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지금 저한테 상도덕이라고 하신 겁니까?”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강 대리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게 답했다.
“예. 행복 정형외과, 부원장 영업. 다 알고 왔습니다. 그건 진짜 같은 회사 직원끼리 예의가 아니죠.”
행복 정형외과의 부원장을 영업한 것.
내가 한 것은 맞지만,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살짝 언성을 높이며 그에게 말했다.
“하. 알아먹게 설명하시죠. 이런 식으로 다 잘라먹고 말하지 말고.”
갑자기 내게 다가와 말하는 그에게, 나 역시 좋은 말투가 나가지 않았다.
“그때 행복 정형외과에서 마주쳤던 거. 내가! 행복 정형외과 부원장한테 공들이던 중이라고요! 그런데 그걸 날름 가져가신다? 그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흥분한 말투로 소리치는 강 대리.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어이가 없었다.
날름 가져가? 대체 누가?
강 대리가 행복 정형외과에 영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행복 정형외과에서 마주쳤던 것도, 그리고 내가 처음에 행복 정형외과에 김사랑 원장을 영업했을 때 그가 분노했던 것도 알고 있으니까.
그 이후 나는 강 대리에게 따로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떤 원장에게 영업하고 있느냐고.
하지만 알려주지 않았던 건 강 대리 본인이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그가 영업 중인 원장을 알았으랴.
내가 곧장 답하지 않자 강 대리는 내게 재차 물었다.
“민 과장님. 제가 행복 정형외과 영업하는 거 알고 있었잖아요. 진짜, 저도 민 과장님이랑 더 이상 부딪히는 일 없이 지내려고 했는데… 하. 이건 아니지 않나요?”
“네. 이건 아닌 것 같네요.”
내 말에 강 대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는 그를 향해 말을 이어 갔다.
“강 대리님. 제가 지난번에 서로 선은 넘지 말자고 했을 텐데요. 강 대리님이 저한테 이러는 거 진짜 아닌 것 같네요. 행복 정형외과 때문에 이러신다? 좋아요. 제가 그때 분명히 어느 원장님 영업하고 있느냐 물었죠?”
나는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목을 가다듬고 말을 이어 갔다.
“알려주지 않은 건 강 대리님이고요. 그리고 행복 정형외과에 몇 달이나 공들이고 있었다는데, 성과 가져오지 못했던 것도 강 대리님이죠?”
내 팩트 폭행에 그는 분노가 차오르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건……!”
나 역시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강 대리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강 대리님이 영업 잘하고 있었으면, 행복 정형외과에 부원장님이 나한테 발주를 넣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따지러 올 시간 있으면 나가서 한 건이라도 더 따오는 게 낫지 않겠어요?”
최대한 흥분하지 않고 감정적이 아닌 이성적으로 그에게 답을 하려고 애를 썼다.
감정적으로만 대한다면 논리 없이 화만 냈을 테니까.
내 말에 강 대리는 입을 떡 벌린 채, 씨익 씨익 소리를 내며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지금……. 말 다 한 겁니까?”
“아니요. 그리고 저번에 경고했을 텐데, 아무리 내가 나이가 어려도 직책은 당신 위라고. 한 번 더 말하는데, 진짜 선 넘지 마세요. 강 대리님. 다음에는 저도 제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갈지 모르겠으니까.”
나는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내 눈에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강 대리를 뚫을 듯한 레이저가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눈 역시 나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굳이 회사 생활을 하며 적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난번에 강 대리에게 선을 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지.
지금 그가 내게 하는 행동을 보며 나는 더 심한 말이 나갈 뻔했지만 겨우 참아냈다.
강 대리, 그를 위하는 마음에 참는 건 아니었다.
내 사회생활을 위해 육두문자만이 나가지 않은 것이지.
욕만 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강 대리는 지금 자신보다 나이 어린 과장의 말에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터.
내가 그에게 내뱉은 말은 그저 그를 기분 나쁘게 만들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모두 진심이다.
그가 이럴 시간에 영업을 더 하라는 말.
나이도 어리지만 내가 직책이 높다는 건 즉, 나보다 네가 실력이 나쁘다는 것.
내 팩트가 가득한 말에 그의 뼈가 부러졌을지도 모르겠다.
강 대리는 여전히 내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콧김을 세게 내뱉으며 얼굴이 불타오를 듯 빨개졌다.
나는 손에 힘을 주어 종이컵을 구긴 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럼 저 먼저 내려갑니다. 바람 좀 쐬고 내려오세요.”
나는 제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강 대리를 향해 마지막 멘트를 던진 후 옥상을 빠져나왔다.
회사에서 승자는 실력으로 결정된다.
강 대리와 나, 현재 과장인 내가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항상 높은 곳에 위치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노력한다.
* * *
지이잉.
[발신인 : 거대 메디컬 한민아 과장]
퇴근 시간이 다가오는 지금.
한 과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가 내게 전화를 거는 이유는 아마 지난번 내게 코메 바이오 정보를 주었던 일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라이벌 회사인 거대 메디컬에서 내게 전화를 할 리가 있겠는가.
한 과장에게 좋은 정보를 받았기에, 보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녀에게서 같은 직종 친구를 하자는 제안도 받았었지.
평소 같았으면 고맙다는 말을 하며 그녀에게 먼저 식사 자리를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뤄왔던 이유.
바로 그녀의 속마음을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그녀.
하지만 그건 속마음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이기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내게 직접적으로 호감을 드러낸 것도 아니었고, 겉으로는 그저 내 친구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어장을 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녀의 마음을 알아버린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바로 철벽뿐이다.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고, 전화를 받지 않아 콜백을 하려면 퇴근 이후나 되어야 할 터.
그러기 전에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재빨리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민 과장님! 저예요, 한민아.
오늘도 그녀의 목소리는 활기차고 밝았다.
상대방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의 그녀.
“예, 알죠. 과장님, 잘 지내시죠?”
- 그럼요. 민 과장님은요? 아직 회사시죠?
“네, 아직 퇴근 전입니다. 안 그래도 한 과장님한테 보답도 할 겸 연락드려야지 했었는데.”
- 하도 안 주시길래, 먹튀 하시는 건가 싶어서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하핫.
“아이고. 먼저 연락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 저야 항상 남는 게 시간인걸요? 오늘 저녁도 가능하긴 한데…….
그녀는 오늘 저녁 약속을 잡고 싶어 하는 거 같았다.
그런데도 내가 한 과장과 저녁 약속을 잡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이유.
바로 술자리 때문이다.
그녀는 내게 어색함도 풀 겸 술자리를 가지면서 서로 친해지자고 했었기 때문이다.
내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단순히 저녁 식사만을 하고 헤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도 혹여나 하는 마음에 나는 그녀와 저녁 약속을 잡지 않으려 했다.
“어쩌죠……. 제가 오늘 저녁에는 선약이 있어서요.”
- 정말요? 아쉽다……. 그럼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내일 저녁?
오늘 저녁이 안 된다면 내일 저녁은 어떠냐고 묻는 그녀.
나는 술자리를 가지지 않기 위해, 재빨리 시간을 틀었다.
“음……. 아니면 이번 주에 점심 어떠세요? 요즘 제가 하는 일이 있어서, 저녁에는 시간 내기가 조금 애매할 것 같아서요.”
- 아… 점심에요?
“네. 대신 제가 비싸고 맛있는 거로 대접할게요!”
- 그래요, 그럼. 대신 좋은 거 사주셔야 해요?
“예! 어떤 음식 좋아하세요?”
나는 그녀와 약속 장소를 잡기 위해 몇 차례의 대화를 더 주고받은 후 전화를 끊었다.
* * *
한 과장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는 예약된 룸으로 들어갔다.
좌식이지만 다리를 아래로 내릴 수 있게 생긴, 호리타타미 좌식 테이블로 이루어진 프라이빗 룸.
옆 룸의 대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고, 조용한 선율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고급 일식집이었다.
라이벌 거래처에서 내게 고급 정보를 줬으니, 이 정도는 보답해야 할 터.
평소 접대 외에는 잘 오지 않는 식당이었기에 나는 여유롭게 룸 안을 살펴보았다.
그때, 문이 드르륵 열리고 활짝 웃는 얼굴로 들어오는 그녀.
“한 과장님, 오셨어요?”
“네! 민 과장님, 오랜만이에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평일 점심에 그녀를 만나 짧은 식사 자리를 가지려고 했지만, 그녀는 점심이라면 무조건 주말이어야 된다고 고집했다.
나 역시 주말 저녁에도 선약이 있어, 점심밖에 시간이 안 된다는 핑계를 대고 이 시간에 약속을 잡은 것이지.
그녀는 평소보다 더 강하게 머리를 만 것인지, 풍성한 웨이브 머리를 찰랑거리며 내게 인사했다.
촤르르 떨어지는 롱 원피스를 입은 그녀.
한 과장의 스타일과 정말 잘 어울렸다.
“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
그녀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종업원은 바로 첫 번째 음식을 세팅해 주었다.
“애피타이저인 차완무시를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차완무시에는 버섯과…….”
종업원의 긴 설명이 끝이 난 뒤, 우리는 수저를 들었다.
“우와. 진짜 맛있어요.”
한 입 떠먹은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보통 점심 시간보다 조금 늦게 만난 우리는 배가 고팠는지, 일이나 서로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음식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다.
그리고 마지막 디저트를 앞두고 있을 때쯤.
나는 음식을 삼킨 후,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한 과장님.”
“네?”
“저번에 코메 바이오 임상 연구 결과 알려주셨던 거 정말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한 과장님 덕분에 총판 계약 안 했어요.”
“아… 뭐, 덕분에 좋은 밥 얻어먹는걸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음식을 가리켰다.
“아니에요. 다음에 혹시나 업무에서 제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생긴다면, 도움을 드릴 수 있다면 도울게요. 워낙 한 과장님이 잘하시는 분이라,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요. 하하.”
“정말요? 그럼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할게요!”
“그럼요!”
드르륵.
문이 열리고 마지막 디저트를 챙겨 들어오는 종업원.
“실례하겠습니다. 마지막 코스인 디저트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은 우리의 앞에 허브잎이 올라간 새빨간 셔벗을 하나씩 놓았다.
“라즈베리와 블루베리로 만든 수제 셔벗입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종업원이 나가자 한 과장은 곧장 한 수저를 떠서 입에 가져다 댔다.
“와. 디저트까지 제대로인데요?”
식사가 꽤 만족스러운 모양.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그녀는 셔벗에 시선을 고정한 채 셔벗을 한 수저 더 뜨며 내게 물었다.
“민 과장님, 여자 친구는 아직 없으세요?”
그녀의 말에 놀란 나는 움직이던 수저를 멈춰 세웠다.
그저 흘러가는 말로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 홀로 뜨끔했달까?
지난번 카페에서 물었던 것을 재차 묻는 그녀였기에, 확실히 여자 친구 유무에 대해 확인을 하려는 듯 보였다.
“네? 아… 없죠.”
내 답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재차 입을 열었다.
“왜 아직도 없으세요? 뭐, 멀리서 찾으실 거 있나요?”
말이 끝나자 곧장 수저를 입에 물고 연신 눈을 깜빡이는 그녀.
“비슷한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면, 서로 이해하기도 쉽고 대화도 잘 통하고 또…….”
자기 자신이라고 콕 집어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조금 알고 있는 나는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한 과장에게 아직 호감이라 할 마음이 없었다. 물론 만나보면서 생길 수도 있겠지만 애써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한 과장은 다시 한번 내게 이야기를 했다.
“민 과장님? 메디컬에 근무하는 직원……. 아니면 뭐 소개라도 받을 생각 있으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어떠한 대답이라도 해야 했다.
설령 그녀가 다른 여자를 소개해 준다고 해도 거절을 해야 했기 때문이지.
“저 생각해 주신 건 감사한데, 마음만 받을게요.”
“왜요?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아… 네.”
한 과장에게 핑계를 대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명확하게 떠오르는 한 사람.
바로 김사랑 원장이다.
뭐지?
내가 진짜 김 원장을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왜 갑자기 그녀가 떠오른 거지?
나는 떠오르는 생각을 없애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말인가 보네요? 민 과장님 볼이 발그레해지셨는데요?”
한 과장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