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화
똑똑.
“안녕하십니까. 코리아 메디컬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원장은 의자에 앉은 채,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의 얼굴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성수기인 겨울, 그리고 새해가 됐기에 찾아오는 환자가 많았던 모양.
더불어 나와 같은 메디컬 영업사원들도 많이 찾아온 것으로 알고 있다.
“예, 여기 앉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원장님.”
내 새해 인사에 그는 형식적인 미소를 보였다.
“예, 과장님도요.”
그렇게 대화는 흘러갔고, 본론인 업무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갔다.
“…이 제품 급여 인증 기준을 보시면, 최대 다섯 번까지 사용이 가능해서 편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
“와, 그러네요. 괜찮은데요?”
내가 가지고 온 두 가지의 제품을 모두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그의 표정을 살폈다.
아주 살짝 미세하게 찡그리고 있는 그의 얼굴.
표정만 보아도, 말투만 들어도 알 수 있다.
그는 지금 이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을.
입으로는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는 내가 병원을 떠난 이후 내게 연락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현재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에게 권한 저 제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지.
어떤 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정확하게 모두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지금 소개했던 제품들과 다른 특성의 물건을 제안한다면, 그가 원하는 제품을 찾는 데 조금 가까워질 터.
나는 재빨리 가방을 뒤적여, 방금 보여주었던 제품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는 물건을 내밀었다.
“원장님. 그럼 이 제품은 어떤지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에게 새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
그리고 그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썩였다.
“이게 회복할 때 반응이 더 괜찮네요.”
맞았다.
역시 그는 내가 처음에 내밀었던, 수술 시 장점보다 수술 후 회복에 대한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속마음을 듣고 알아차린 것은 아니다.
듣고 싶어도 속마음은 들리지 않았다.
어떨 때 속마음이 들려오는지 나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듣고 싶을 때, 듣고 싶은 사람에게 들을 수 없는 것이지.
속마음을 굳이 듣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나에게는 영업의 감이 있다.
애초에 속마음이 들리지 않았던 때도 있지.
불과 거의 1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이런 능력은 없었으니까.
내게만 들리는 상대방 내면의 이야기.
그로 인해 나는 영업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어느 정도 상대방의 표정과 분위기를 보고 단번에 그가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표정으로 속마음을 완전히 알아낼 수는 없지만, 그것을 통해 영업의 감을 더 빨리 익힐 수 있었지.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상대를 알아내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도 온전히 알지 못하는 세상에서 어찌 남의 마음을 전부 꿰뚫고 있겠는가.
그저 내가 영업에서만큼은 의사가 필요로 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둘 중 어느 제품을 조금이라도 더 선호하는지, 의사의 의료 기기 취향이 어느 쪽인지 알아내는 것이 다른 영업 직원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은 자부할 수 있다.
나는 이것만으로도 메디컬 영업직에서 엄청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영업직은 어떻게든 물건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사는 사람은 결국 그 물건을 원해야 하는 것이지.
단순히 물건만 보고 마음에 들어 할 수도 있지만, 그 전에 상대방이 마음에 들 만한 물건을 제시해 주는 것.
그게 바로 영업직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 스킬이 더 뛰어난 자가 영업의 고수가 되는 것이지.
원장은 내가 제안한 물건 설명을 들으며, 점점 표정이 풀어졌다.
아니, 이내 진지한 얼굴로 내게 물건에 대한 자세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아마 원장은 곧 내게 이 물건을 발주할 것이다.
* * *
며칠이 지나고 아침부터 사무실로 출근한 오늘.
새해가 됐다고 해서 회사에서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저 다들 새해 연휴를 보내며, 각오를 다지고 왔다는 것?
그뿐이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다들 의욕이 넘치는 상태로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물품 창고 앞에서 물건을 챙기고 있는 백 이사를 보며 나는 허리를 접었다.
그는 내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물건을 보며 입으로는 숫자를 세기에 바쁜 듯 보였다.
“이사님, 바쁘시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내가 그에게 다가가자 그는 화들짝 놀란 듯 입을 열었다.
“어? 민 과장, 언제 왔어?”
바쁘게 일하는 탓에 조금 전 내 인사를 듣지 못한 모양.
“저 조금 전에 왔습니다. 아침부터 납품하실 물건이 많으신가 보네요?”
“응. 그러게. 오늘 갑자기 병원 납품일이 겹쳐서 정신이 없네. 민 과장은?”
“저도 지금 납품할 물건 챙기러 왔습니다.”
“그래. 그럼 고생해.”
“넵.”
그의 말에 나 역시 바로 옆에서 물건을 챙겼다.
나는 미리 방문해야 할 병원 루트를 정해 두었기에,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물건 정리를 마쳤다.
그에 반해, 백 이사는 여전히 납품서와 물건을 바라보며 정리하기에 바쁜 듯 보였다.
물건을 상자에 가득 담아 사무실을 나서기 위해 그에게 인사를 하려던 그때, 눈에 들어오는 납품서 한 장.
라임 정형외과의 납품서였다.
라임 정형외과는 지금 내가 납품을 하러 가는 곳 바로 옆에 있는 병원.
말을 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정신없이 바빠 보이는 백 이사.
어차피 나는 라임 정형외과 근처 병원을 갈 것이었기에, 그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사님. 라임 정형외과도 오늘 물건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응. 그렇지? 그래서 챙기고 있어, 왜?”
“혹시 오늘 바쁘시면, 제가 도울 일 있을까요?”
그가 먼저 지시하는 일이 아닌, 내가 그의 일을 자처해서 돕는 것이기에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병원에 물건을 납품하는 것은 단순히 물건만 넣는 것이 아니다.
병원에 간 김에 담당 의사를 만나며 이야기도 나누고, 피드백을 주고받기도 하기 때문에 섣불리 다른 직원의 병원에는 잘 가지 않는 것.
하지만 백 이사는 환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도와주면 나야 고맙지. 안 그래도 오늘 이 많은 병원 어떻게 다 가나 하고 있었거든.”
그는 도움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가 들고 있는 병원 목록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내 담당 병원 근처에 있는 곳은 라임 정형외과뿐.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백 이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민 과장, 블랙 정형외과 좀 가줄 수 있겠나? 여기 오전에 들어가야 하거든.”
블랙 정형외과는 내가 가는 병원과 정반대 방향.
나 역시 오늘 담당 병원을 오전에 들어가야 했기에, 그를 돕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오늘 병원에 원장님과 오전 선약이 있어서요. 그 병원이 라임 정형외과 바로 옆인데, 라임 정형외과 들어갈 물건을 제가 납품해도 되겠습니까?”
“라임 정형외과를?”
그는 순간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물건을 살펴보았다.
블랙 정형외과 업무를 시켰는데, 내가 거절해서 기분이 나쁜 건가?
하지만 그의 지시를 듣고 가는 것보다 나에게는 병원 원장과의 선약이 더 중요했다.
나는 재빨리 그를 향해 답했다.
“아니면 블랙 정형외과는 제 담당 병원 갔다가, 오후에 들어가도 될까요? 오후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니. 블랙 정형외과가 무조건 오전에 들어가야 해서…….”
그는 쓰읍 소리를 내며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들고 있던 납품서를 바라보며 고민하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라임 정형외과 좀 가줄래? 이것도 오전까지 들어가야 하는 일이라, 내가 지금 라임이랑 블랙 때문에 고민이었거든. 내가 블랙 정형외과를 오전에 가고, 민 과장이 라임 정형외과 좀 가줘.”
“넵! 제 담당 병원은 아직 시간이 남아서, 라임 정형외과 먼저 바로 들려서 납품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아닙니다. 그럼 이 물건 챙기겠습니다.”
나는 그의 앞에 놓여 있는 ‘라임 정형외과’라고 쓰여진 물건을 내가 챙겨둔 상자 안에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준비해 둔 카트에 상자를 싣던 그때.
“민 과장!”
“예, 이사님.”
그의 부름에 나는 자세를 고쳐 세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라임 정형외과 가면 꼭 수간호사 선생님한테 물건 납품해야 해.”
“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약에 납품할 때, 다른 간호사 선생님들밖에 없으면 기다리든지, 아니면 수간호사 선생님 불러 달라고 해서 꼭 수간호사한테 납품해야 한다고.”
“아……. 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굳이?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병원에 납품하면서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라…….
나는 아직까지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기에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구태여 묻거나, 그거에 의문을 가질 생각은 없다.
내 표정에 ‘굳이?’라는 듯한 표정이 드러났는지 그는 말을 덧붙였다.
“내가 다른 선생님들은 잘 모르기도 하고, 내가 워낙 수간호사랑 오래된 사이라…….”
그는 수간호사에게 납품해야 하는 이유를 내게 늘어놓았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문이 가시지는 않았다.
이렇게 주절주절 알려줄 필요가 있는 건가?
뭐 병원마다 정해진 것도 있을 것이고, 특히나 백 이사가 담당하는 병원이기에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그리고 뭐 사회생활에서 이상한 점들이 한둘이랴.
이상한 점들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내 뜻대로 이뤄지는 게 더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사회생활 4년 차.
눈으로 보지 않는 이상, 내가 직접 겪지 않는 이상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 편하다.
“그러니까 수간호사 선생님한테만 납품해야 한다는 거죠, 이사님?”
“응. 꼭 수간호사 선생님한테 납품하고, 서명받아와야 해. 아마 거기에 코리아 메디컬이라고 하면 알 거야.”
“예, 알겠습니다.”
“물건은 내가 맞게 다 챙겨뒀으니까, 가서 확인 안 하고 이대로 넣어 줘도 돼. 그리고 서명만 받아와 줘.”
“네.”
“고마워.”
그는 내가 카트에 실은 상자를 테이프로 꽉꽉 봉했다.
그리고 나는 그가 건네주는 납품서를 받아들고 나서야 사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라임 정형외과.
이 병원은 그렇게 큰 건물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작은 곳도 아니지.
그저 동네에 있는 보통의 정형외과 정도?
이런 곳의 특징은 체계가 조금 뚜렷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큰 정형외과나 종합 병원에 비해서는 말이다.
그래서 부서가 적거나, 한 부서에서 일하는 업무 자체가 다양하다.
회사로 비교하자면, 중소기업 느낌.
대기업은 보통 회계부, 총무부, 영업부, 마케팅부 등 전부 부서가 딱딱 나뉘어 있다.
그리고 부서마다 하는 일이 딱 정해져 있지.
하지만 작은 중소기업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회계, 총무, 마케팅 등 모든 부서를 모아 ‘경리부’라고 하나로 칭해 버리기 일쑤.
한 직원이 여러 가지의 업무를 동시에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런 식으로 작은 병원에는 중소기업처럼 여러 가지 일을 홀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건 납품하러 오셨을까요?”
나를 본 간호사가 말을 걸었다.
내가 카트를 끌고 있는 것을 보아, 당연히 메디컬 직원이 납품하러 온 것이라고 알아차린 모양.
“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저 따라오시면 돼요. 바로 앞이에요.”
“예, 감사합니다.”
그녀를 따라 50m 정도 걸어가니 보이는 물건 창고.
“여기 안에 넣어주시면 돼요. 납품서 주세요!”
그녀는 납품 창고 문을 열어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납품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 간호사복 한쪽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아… 저 수간호사 선생님은 자리에 안 계신가요?”
“그냥 저한테 주셔도 돼요!”
그녀는 바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납품서를 찾기 위해 내 손을 바라보았다.
“제가 라임 정형외과 담당자가 아니라서 물건 납품만 하러 온 건데, 수간호사 선생님께 전달 요청을 받아서요.”
내 말에 그녀는 코로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어디 메디컬이신데요?”
“코리아 메디컬이요.”
내 말에 그녀는 입을 벌리며 알았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코리아 메디컬에서는 수간호사가 받아야 한다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이다.
“잠시만요. 수간호사 선생님 불러드릴게요.”
그리고 돌연 사라지는 그녀.
라임 정형외과는 수간호사가 코리아 메디컬 물건을 받는 게 정해져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녀가 수간호사를 부르러 떠난 사이, 나는 짐을 한쪽에 내려놓은 뒤 납품서를 꺼냈다.
그리고 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백 이사가 물건의 개수를 확인해서 넣었을 테지만, 나는 재차 그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테이프를 뜯었다.
그가 분명 확인했으니 그대로 넣어도 된다고 했지만 말이다.
내 담당 병원이 아니기에 물건을 잘못 넣으면 큰일이니까.
나는 봉인되어 있던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납품서를 옆에 두고, 서류상 물건과 상자 안의 물건 개수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맞지 않는 숫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왜지? 이렇게 개수가 안 맞을 수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