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 이유가 없는 것은 없다 】
“네, 모던 정형외과의 김사랑 원장이요.”
내 말에 장 사장과 손 차장, 그리고 한태준은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어떻게 김 원장님이랑…….”
한태준은 넋이 나간 얼굴로 말을 끝맺지 못했다.
놀랄 만도 하지.
메디컬 업계에 다니면서 의사와 사귀고 있다는 사람의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년간 메디컬에 몸을 담고 있지만, 주변에서 병원 관련 사람과 만남을 가진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기는 했었다.
그 병원 관련 사람은 의사가 아닌, 병원에서 근무하는 원무과, 총무과 직원, 그리고 간호사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내가 갑자기 병원의 의사와 만나고 있다니 다들 놀랄 수밖에.
다른 직업보다 의사라는 직업이 더 뛰어나기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저 정형외과에 여자 의사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지.
장 사장은 내게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럼 뭐야? 김 원장 서울로 갔다더니, 거기서 만난 거야?”
그의 말에 옆에 있던 손 차장이 입을 열었다.
“아니죠. 광주에서부터 사귀고 있었던 거 아닐까요?”
그들은 온갖 추측을 하며, 나와 김사랑의 연애에 대해 열띤 토론을 펼쳤다.
짧았지만, 나와 김사랑의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날 때까지 그들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집중했다.
“와. 진짜 축하드립니다.”
“고마워, 태준아.”
“그래. 정말 잘됐다. 나는 지훈이가 연애도 하면서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을 좀 보고 싶었거든.”
손 차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그제야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아이고. 민 과장은 언제부터 그런 마음이 있었던 거야…….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박 주임이랑 엮어주려고 했었네.”
장 사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 박 주임!
오랜만에 생각이 나는 그녀다.
“하하. 괜찮습니다, 사장님. 그런데 박 주임은 잘 지낸대요?”
“글쎄다. 퇴사하고 나서 연락을 따로 한 적이 없어서 말이야.”
“어? 저는 얼마 전에 연락했어요!”
역시 한태준.
성격도 좋고 상사들의 기분도 잘 맞춰주는 그였기에 퇴사를 한 이후에도 종종 그녀와 연락을 주고받았던 모양.
“정말? 네가 먼저 한 거야?”
손 차장은 놀랍다는 듯 한태준을 향해 물었다.
“네. 퇴사하고 잘 지내는지, 뭐 하고 사는지 궁금해서 몇 번 연락했었어요.”
“그래서 뭐 하고 지낸대?”
“뭐였더라, 메디컬이랑은 관련이 없었던 것 같은데……. 맞다! 제과인가 제빵인가, 뭐 아무튼 베이킹 쪽으로 공부하고 있대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공부하러 유학 간다고 했던 거구나?”
“네. 퇴사하고 얼마 안 있다가 바로 유학 갔다고 하더라고요. 박 주임님 목소리가 엄청 좋아 보이던데, 이제야 하고 싶은 일 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의 말에 장 사장과 손 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야 좋은 인재가 떠나가서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함께 일했던 가족 같은 직원이 좋아하는 일 하면서 행복해한다니까 기분은 좋네.”
장 사장은 여전히 직원을 생각하는 마음이 끔찍했다.
이런 사장이 또 있을까.
물론 회사 생활을 하며 장 사장이 매 순간, 정말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가족끼리라도 모든 것, 모든 순간이 나와 마음이 같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장 사장이 직원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많은 것을 배려하고 신경 써주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자신을 믿고 따라와 준 직원 중 한 명인 나.
내가 그의 밑에서 나와 코리아 메디컬에 가게 된 것도 그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내 의지로, 그리고 내 꿈을 펼치기 위해 코리아 메디컬로 간 것이지만, 장 사장과 손 차장의 진심 어린 조언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의 밑에 있기보다, 너의 인생을 생각하며 더 큰물로 가라고 쉽게 말해 줄 수 있는 상사는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회사의 오너라면 더더욱 그렇지.
오랜 기간 회사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을 겪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장 사장은 ‘사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기에 충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간 나도 저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게 된다면, 장 사장처럼 직원을 위하는 마음은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맞다, 민 과장. 그때 붕대 디벨롭했던 업체에서 신제품 개발한다고 연락 왔더라. 민 과장 잘 지내냐고 하면서!”
손 차장의 말에 한태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엥? 제가 아는 그 저희 붕대 받는 업체요?”
“어. 그 붕대 제조 업체 맞아.”
“그런데 거기서 신제품 개발하는데, 민 과장님을 왜 찾는 거예요?”
궁금증을 느끼는 한태준.
그의 질문에 나 대신 손 차장이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붕대 제품 있지?”
“약품 처리된 자가 점성 붕대요?”
“응. 맞아, 그 제품. 그거 민 과장이 아이디어 준 거거든.”
“네? 정말이요?”
한태준은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그를 바라보고 난 후, 멋쩍은 표정으로 손 차장을 향해 말했다.
“에이, 차장님. 그렇게 이야기하시면 제가 다 만든 것 같잖습니까. 하하.”
“민 과장이 거의 만든 거나 다름없지. 아이디어를 주니까, 그 사장님이 자신들의 제품에 디벨롭해서 탄생한 거니까.”
옆에 있던 장 사장마저 말을 거들었다.
“그렇지. 그 제품 아이디어를 민 과장이 준 덕분에, 거기 대박 났으니까 말이야. 민 과장, 진짜 메디컬 쪽 머리는 타고난 거야. 천재라니까, 천재? 하하.”
“와. 진짜 이 정도면 천재 아니십니까?”
계속되는 칭찬에 나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오랜만에 광주 왔다고 너무 띄워주시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
“띄워주기는! 그때 민 과장이 간단하게 한마디 던져주기는 했지만, 그 사장님이 바로 디벨롭해서 제품까지 제작, 출시한 거니까 민 과장이 다 한 게 맞지.”
“쑥스럽습니다.”
“근데 그렇게 잘 됐는데, 민 과장님한테 뭐 보상은 없었습니까?”
한태준이 내게 물었다.
“그러네. 민 과장, 돈이라도 좀 받았어?”
손 차장 역시 궁금한 듯 질문을 추가했다.
“그때 정말 고맙다고, 제품 출시됐다고 찾아오셨었어요. 그래서 돈까지 주시겠다는 거 거절했죠. 제가 직접 제품에 대한 정보를 다 드린 것도 아니고, 살짝 한마디만 조언해 드린 거였으니까요.”
“진짜? 아쉽네. 민 과장이 뭐 바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잘 됐는데 돈이라도 챙겨두지 그랬어.”
“하하. 그런가요? 여러 번 찾아오셨었는데, 제가 연신 거절했더니 선물을 주시더라고요.”
내가 그 약품 처리와 자가 점착성이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직접 단어를 던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테이프 없이도 붕대를 붙일 수 있으면 어떨까?
붕대 안에도 바로 약품 처리가 되어 있어 따로 약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편리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은 메디컬 업계에서 일하며 자연스레 들었던 생각이었다.
의사보다 더 많은, 더 여러 의료 기기를 보는 건 바로 우리 메디컬 직원이다.
그들에게 영업 나가 물건을 팔려면, 당연히 같은 기능을 가진 여러 제품을 직접 만져보고 사용법까지 익혀야 하니까.
그리고 그중 가장 좋은 물건을 선별해 의사에게 들고 가는 것이지.
그렇게 들고 간 물건이 무조건 의사에게 호평을 받는 것은 아니다.
사용해 보고 피드백을 남겨주기도 하고, 또는 혹평을 남기는 의사들도 있다.
이런 생활을 몇 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제품의 단점을 확실하게 알고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제품이 어떻게 발전해야 좋을지에 대한 아이디어들이 자연스레 떠오르고는 한다.
지금 말하고 있는 붕대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장 사장은 한참 말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다가 입을 열었다.
“민 과장.”
“예, 사장님?”
“민 과장은 다음에 물건 제조 쪽으로도 손을 대보는 건 어때?”
“네? 제가 제조에요?”
“응. 이런 아이디어도 가끔 나에게 이야기했던 적도 있잖아. 민 과장은 항상 위를 보고 사는 사람인 것 또한 내가 잘 알고 있고 말이야.”
“에이. 제조 쪽까지는 제 영역이 전혀 아닌걸요.”
장 사장의 말에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조와 판매는 너무 다른 길이다.
예전에는 막연히 이런 제품은 어떨까? 저런 제품은 피드백이 이렇게 나오던데, 단가가 오르더라도 조금 추가해서 물건을 만드는 건 어떨까?
이와 같은 생각들을 많이 하기는 했었다.
그리고 요즘도 가끔씩 물건을 보다가 단점이나 아쉬운 점을 발견하면, 여전히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제조에 관심을 가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 컴퓨터를 판매하는 사람에게 컴퓨터를 만드는 곳으로 가라고 한들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기 때문이지.
그만큼 판매와 제조는 엄연히 다른 길이라고 확정 지었기 때문이다.
“하하. 그래도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다음에 혹시 물건 좋은 거 만들게 되면, 꼭 우리한테도 팔아줘야 한다?”
나는 장 사장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요. 제가 꼭 광주 메디컬에 총판 내어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서로에 대한 경쟁 없이, 서로에 대한 견제도 없이 화기애애한 이 분위기가 참 좋았다.
이런 감정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았다.
물론 광주 메디컬은 지방의 여러 작은 회사들 중 하나고, 직원 수가 적기에 가능한 일이겠지.
지금 내가 다니는 코리아 메디컬은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회사이고 그 규모도 크기에 모든 직원이 화기애애하다는 게 불가능한 곳이다.
서로에 대한 견제와 경쟁이 있어야만 더욱 치열하게 일하며 실적을 내올 테니까.
그렇다고 그런 점들이 지금 다니는 코리아 메디컬에게 느끼는 불만은 아니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는 것일 뿐.
그저 오랜만에 느끼는 옛 동료들과의 자리에서 따스함을 느끼고 간다는 것이 행복하고 좋았다.
이전 회사 사람들과 이렇게 웃고 떠들며 있을 수 있다는 건, 직장인에게 결코 흔히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과 다음을 기약하며 나는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 * *
새해가 되고 출근한 첫날.
오전에 짧은 회의를 마치고 각자 일터로 흩어졌다.
새해에 병원에서의 풍경은 바로 지난주였던, 작년보다 훨씬 더 치열한 전쟁터 같다.
달라진 것이라고는 꼴랑 며칠이 지났다는 것뿐인데.
날짜에서 바뀐 ‘2022년’이라는 숫자가 영업사원들의 목을 옥죄여 왔다.
작년보다는 더 좋은 성과를 가져와야 한다는 둥, 한 살이나 더 먹었는데, 작년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둥.
회사에서 주는 압박감으로 인해 병원에는 여러 메디컬 영업사원들이 의사를 만나 하나라도 더 물건을 팔기 위해 애를 쓴다.
모든 회사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회사는 연초에 많은 일이 이루어진다.
연봉 협상과 승진 같은 큰일들은 작년의 성과를 기반으로 회사와 협의하여 오르거나, 회사에서 통보하는 방식으로 정해진다.
말 그대로 이미 작년, 지나버린 성과로만 평가하는 것이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직원들은 현재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으니, 알아 달라는 것처럼 애를 쓰며 영업하고는 한다.
매년 이런 광경을 봐 왔지만, 올해도 역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잠시 병원 로비에 앉아 사람들을 살폈다.
왜냐, 지금 이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먼저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영업사원에게 ‘기다림’은 필수니까.
내 앞으로 보이는 정장 차림에 가방을 들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몇몇은 커피 캐리어를 양손 가득 겨우 쥐고 있다.
의사와 간호사들에게 주려고 가져온 간식이겠지.
그리고 또 누구는 방대한 양의 카탈로그를 들고 있다.
딱 봐도 저 사람은 초짜다.
의욕이 앞선 신입사원일 것이다.
저렇게 많은 카탈로그를 가져왔다는 건, 보여주고 싶은 물건이 많다는 뜻.
혹은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 다 가져왔어!’라는 마음으로 제품의 카탈로그를 전부 챙겨온 것이다.
그게 초짜 티를 내는 것이지만, 저 시절에는 그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초짜라는 것을 모른다.
왜 그게 초짜 티를 내는 거냐고?
의사들은 절대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환자를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지.
틈틈이 제품에 대한 공부도 해야 하고, 또 사람인지라 잠깐의 텀이 생긴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그 쉬는 틈 사이에 우리는 의사에게 영업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렇게 많은 양을 가져와 다 보여주려고 한다?
의사들에게 절대 환영받을 수가 없는 것이지.
네가 알아서 내가 좋아할 만한 제품을 보여줘야지, 왜 내가 이 많은 걸 다 읽어보고 골라야 하지? 이런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그렇게 몇 명의 사람들을 훑어보며 시간을 보낸 뒤에야 진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많은 간호사들 커피까지 챙기는 여유로워 보이는 직원과 신입사원처럼 보이는 직원들을 제치고 나는 이 병원의 영업을 따내야 한다.
이 병원은 내가 몇 달 동안 작업 중이거나, 엄청나게 공을 들이던 곳은 아니다.
하지만 올해가 들어 내가 가장 먼저 찾은 병원.
새해부터 내가 픽한 병원에서의 영업을 성공해야만 올해가 잘 풀릴 거라고 믿는달까?
한 해가 바뀌었다고 내가 새롭게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작년보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될 뿐.
나는 늘 그렇듯 오늘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