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 히어로 】
“아…….”
역시나.
다들 임 과장과 담배를 한 대씩은 피운 게 맞는 모양.
대놓고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임 과장이 조금 놀라웠다.
자신이 사장 조카라면 내가 당연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하. 대단하시다고 들었는데, 역시나 그러시네요.”
“오늘 처음 뵙는 거기도 하고, 아침에 인사 나눴는데 굳이 따로 자리 만들어서 재차 인사드릴 거 있나 싶었습니다.”
내 말에 임 과장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 과장님 말씀이 맞죠. 아직 저도 여기 파악하기 전인데, 저한테 잘 보인다고 해서 제가 뭐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그의 말에 입꼬리를 올리고,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에게 잘 보여서 무언가를 받기 원한다…….
그가 아무리 사장 조카라고 한들, 무슨 힘이 있겠는가.
아직 그저 나와 같은 과장이라는 직책인데 말이다.
임 과장은 담배를 입에서 뗀 후 내게 인자한 표정으로 말했다.
“스카우트로 오셨다더니, NA 바이오도 따오시고. 역시 대단하십니다.”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저런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추켜세우는 말을 하다니.
“아, 아닙니다.”
“앞으로 회사에 공을 세우실 분은 진짜 민 과장님이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
뭐 자기가 이 코리아 메디컬의 차기 주인이다, 이런 뜻인가?
나는 새어 나온 웃음 탓에 이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우리 회사잖습니까. 열심히 해야죠.”
“네. 저도 열심히 회사를 위해 노력해야죠. 앞으로 같이 열심히 해봐요. 서로 도우면서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민 과장님과 제가 잘 맞을 거 같거든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대체 임 과장… 무슨 마음인 거지?
정말 나와 가깝게 지내고 싶다는 건가?
굳이?
그의 진정한 마음이 궁금했다.
오른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는 순간, 들려오는 그의 속마음.
[열심히 해서 매출 팍팍 올려라. 어차피 네가 번 돈도 다 내 것이 될 테니까.]
역시나.
그는 나와 직장 동료로서 가까워지기를 바라고 있던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저 그는 스스로 이 회사를 벌써 자기가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
내가 실적을 쌓으니 자신의 회사가 매출이 올라 기뻐했던 것, 그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자신의 회사인 코리아 메디컬의 매출을 쭉쭉 올려달라 부탁하는 단순한 그 이유.
역시 가족 회사는 아무리 직원이 발버둥 쳐봤자 가족 회사, 그뿐인가?
하지만 속단하기는 이르다.
임 과장은 그저 오늘 첫 출근한 과장일 뿐이니까.
* *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여러 병원을 빠르게 돌았다.
사무실에서 업무를 봐야 하는 것도 많지만, 영업직답게 병원을 도는 것이 주 업무이니까 말이다.
점심시간이 끝나자마자 다음 코스인 행복 정형외과로 향했다.
로비로 들어와 담당 원장인 김사랑 원장의 진료실로 걸어가는 길.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닌 탓에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리며 앞으로 걸어가던 중, 내 몸과 팔, 그 좁은 사이를 비집고 쑤욱 들어오는 가녀린 팔 하나.
옆구리를 스치며 들어오는 팔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향기.
고개를 마저 돌리기도 전에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민 과장님!”
바로 김사랑 원장.
그녀는 오늘도 환한 얼굴로 나를 반겼다.
“일 때문에 온 거지?”
내 왼편에서 고개를 사선으로 꺾으며 나를 위로 올려다보며 묻는 그녀.
나는 그녀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네……? 아, 네!”
내 대답에 입술을 쌜쭉 내밀며 혼잣말을 하듯 웅얼대는 그녀.
“난 또 나 보러 온 줄 알았지.”
농담 섞인 말투와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였지만, 지금 내게 팔짱을 끼고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 때문인지, 갑작스레 스킨십을 한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저 말 때문인지, 내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내 귓가에 들릴 정도로.
내 심장 쪽인 왼편에 서 있는 그녀였기에 내 심장 소리가 들릴까 걱정이 되어 나는 옆으로 한걸음 살짝 물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팔을 빼며 말했다.
“점심은 먹었어?”
그녀의 질문에서 알 수 있었다.
의식을 하고 팔짱을 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 저 뒤에서 나를 발견하고 달려와 반가움에 낀 팔짱이라는 것을 말이다.
뜬금없이 뛰어댄 내 심장에 내가 가장 놀랐을 뿐.
“먹었죠. 원장님은 아직 안 드셨어요?”
“아니. 나도 먹었는데, 아직 커피 수혈을 못 했어. 그래서 커피 마시려고 잠깐 나갔다 오려던 참이었는데, 민 과장님을 딱 본 거지!”
“아, 정말요? 그럼 커피 마시러 갈까요?”
“좋아! 내가 커피 쏜다! 가자, 앞에 커피 맛있는 집 있어.”
그녀는 활짝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네, 가요.”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주문을 하자마자 내민 카드에 김 원장은 카드를 빼앗으려 들었다.
“오늘 내가 산다니까?”
“아녜요. 다음에 더 비싼 거 사주세요.”
“하. 내가 커피 사려고 오자고 한 건데……. 그럼 다음에 내가 좋은 거 살게.”
“네, 약속하신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가 나왔다.
그녀는 재빠르게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 쭈욱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리고 곧장 행복한 표정을 짓는 그녀.
“하… 커피 마시니까 이제 좀 살 것 같다. 민 과장님 잘 마실게.”
오늘따라 유난히 더 밝은 그녀.
커피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그녀를 보니,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그 물건이 좋긴 하더라.”
“정말요? 다행이네요.”
그녀와 커피를 들고 병원 입구로 들어가는 길.
진료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녀와 일 이야기에 몰두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허공을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맞다! 근데 그때 우리 술 마실 때, 연락 왔었던 한민아? 그 과장님! 아무튼, 그분이랑은 이야기 잘 끝났어?”
그녀와 술을 마시던 도중, 저녁에 왔던 거대 메디컬 한민아 과장의 전화.
그게 신경 쓰였었는지 이름 석 자를 모두 외우고 있는 김 원장.
“그럼요. 근데 이름까지 다 외우신 거예요?”
“뭐…어쩌다 보니 내가 외우고 있네?”
“역시, 원장님 기억력은 진짜 대단하시다니까요? 하하.”
“아무튼! 그래서 이야기는 다 끝난 거야?”
계속해서 한민아 과장과의 일을 물어보는 그녀.
아무래도 그날, 늦은 저녁에 여자에게 전화가 온 것이 영 신경 쓰이는 듯했다.
그녀와 끝이 났냐는 걸 물어보는 이중적 의미 같달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일 이야기로 연락한 거니까, 잘 마무리됐죠.”
거대 메디컬 한 과장이 내게 중요한 정보를 대가로 밥을 사라고 했었던 것까지 굳이 그걸 김 원장에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 원장과 내가 연인 사이도 아닌데.
“그럼 뭐 둘이 아무것도 아닌 거네.”
툴툴대듯 말하는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던 그때.
병원 로비로 걸어들어오는 남성.
유난히 몸을 움츠리고 있는 탓에 자연스레 그에게 눈길이 향했다.
팔짱을 끼고 이상한 눈빛, 그러니까 게슴츠레도 아니고 마치 눈에 핀트가 나간 것 같은 알 수 없는 눈빛.
어떻게 보면 살기 어린 눈빛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병원복을 입고 있고, 머리는 며칠이나 감지 않은 건지 꽤 헝클어진 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리고 팔짱을 낀 팔과 겨드랑이 사이에는 검정 비닐봉지가 끼워져 있었다.
검정 비닐봉지 안에는 작은 무언가가 들어 있는 듯했지만, 그걸 감추려는 듯 꼭꼭 숨기려고 한 것처럼 보였다.
대체 저 사람은 뭐지?
환자가 저런 눈빛과 저런 행색으로 들어오는 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미간을 찌푸릴 정도로 그에게 집중하며 걷던 그때.
들려오는 그의 속마음 소리.
[네가 뭔데 나를 아프게 해? 너도 똑같이 당해 봐. 그 고통을…….]
대체 무슨 말이지?
자신을 아프게 했다며 똑같이 당해 보라니.
환자가 아픈 이유.
당연히 다쳤기에 아픈 것일 테고, 그럼 사고가 났던 건가?
그래서 사고를 낸 사람에게 똑같이 복수를 하겠다는 건가?
뭐가 됐든 저 환자의 상태는 대충 보아도 위험해 보였다.
“응? 민 과장님?”
내가 넋을 놓은 채 그 환자를 바라보고 있자, 김 원장은 내 팔을 흔들며 물었다.
그리고 곧장 내 시선을 따라 그 환자를 바라보았다.
“어? 저 환자분은?”
그녀는 환자를 바로 알아본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저 환자분 왜요? 원장님 담당 환자분이에요?”
내가 그녀에게 묻는 이유.
행복 정형외과는 꽤 큰 병원이기에, 모든 환자를 외우고 있을 수는 없다.
수술도 하고, 입원실에 직접 회진을 가기에 담당 환자는 알 수 있지만, 그 외의 환자까지 외울 수는 없지.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병원장님 담당 환자분이야.”
심지어 그녀의 담당 환자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장님 담당 환자분이 아닌데 어떻게 외우고 계세요? 이것도 기억력이 출중하신 건가?”
“하하. 아니야. 저 환자분 병원장님이 직접 수술하셨거든.”
“네? 근데 대체 어떻게 모든 환자분을 아시는 거예요?”
그녀는 뿌듯하다는 듯 어깨와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사실……. 내가 다 아는 게 아니라, 저분이 좀 특이 케이스였어. 병원장님이 수술하신 이유도 상태가 안 좋아서였거든. 그래서 수술 시간도 예상보다 훨씬 지연되고… 아무튼, 엄청 힘든 수술이었지.”
“아……. 그래서 기억하시는 거구나.”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응. 심각한 상태로 병원 왔던 환자분이었어. 아, 근데 곧 병원장님 회진 도실 시간인데? 왜 저 환자분은 여기 계시지? 지금 아마 몸도 정신도 상태가 온전하지 못할 때인데…….”
“정신도요?”
“어. 수술이 길어졌으니까, 마취 시간도 당연히 길었고… 그리고……. 뭐 아무튼, 그래.”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그 환자에게 다가갔다.
“환자분.”
나 역시 그녀의 옆에 있었기에 자연스레 그녀와 함께 저 환자 옆으로 걸어갔다.
환자는 그녀의 말에 도끼눈을 뜬 채로 김 원장을 쏘아보았다.
“지금 입원실로 바로 가셔야 해요. 상태 확인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되는데.”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고, 김 원장은 환자의 상태가 걱정되는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민 과장님. 나 환자분이랑 같이 입원실 올라갔다가 진료실 갈게. 먼저 들어가 있을래?”
그녀의 권유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요. 같이 올라갔다가 가요. 어차피 진료실 먼저 가서 할 것도 없고요.”
그녀의 진료실에 굳이 먼저 들어가 있을 필요는 없었다.
더불어 그 환자의 속마음을 들은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김 원장 옆에서 함께 지켜봐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더 컸다.
“그래, 그럼. 같이 올라갔다가 오자.”
“네.”
환자를 사이에 두고, 나와 김 원장은 양쪽에 서서 걷기 시작했다.
환자의 걸음걸이가 너무 느린 탓에 김 원장은 그의 팔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환자는 팔을 뿌리치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아, 네. 죄송해요.”
김 원장은 놀란 얼굴을 한 채 그대로 손을 내려놓았다.
내가 보기에 환자는 김 원장의 손길에 놀란 게 아닌 거 같았다.
그는 그저 팔과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있는 검정 비닐봉지가 떨어질까 신경을 쓰는 모습처럼 보였다.
대체 저 안에 뭐가 들었길래 그러지?
속마음은 복수를 하려고 하는 것 같았는데 혹시……?
잠시 뒤, 환자와 함께 우리는 입원실에 도착했고 곧장 그를 침대로 안내했다.
“환자분. 조금 기다리시면 수술하셨던 병원장님 오실 거예요. 어디 움직이지 마시고 자리에 계셔야 해요.”
그는 김 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눕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로.
그리고 우리는 곧장 그 환자의 입원실을 빠져나왔다.
“우리 병원 입원실은 처음이지?”
“네. 역시 행복 정형외과 입원실 층은 진짜 크네요. 그리고 엄청 잘 되어 있어요.”
“그래? 구체적으로 어떤 게?”
내가 병원에 대해 칭찬하자 그녀는 기분이 좋은 듯 내게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입원실 공간이 커서 다인실 이용하기도 좋은 거 같고, 층별로 로비에, 쉬는 공간도 넓고…….”
말을 이어 가던 그 순간, 멀리서 걸어오는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
그가 걸어오자 주변에 있던 간호사들이 곧장 자세를 고치고 고개를 숙였다.
한눈에 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병원장이라는 것을.
“병원장님 오셨어요?”
그리고 점점 가까워질수록 간호사들이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동시에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타타타탁하는 발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싸한 느낌이 순간 내 주변을 맴돌았고,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조금 전 나왔던 입원실을 바라보았다.
맨 끝자리에 있던 아까 그 환자.
그 환자가 한 손을 등 뒤에 뒷짐을 지듯 꺾은 채, 빠른 걸음으로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환자의 속마음에서 들린 복수의 대상이 병원장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