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평소에 크리스마스를 중요하게 여겼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종교를 딱히 가지고 있지 않은 나에게 어릴 적부터 크리스마스는 그저 빨간 날, 그뿐이었다.
직장인이 되고 난 이후에도 별반 다를 것은 없었다.
빨간 날인 휴일.
그래서 크리스마스이브에는 휴일 전이라 기분이 조금 좋은 정도?
크리스마스 때마다 매년 솔로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여자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그러니까 근 몇 년간은 일에 치여 살았던 것 같다.
여자 친구? 그게 뭐지? 하는 마음으로 일에만 매진했었으니까.
내게 호감을 보였던 몇몇 여성들도 있기는 했었다.
하지만 일에 몰두하는 인생을 살았던 나.
호감을 보이던 몇몇 여성들은 그대로 지나갔었지.
그만큼 나는 연애보다는 일에 더 신경 쓰고 싶었다.
젊을 때 많이 해보라는 연애.
그것도 좋았지만, 하루라도 더 빨리 성공해서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던 지난 몇 년.
일에만 빠져 살던 내 삶에 자연스레 스며든 사람이 바로 김사랑, 그녀였다.
나는 내가 메디컬 영업에서 최정상을 밟기 전까지는 여자를 만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녀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내 인생에서 큰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멈추려는 것은 아니다.
일에만 매진하던 그때보다, 앞으로는 더 열심히 달려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이뤄낼 것이다.
김사랑, 그녀에 대한 내 마음에 확신이 가득해지는 순간.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그녀에게 고백했다.
살을 에는 바람이 무색하게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땀방울.
그녀가 스윽 손을 빼려는 그때, 나는 심장이 터질 듯했다.
쿵쿵쿵.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리는 것은 아닌가, 내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티 나는 것은 아닌가.
숨을 차분하게 쉬어보려고 했지만, 내 들숨과 날숨은 여느 때보다 거칠었다.
그녀가 내 고백을 거절하려는 것인가?
그 순간!
내 손바닥에 포개어 있던 그녀의 손이 방향을 바꾸며 스르륵 움직였다.
다섯 개의 손가락 사이 사이로 가득 채워지는 얇은 그녀의 손가락.
조금 전 내가 손을 잡았을 때 놀란 표정을 지었던 김사랑.
그때의 표정보다 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건, 지금의 나였다.
“…….”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와 내가 맞잡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열 손가락은 서로 엇갈려 느슨하게 깍지를 끼고 있었다.
그리고 0.1초도 지나지 않아, 곧장 고개를 들고 그녀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굳은 표정으로 있던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났고, 그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깍지 껴서 잡는 게 더 좋아……!”
그 말과 동시에 입꼬리를 올리고 배시시 웃는 그녀.
여태까지 본 미소 중 세상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나는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손으로는 느슨하게 쥐어져 있는 깍지를 당겨 꽉 잡았다.
“그럼, 나도 이게 더 좋아!”
그녀와 나는 내려오지 않는 입꼬리와 맞잡은 손으로 공원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양옆으로 펼쳐진 반짝거리는 조명이 우리를 축복해 주는 듯했다.
오늘부로 나에게 크리스마스이브는 더없이 특별한 날이 되었다.
* * *
성수기인 탓에 쉴 틈이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다가온 올해의 마지막 날.
나는 한동안 바쁘다는 이유로 가지 못했던 본가에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부모님을 뵙기 위해 여수로 내려왔다.
양손 가득 부모님의 겨울 외투와 내의를 사 들고 들어간 집.
“아들!”
“지훈이, 왔니?”
부모님은 평소보다 더 밝은 목소리로 나를 맞이해 주셨다.
“네, 저 왔어요.”
“아이고, 서울에서 내려오느라 고생 많았지?”
“고생은요, 뭐. 아니에요.”
“이게 다 뭐냐? 한 짐이네?”
아버지는 내 양손에 쥐고 있는 짐을 받아들며, 뭐가 이렇게 무겁냐는 듯 물으셨다.
“선물이요.”
“아니, 집에 오는데 선물은 뭐 하러 매번 가져와. 남도 아니고 말이야.”
아버지는 내가 돈을 썼다는 사실에 또 구시렁거리시며 짐을 들고 거실로 들어가셨다.
“어휴, 밖이 추워서 손이 차다. 얼른 들어와.”
아버지가 짐을 들어준 탓에 비어 있는 내 손을 어머니는 양손으로 잡고 문지르며 당기셨다.
집 안으로 들어오니 곧장 코 깊은 곳까지 자극하는 맛있는 음식 냄새.
어머니가 또 한 상 차리신 모양.
킁킁.
나도 모르게 코로 음식 냄새를 킁킁 맡으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머니는 내가 또 잔소리를 할 거라 예상하셨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나에게 변명을 시작하셨다.
“아니. 아들이 오랜만에 온다고 하니까, 어떻게 좋아하는 음식을 안 할 수가 있겠어. 그래서 간단하게 몇 가지만 한 거야. 이제 손목도 괜찮고, 어깨도 봐라. 하나도 안 아프다니까?”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시기에 항상 여기저기 쑤신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나를 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손목과 어깨를 돌리며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총총 부엌으로 걸어가시면서 말을 이으셨다.
“게다가 누구 아들인지, 잘난 아들내미가 오븐을 사줘서 그 오븐으로 고등어를 구우니까 연기가 하나도 안 나. 그리고 혹시나 나오는 나쁜 냄새를 잡아주는 공기청정기도 여기 있고 말이야. 호호.”
어머니는 신이 난 얼굴로 내가 사 드린 오븐과 공기청정기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어휴. 정말 못 말린다니까?”
나는 그런 어머니의 어깨를 주무르며 웃음을 터트렸다.
“크으으.”
아버지는 거실 한쪽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마치 나에게 들으라는 듯한 소리로, 어머니와 나의 대화가 길어지자 소리를 점점 크게 내시기 시작했다.
“크으으으!”
소리에 놀란 나와 어머니는 동시에 거실로 다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아버지 앞에 서 있는 우리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안마 의자에 누워 안마를 받으며, 흡족한 표정으로 소리를 내고 계셨던 것.
“아이고. 누구 아들이 사 줬는지, 이게 몸이 피로할 틈이 없다니까? 아이고, 시원하다.”
부모님은 내가 사 드렸던 물건을 잘 쓰고 계신다는 걸 보여주시기 위해 움직이고 계셨다.
식사를 하기도 전, 우리 가족은 하하 호호 웃느라 시간을 보냈다.
상 위에는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고등어와 된장찌개, 잡채 등 한 상이 가득 채워졌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곧장 찌개부터 한 입 맛보았다.
“크으. 역시 어머니 음식 솜씨는 끝내준다니까?”
“호호. 많이 먹어, 우리 아들.”
그렇게 정신없이 음식을 먹어 치우던 나는 오자마자 물었던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다시 여쭈었다.
“그래서 어머니는 병원에서 뭐래요? 괜찮대?”
어머니는 내 물음에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응. 회복도 다 잘됐고, 앞으로는 문제없다고,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하더라고. 다 우리 아들 덕분이지.”
“에이, 그게 어디 제 덕이에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아버지는 요즘 불편하신 곳은 없으시고요?”
어머니가 건강 악화로 인해 병원에 다니던 터라 아버지는 내 성화에 못 이겨 건강 검진을 받으셨었다.
“응. 나는 건강하지.”
아버지는 밥을 한 수저 뜨며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말에 어머니는 옆에서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건강은 한데, 술을 좀 줄이라고 하시더라고.”
어머니의 말에 아버지는 어머니를 한 번 쳐다보시고는 재차 입을 여셨다.
“아니야. 그건 내가 한두 잔씩만 줄이면 돼. 걱정 마라.”
“아버지. 정말 이제 술은 조금 줄이세요. 지금 당장은 큰일이 없어도…….”
그렇게 시작된 내 잔소리에 기분 나빠하시기는커녕, 부모님은 웃음을 터트리셨다.
“이제 우리 아들이 다 커서 우리만 보면 잔소리를 한다니까요, 지훈 아빠.”
“그러게. 아들한테 잔소리 안 듣고 싶으면 잘해야 해. 하하.”
예전에는 부모님에게서 듣던 잔소리.
내가 커갈수록, 부모님이 나이가 들수록, 잔소리는 부모님이 아닌 내가 하고 있다.
항상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하는데.
성공과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을 챙기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느끼는 저녁이다.
* * *
3… 2… 1……!
댕― 댕―
TV에서는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말을 가족과 함께 보낼 때면, 항상 함께 저 종소리를 듣고는 했다.
나는 새로 시작하는 올해의 목표와 소망을 속으로 되뇌었다.
지이잉.
지이잉.
그리고 연달아 울리는 휴대전화.
아마 1년 중 사람들이 가장 많이 휴대전화를 동시에 이용하는 시간일 것이다.
휴대전화를 바라보니, 새해가 왔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과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올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지훈아. 잘 지내지? 새해 복 많이 받아라.]
회사 직원들, 거래처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까지.
여러 명의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던 그때.
하나의 톡이 재차 울렸다.
[민 과장님. 잘 지내시죠? 저에요, 한민아. 새해라서 연락드렸어요. 조만간 얼굴 한번 봬요. ^^]
거대 메디컬 한민아 과장에게서 온 톡이었다.
그녀가 내게 호감을 표할 때, 나는 그 마음을 받지 않기 위해 철벽을 쳤었다.
그리고 현재 내 옆에는 김사랑이 있다.
한 과장이 묻지도 않은 톡에 내가 여자 친구의 유무에 대해 말할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그저 ‘네, 한 과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짧은 답변으로 톡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 * *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가기 전.
나는 오랜만에 내려온 여수였기에, 광주에 들러 광주 메디컬 직원들을 만나러 왔다.
다들 술 한잔이라도 하며 회포를 풀자 했지만, 나는 서울로 올라가야 할 길이 멀었기에 오늘은 간단하게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조금 일찍 도착한 탓에 먼저 카페에 앉아 휴대전화를 보던 그때.
큰 발소리와 함께 내게 다가오는 사람.
“이야. 이게 얼마 만이야.”
“와! 차장님!”
카페에 도착한 손지혁 차장이 내 곁으로 걸어왔다.
“지훈이 잘 지냈어?”
“네. 차장님도 잘 지내셨습니까? 못 뵌 사이에 더 멋있어지셨는데요?”
“에이, 멋있어지기는. 오늘부로 한 살 더 먹었잖냐. 사장님이랑 태준이는 거의 다 왔다고 하시더라. 오랜만에 봤는데, 악수나 하자.”
그는 손을 뻗어 내게 악수를 청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손 차장.
그는 내가 처음 메디컬에 입성해 서울로 올라가기 전까지, 내가 존경하고 믿고 따르던 상사였다.
물론 아직도 손 차장은 내게 그런 존재이지.
그런 그와 손을 맞잡으며 오랜만에 만나니 행복했다.
“이게 누구신가! 우리 회사의 자랑, 민지훈 과장 아니야?”
“와! 과장님!”
곧이어 들어오는 장홍석 사장과 한태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 사장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과장님 서울 물 먹더니, 완전 서울 사람 다 되셨는데요? 이렇게 스타일이 달라질 수가 있나, 저도 한번 서울 구경 좀 시켜주십시오.”
한태준이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자리가 시끌시끌해졌다.
서로의 안부에 대해 한참 대화를 나누던 도중, 장 사장은 내게 물었다.
“민 과장, 결혼은?”
그의 말에 손 차장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사장님. 여자 친구 생겼는지부터 확인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아차, 그러네. 여자 친구는 생겼어?”
“여자 친구요? 하하.”
내가 웃으며 대답을 넘기려 하자, 한태준이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어? 과장님 표정을 보니까 생기신 것 같은데요? 어떤 여자예요?”
“정말? 와, 지훈이가 서울 올라가더니 이제 연애도 하는 거야? 그래, 어떤 여자인지 이야기해 봐. 궁금한데?”
손 차장은 한태준의 이야기에 덧붙였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몰아치는 질문과 대답들.
“아, 근데 저희가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잖습니까. 그래도 어떤 스타일의 여자인지라도 알려주십시오. 우리 민 과장님의 스타일이 궁금합니다. 하핫.”
한태준이 내게 묻자 나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내 표정을 본 손 차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뭐야, 혹시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역시나.
손 차장은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
내 표정만 보아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리는 사람.
나는 그의 말에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장 사장을 비롯해 손 차장, 한태준은 눈이 세 배쯤은 커져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누구?”
그들에게 굳이 비밀로 할 것은 없었기에 나는 커피를 한 모금 삼킨 후 입을 열었다.
“김사랑이요.”
엄청나게 놀랄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들은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그들이 모를 리가 없는데?
나는 다시 한번 그들에게 답했다.
“김사랑 원장이요.”
‘원장’이라는 단어를 붙이자마자 그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쏟아져 나왔다.
“뭐? 그 김사랑 원장?”
“헤? 모던 정형외과의 김사랑 원장 말하는 거야?”
“민 과장님, 진짜요? 그 서울로 올라가셨다던 김사랑 원장님?”
앞에 앉은 내 옛 동료 세 명은 놀라 열린 입을 한동안 다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