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선정은 나와 임 사장님이 함께…….”
백 이사가 등급 선정 기준에 대해 말하려던 그때.
“흠흠.”
조용한 회의실 안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다.
바로 임정준 사장.
“내가 대답하지.”
빔프로젝터만 달랑 켜져 있는 어둑한 회의실에서 임 사장이 스르륵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아까부터 회의실에 들어와 있었는지, 우리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은 듯했다.
임 사장의 등장에 모든 직원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았다.
“직원들의 실적을 점수로 환산해, 직책 안에서 월등하게 높은 직원 총 두 명을 S등급을 준 것이네. 나와 백 이사가 공정하게 선정했지.”
그의 말에 조 차장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사장이 직접 나서 공정하게 했다고 말하는데, 어느 직원이 또 대들 수 있겠는가.
‘공정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밝혀주시죠.’ 하고 말하는 순간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사장에게 찍힐 것이 뻔하기 때문이지.
임 사장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지금 다들 연말이라 그저 들떠만 있는 거 같은데, 오늘 발표를 쭉 보니까 그럴 때가 아니지 않나 싶네.”
그의 무거운 한마디.
안 그래도 조용하던 사무실은 한층 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까 듣자 하니, 올해 총 매출이 작년에 비해 올랐다고 서로 칭찬하기들 바쁘던데 말이야. 총 매출이 늘었다고 좋아하면 안 돼. 총 매출과 순이익은 다른 거야.”
탁.
임 사장은 회의실 테이블을 두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말했다.
“작년보다 올해, 자네들 월급 삭감된 사람 있나? 동결도 몇 명 없지. 대부분 인상했잖아. 그럼 인건비가 작년에 비해 월등히 올랐고, 그 외에 물가가 폭등하는데 말이야. 저 정도 매출이 오른 걸로는 순이익? 작년보다 적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왜 다들 못 하나?”
임 사장의 말에 백 이사는 옆에서 그를 거들었다.
“맞아. 이 정도 매출이 오른 건, 작년과 동일, 아니 작년보다 못했다고 볼 정도야.”
그들은 대화의 흐름을 순식간에 바꿔버렸다.
직원들은 임 사장과 백 이사의 말에 하나둘 고개를 푹푹 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 대리. 이번에 D등급 받을 뻔한 건 알고 있나?”
D등급은 최하위 등급으로, 이걸 받은 직원은 연봉이 삭감된다. 영업맨, 그리고 직장인에게는 최악의 등급이지.
몇 달 전, 강 대리에게 D등급을 받지 않게 조심하라고 일러줬던 사람이 백 이사였었다.
강 대리는 한쪽에서 고개를 살짝 들어 눈을 크게 뜨고 백 이사를 바라보았다.
“자네, 나이도 있는데 D등급 받고 연봉 삭감될까 걱정돼 사장님께서 극구 만류하셨어. 그래서 겨우 C등급을 받은 거라고.”
“…감사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강 대리가 대답했다.
그들은 대화의 흐름뿐 아니라 회의실 공기까지 바꿔버렸다.
타닥.
임 사장은 회의실 문 옆에 있는 조명 스위치를 전부 눌렀다.
순간 너무나도 밝아진 회의실에 직원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걸어오는 임 사장.
“우리가 매년 S등급을 딱 두 명만 뽑는 건 다들 알고 있지?”
질문이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대답을 하였다.
“그런데 아쉽게 A등급으로 밀린 경우도 있네. 그러니까 A등급에서도 제일 고득점을 획득한 사람, S등급의 점수였는데 어쩔 수 없이 A등급이 된 사람이 있다는 거지.”
임 사장의 말에 우리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는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민지훈 과장?”
“네?”
“자네가 아쉽게 A등급으로 밀린 사람이야. A등급을 받기에 너무 높은 점수였긴 하지만 말이야. 그래서 올해는 민 과장까지 S등급과 동일하게 인센티브 퍼센트를 적용할까 하네. 혹시 아까처럼 이의 있는 사람 있나?”
조 차장을 저격한 말이었다.
이의를 가진 사람이 있느냐는 말.
“없습니다.”
조 차장이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다들 발표한다고 고생 많았다. 자, 예약해 둔 식당으로 다들 자리 옮기자.”
그렇게 일 년에 한 번 실적 발표를 하는 대회의가 끝이 났다.
생각보다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임 사장이 온 이후로 급격히 흐름이 바뀐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결국 A등급을 받고, S등급과 동일한 퍼센트로 인센티브를 받게 되었다.
어쨌든, 일 년에 이 등급을 받으려고 일을 하는 직장인은 없다.
그 등급이 중요한 게 아니라, 등급의 인센티브 퍼센트가 중요한 것이지.
나 역시 등급보다 인센티브 퍼센트를 가장 높게 받았다는 것에 초점을 둬야 했다.
직장인은 누가 뭐래도 월급 때문에 다니는 것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내겐 월급만큼, 인센티브 퍼센트만큼, 등급도 중요했다.
S등급을 받기 위해 코리아 메디컬에서 노력을 하며 일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등급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은 노력과 그에 상응하는 성과를 내왔다.
그런데 내가 임 과장보다 낮은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결과에 승복하지 못해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내가 임 과장보다 월등히 나은 실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회사를 뒤엎으며 싸울 수는 없는 노릇.
그게 회사라는 곳.
그리고 이게 가족 회사라는 곳이니까.
* * *
“자, 올해도 다들 고생 많았다. 회의실에서 쓴소리했던 건 잊고, 다들 기분 좋게 마셔. 코리아 메디컬을 위하여!”
“위하여!”
첫 잔은 임 사장의 건배사로 시작됐다.
술을 잘 마시는 사람, 술을 못 마시는 사람 모두 임 사장의 건배사에 첫 잔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원샷이었다.
생각보다 회사 회식은 금방 마무리가 됐다.
길고 힘들었던 12월, 그리고 오늘 대회의까지 있었기에 직원들은 술을 마시면서도 피곤함을 감추지 못했다.
임 사장이 회식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면 회식은 아마 1차에서만 서너 시간을 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첫 잔 건배사를 크게 외친 후, 유유히 회식 장소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임 사장을 제외한 아래 직원들은 술잔을 기울이다가 금방 자리를 마무리하게 되었지.
오히려 회식이 일찍 끝나 좋아하는 직원들이 더 많았다.
집으로 바로 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2차로 향했다.
“이래서 가족 회사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야. 왜? 가, 족 같은 회사니까.”
서 부장은 술을 입에 털어 부으며 외쳤다.
서 부장과 조 차장, 그리고 나까지.
우리 셋 역시 회식 자리가 일찍 끝난 뒤, 서로 눈을 마주쳤다.
눈빛을 주고받은 우리는 1차 회식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술집으로 온 것이지.
다른 직원들에게 붙잡힐세라 우리는 각자 집으로 간다는 핑계를 대며, 한 명씩 따로 만나기로 한 술집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백 이사님, 아니 그리고 임 사장님도 원래는 능력으로만 평가하시던 분들 아닙니까?”
조 차장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서 부장은 그런 조 차장의 빈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원래라는 게 어디 있겠냐? 사람 마음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거야. 각자 그 마음을 바꾸게 되는 계기가 다 다른 거지.”
“하. 임 사장님이야 조카가 들어 왔으니 그런 신념이 변한 거고, 백 이사님은……. 하긴, 똑같겠네요. 전부 임 과장 때문이죠.”
조 차장은 내게 아무런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괜찮다는 듯 그에게 미소를 보이고는 서 부장을 향해 말했다.
“서 부장님,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저야 뭐, 가족이라는 임 과장이 있으니… 그렇게 됐지만 서 부장님은 정말 받을 만하셨지 않습니까. S등급을 받는다는 건 일 년간 하신 일을 인정받은 거지 않습니까!”
그는 내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가……. 민 과장이 당연히 받았어야 했는데 말이야. 매출 발표 결과도 당연히 그랬고. 하. 참 X 같다.”
“어쩔 수 없죠. 저는 괜찮습니다.”
사실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괜찮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끝나버린 일.
내가 여기서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 서 부장과 조 차장이 나보다 더 열을 내는 것을 보며 나라도 지금은 참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내 말에 애써 한숨을 참아내고는 술잔을 들었다.
챙.
술잔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우리는 씁쓸함을 삼켜냈다.
“임 과장, 이 거지 같은 새끼.”
조 차장은 술을 마시자마자 나지막이 말을 읊조렸다.
그의 말을 들은 서 부장이 곧장 입을 열었다.
“조 차장.”
“예, 부장님.”
“괜히 조 차장도 찍힌 거 아닌가 몰라. 임 과장 편에 서는 일은 없겠지만, 굳이 임 사장 앞에서 임 과장과 부딪치는 걸 자주 보여서 좋을 리는 없으니까 조심해.”
“하……. 이렇게 아래 직원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참 그렇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진짜 이런 가족 회사라는 게, 그래. 이제 시작일 수도 있어.”
서 부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턱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민 과장. 그나저나 인센티브가 중요한 게 아니야. 내년에 승진 있는 연도잖아. 그때 오늘 받았던 등급이 작용할 수도 있어. 아니, 분명 작용할 거야.”
서 부장의 말이 맞다.
같은 과장직에서 차장으로 승진하는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장직에서 차장으로 한 명이 승진하게 된다면, 가능성 있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나와 임 과장뿐.
아니, 이번에 나보다 더 높은 등급을 받은 임 과장이 더 유력한 게 지금 현실이지.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술기운을 쫙 뺀 얼굴로 서 부장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럼 제가 승진 전까지, 확실하게 보여줘야겠네요.”
내 말에 서 부장, 그리고 조 차장은 곧장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이번에 임 과장도 실적을 쌓아오기는 했었으니까. 그래도 민 과장이 훨씬 더 많은 성과를 내기는 했었지만 말이야.”
“네. 승진 때 임 과장이 승진하게 된다면! 제가 아닌 임 과장을 승진시켰다는 게 이상하다고, 모든 직원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성과를 한번 내보겠습니다.”
사실 이번 일로 인해 나 역시 가족 회사라는 곳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족 회사라는 곳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월등히 낫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타오르는 열정에 부채질, 아니 기름칠을 해버린 사람.
임 과장은 내게 그런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실력으로 그를 압살할 만큼 실적을 내려고 애쓸 것이다.
* * *
- All I want for Christmas…….
- Last Christmas…….
- 하얀 눈이 내려올 때…….
항상 걷던 길거리를 걷고 있지만, 평소에 보던 풍경과는 전혀 달라진 분위기였다.
각 매장마다 자기 주장을 펼치듯 흘러나오는 캐럴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그중 절반, 아니 대부분은 연인들이었다.
손을 잡고 가는 연인, 팔짱을 끼고 가는 연인, 아예 몸을 붙여서 몸 하나에 머리만 두 개인 것처럼 보이는 연인들까지.
어디를 보나 빨간 천과 빨간 포인트가 군데군데 있는 곳이 천지.
누가 봐도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모든 사람이 들떠 있는 날, 바로 크리스마스이브.
다들 둘씩 짝을 지어 걷고 있는 것을 보는 나.
그걸 보며 외로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왜냐, 지금 내 옆에도 한 사람이 서 있기 때문이다.
“지훈아. 여기로 가면 우리 몇 달 전에 영화 보고 나서 걸었던 그 공원이지?”
“맞아, 사랑아. 우리 얼마 전에도 한 바퀴 돌았던 곳.”
“아, 맞네? 나 여기 좋아!”
그녀는 바로 행복 정형외과의 김사랑 원장.
지난번 그녀와 와인바에서 말을 놓기로 하며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미 친구로서 가까워질 대로 가까워졌었지만, 지금의 가까움은 또 이전과는 다르다.
특히나 말을 놓기 전과 다른 점은 내 마음이었다.
분명 그녀는 내게 거래처 원장보다 조금 더 나와 가까운, 그리고 여자 사람 친구보다 조금 더 나와 가까운, 딱 그 정도였었다.
그런데 어느 날 불쑥 그녀는 내 일상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게 말을 놓은 후부터였는지, 그 전부터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 그녀가 내게 소중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그녀와 나는 여느 날처럼 공원 입구로 들어섰다.
크리스마스이브라 그런지 공원의 풀숲에는 작은 전구들이 마치 눈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와, 여기 오늘 너무 예쁘다. 여기가 이렇게 로맨틱한 곳이었었나?”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탄하기에 바빴다.
손을 허벅지 옆에 붙이고 팔을 앞뒤로 움직이던 내 손등에 스치는 그녀의 손.
순간 온몸이 찌릿했다.
서로의 손등이 몇 번을 스치던 그때.
나는 손을 그녀의 손등 위로 옮겼다.
스르륵.
그리고 자연스레 김사랑의 손을 내 손으로 포개었다.
턱.
내가 손을 맞잡자, 그녀는 놀랐는지 걸음을 멈춰 세우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그 순간.
나는 김사랑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사귀자, 사랑아.”
내 말을 들은 그녀는 잠시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스윽 손을 빼내려는 그녀.
이 추운 겨울, 내 등줄기에서는 땀이 한 방울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