 어디 있냐? 막말로 회사에서 갑자기 그렇게 부산 지사로 보내는 건 말이 되고? 우리 이번에 경기도 쪽으로 인원 충원하면서, 본사에 자리 좀 생겨서 사람 구하고 있거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귀가 쫑긋하는 조 차장이다.
“그런데?”
- 알다시피 나도 차장인데, 무슨 힘이 있겠냐. 그냥 나도 윗선에 슬쩍 말만 해줄 수 있는 거지. 네가 이력서 넣는다고 해도 된다는 보장은 나도 못 해.
“아이, 우리 박 차장님께서 그런 능력도 안 돼?”
- 인마. 그럼 내가 아직도 차장이겠냐? 그런 능력 있으면 이미 저 위에 있지. 하하. 아무튼, 한번 이력서라도 넣어 봐. 아무리 그래도 제수씨랑 애들 생각하면, 부산 가는 것보다 거대 메디컬로 오는 게 훨씬 낫지 않겠어?
그의 말이 모두 맞다.
그것을 조 차장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섣불리 그러겠다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
조 차장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박 차장이 재차 입을 열었다.
- 내일 일어나서 다시 한번 생각해 봐. 나는 거대 메디컬로 오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해. 내일 연락 줘라. 혼자 집에서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인마.
“그래. 고맙다, 민식아.”
전화를 끊은 뒤, 조 차장은 많은 생각을 하며 소주를 들이켰다.
코리아 메디컬에 남아 부산으로 갔다가, 서 부장의 승진을 기다린 후 본사로 복귀를 하느냐.
자신을 몰아내 버린 코리아 메디컬을 버리고, 라이벌 회사 거대 메디컬로 넘어가느냐.
그는 그렇게 긴 밤을 한숨과 고민으로 지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