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하필 이때 거대 메디컬 한민아 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거대 메디컬? 거대 메디컬이면 민 과장님네랑 경쟁 업체 아닌가?”
“네, 맞아요. 그 거대 메디컬.”
“근데 퇴근까지 한 이 시간에 라이벌 회사에서 웬 전화?”
사실은 내가 낮에 그녀에게 톡을 보냈었다.
물어볼 말이 있었기 때문이지.
강 대리가 코메 바이오에서 관절 주사 총판을 받을 예정인 것과 관련해 거대 메디컬이 정말로 발을 빼는 게 맞는지 확인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 담당도 아닌데 내가 강 대리 건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
강 대리를 견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문점이 들었던 것이지.
조 차장도 나처럼 이상하게 생각했던 건지, 나와 코메 바이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었다.
조 차장은 그날 회의 이후, 해외 학회에서 만났던 사람이자 평소 친분이 있는 거대 메디컬 박민식 차장에게 따로 물어봤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어물쩍거리며 코메 바이오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지 않고 넘겼다고 했다.
내가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민아 과장뿐이었는데, 그녀에게 물어본다고 한들 박 차장과 다른 대답이 나오겠는가.
그러나 조 차장은 한 과장이 실수로라도 내게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하며, 그녀에게 물어볼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나는 낮에 그녀에게 톡을 보냈던 것이다.
오후 내내 답장이 없다가 이제 와서 전화가 온 것이지.
금요일 퇴근 후 저녁 늦은 시간이었기에 굳이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월요일이 되었을 때,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생각해 휴대전화를 뒤집으려던 그때.
“안 받아도 돼요. 다음에 연락하면 되니까…….”
“왜? 뭐야? 그러니까 더 수상한데? 민 과장님 여자 생긴 거야?”
김 원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하하. 아니요. 일 때문에 전화한 거죠.”
“나 괜찮으니까 받아도 돼. 진짜야. 안 받으니까 더 수상한데?”
그녀는 농담 섞인 말투로 이야기했다.
정확히 무슨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김 원장을 오해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괜히 여기서 전화를 받지 않으면 어떤 식의 오해든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에 나는 재빨리 한 과장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민 과장님! 한국 가서 만나자더니, 벌써 연락하신 거예요? 저 좀 기쁜데요?
“아… 저 일 때문에 여쭤볼 게 있어서요.”
- 일이라면 어떤……. 무슨 일이길래, 거대 메디컬 직원한테까지 연락을 하셨을까?
“뭐 하나 여쭤보려고 했는데, 퇴근하셨을 테니 다음 주에 연락드릴까요?”
- 아니요, 괜찮아요. 뭔데요? 지금 이야기하셔도 돼요.
“혹시 코메 바이오라고 아세요?”
- 코메 바이오? 당연히 알죠. 이번에 관절 주사 나온 거 때문에 그러시구나?
그녀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담당자가 아니면 잘 알 수 없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코메 바이오를 잘 알지 못했다.
더군다나 관절 주사가 신제품으로 나왔다는 사실은 더더욱.
그저 강 대리가 회의 때 이야기를 해 알게 된 것이었으니까.
“어? 어떻게 다 알고 계시네요? 코메 바이오 담당하는 직원분께 들으신 건가요?”
- 아… 제가 코메 바이오 담당했었거든요.
담당했었다라…….
지금은 담당자가 바뀌었거나, 혹은 그녀가 이제 코메 바이오에서 발을 뺐다는 말이겠지?
“지금은 담당이 아니시고요?”
- 네. 저희 코메 바이오에서 손 뗐는데, 알고 전화하신 거 아니에요? 코리아 메디컬에서 코메 바이오 총판 받으시려고요?
“거대 메디컬에서 손을 뗐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혹시 제가 월요일에 다시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여쭤볼 게 몇 가지 있어서요.”
이야기가 길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 앞에 앉아 있는 김 원장에게도 실례였으니까.
- 저는 괜찮은데.
“제가 지금 약속이 있어서 밖에 좀 나와 있는 상황이어서요. 죄송해요.”
- 그러셨구나. 전화 주신 거 보니 아직 모르시는 것 같은데. 만나서 이야기할까요?
“네?”
- 코메 바이오 총판 받으시려는 거 아니에요? 제가 중요한 정보가 있는데, 만나서 말씀드릴게요. 꼭 들으셔야 할 텐데?
궁금했다.
거대 메디컬에서 코메 바이오 총판 발을 뺀 이유.
강 대리는 거대 메디컬이 발을 뺀 이유는 단순히 우리 코리아 메디컬에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지금 한 과장에게 듣는 이야기는 그와 다르다.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
혹시나 문제가 있어 발을 뺀 거라면 우리도 총판을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게다가 내가 물었을 때, 알려주지 않아도 되는 사항을 그녀가 먼저 알려주겠다고 하니 내가 거절을 할 리가 있겠는가.
“네. 그럼 저야 감사하죠. 월요일에 연락드리면 될까요?”
- 아니요. 월요일이면 회사 사람들 눈도 있고. 일요일에 잠깐 보시죠?
“그렇겠네요. 그럼 다시 연락드릴게요.”
- 좋아요.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자 김 원장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목소리가 완전 어린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저보다 한 살밖에 안 어려요. 이번에 해외 학회 갔다가 알게 된 직원인데…….”
그녀는 내 말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해외 학회 가서 여사친을 만드셨겠다? 여사친은 나뿐이라더니?”
김 원장의 반응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질투하시는 거예요? 하하.”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은 발그레해졌다.
“아니거든? 와인 먹어서. 아니, 여기 조명 때문에 그런 거거든?”
그녀는 말을 하고서는 와인을 들이켰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나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왜 웃어? 진짜 여사친 만들어 온 거야?”
“아니에요. 저한테 여사친은 김 원장님 한 명뿐인 거 아시면서.”
그녀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알지. 그래서, 우리 다음에 그 영화는 언제 볼 거야? 그거 생각보다 인기가 없나 봐. 잘하면 조만간 막 내리겠던데?”
그녀는 금세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막 내리기 전에 얼른 보러 가요.”
“좋아. 갑자기 요즘 스릴러물이 여러 개 개봉했는데 말이야…….”
그녀는 신이 난 얼굴로 내게 영화 예고편을 보여주며 말했다.
이곳의 분위기 탓인지, 연거푸 마신 와인 탓인지, 평소보다 그녀와 한층 더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 * *
“내일부터 출근이지?”
임정준 사장은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반찬을 집으며 물었다.
“네. 근데 직원들도 이미 알고 있는 거예요, 삼촌?”
“아니. 아무도 모르지. 근데 금방 눈치는 채지 않을까 싶다. 조카인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가족이라는 건 금방 알아차릴 거야.”
“하긴. 갑자기 과장 직책 달고 출근하면 그렇게 생각은 하겠다.”
식탁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임 사장과 그의 조카뿐이었다.
그들은 저녁 식사를 하며 말을 이어 갔다.
“이야기 퍼지는 건 순식간일 테니까. 열심히 할게요, 삼촌.”
“그래야지. 그리고 삼촌 소리 입에 붙었다. 내일 출근해서는 임 사장님이라고 해야 해. 중간중간 나오는 반말도 조심하고. 그리고 너는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삼촌이라고 하냐, 작은아버지도 아니고 말이야.”
“몰라. 어릴 때부터 하도 삼촌, 삼촌 하니까 입에 붙어서 그렇죠.”
“그래도 회사에서는 조심해.”
“네네, 임 사장님.”
그는 밥을 다 먹은 듯 수저를 식탁 위에 올려놓으며 임 사장을 향해 물었다.
“삼촌, 아니 임 사장님. 그런데 회사에서 내가 최연소 과장이죠? 아, 좀 부담되겠는데?”
“아니야. 민 과장이 몇 살이더라?”
임 사장은 허공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래. 31살인가, 32살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헉. 나보다 어리잖아? 그럼 과장 달고 들어가는 거 아무도 뒤에서 뭐라고 안 하겠다.”
“그래도 민 과장은 광주에서 일 잘한다고 이름깨나 알리던 놈이야. 너는 경력도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잖아. 다른 회사에서 쌓은 실력이라고는 이제 겨우 대리 단 건데 말이야.”
그는 검지를 펴고 허공에서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삼촌이 못 봐서 그렇지. 저도 이제 일 잘해요.”
“와서 뒤처지지 않게 보이려면 열심히 해.”
“넵! 앞으로도 쭉쭉 승진하려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충성!”
그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을 펴 자신의 이마에 붙였다.
“그리고 삼촌 회사 내가 안 물려받으면 누가 물려받겠어?”
“그거야 네가 하는 거에 따라 달린 거지. 조카라고 회사 물려 줄 생각은 없다.”
“에이. 그래도 승아 꿈은 이쪽이 아닌데? 게다가 승아가 회사 물려받으려면 너무 멀었지 않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우리 딸이 메디컬 쪽으로 와도 좋을 텐데, 영 생각이 없더라.”
“저 한번 잘 키워주십시오, 사장님.”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임 사장을 향해 허리를 접었다.
“하하. 됐어. 얼른 밥이나 더 먹어. 내일 우리 회사로 첫 출근 하려면 얼른 먹고 일찍 쉬어라.”
“넵!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사장님!”
* * *
한편, 같은 시각.
한민아 과장 집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카페.
커다란 유리문이 열리고, 한 과장이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민 과장님!”
“네, 여기요. 한 과장님!”
긴 웨이브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오는 그녀.
커다란 눈에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가 카페에 들어서자, 몇몇 남자들이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동시에 그녀가 향하고 있는 사람인 나에게도 시선이 쏟아졌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던 거겠지.
“하. 너무 좋은 정보라 커피 아니고 술 사라니까. 끝까지 카페로 오셨네요?”
오늘 낮, 그녀와 약속 장소를 정하기 위해 전화를 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나와 술 약속을 잡으려 했고, 나는 끝까지 그녀에게 커피를 사겠다고 했었다.
나는 그녀와 독대를 하며 술을 마시기에 아직 친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가깝지 않았고, 아직까지 그녀는 내게 경계 대상으로 남아 있다.
여자라는 것을 떠나, 거대 메디컬의 박민식 차장이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다음에요. 조금 더 친해지면 술 살게요.”
“뭐, 친해지려고 마시는 거지.”
뾰로통한 얼굴로 내게 이야기하는 한 과장.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어떤 거 드실래요? 얼른 주문하고 올게요.”
“알겠어요. 저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요.”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온 테이블.
그녀는 여전히 농담 섞인 말투로 내게 툴툴거렸다.
“아……. 커피 한 잔으로 내가 이 정보를 주는 게 좀 손해 같은데?”
“한 과장님도 참. 제가 다음에 꼭 술 살게요.”
“민 과장님도 은근히 철벽남이시라니까? 아무튼, 오늘 정보 듣고 좋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술이든, 밥이든 사실 거죠?”
“그럼요, 당연하죠!”
그녀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정말 거대 메디컬이 코메 바이오에서 손을 뗀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그렇게 해서 우리도 손을 떼야 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그녀에게 술이든, 밥이든 못 살 이유가 있겠는가.
“정말 좋은 정보일 텐데?”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래서 왜 코메 바이오 총판에서 손을 떼신 거예요?”
내가 그녀에게 묻자, 그녀는 씨익 웃으며 답했다.
“벌써 본론으로 들어가자고요? 이제 만났는데?”
“아…….”
그녀는 내게 사적으로도 물어볼 말이 있는 모양.
“혹시 민 과장님, 여자친구는 있으세요?”
활짝 웃으며 내게 묻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상형은요? 뭐 만나시는 여자라도 있으신가?”
한 과장이 내게 관심이 있는 건가?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과 함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길게 들이켰다.
“여자친구는 없고, 코메 바이오는…….”
“에이. 그래도 제가 민 과장님 좀 알고 나서 정보를 드려야죠.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데, 정보를 맨입으로 드릴 수가 있나.”
나는 그녀의 태도에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신데요?”
“뭐… 그냥 민 과장님에 대해서?”
그녀는 이후로도 내게 어디에 사는지, 서울에 친구는 있는지, 주말에는 무엇을 하는지 등등.
일적으로는 전혀 관계없는 사적인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한 과장과 코메 바이오에 대한 이야기를 잊을 정도로 대화를 나누었다.
“민 과장님이랑 사적인 이야기한 건 오늘이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해외 학회에서도 계속 일 이야기만 했던 것 같은데.”
“뭐,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고, 나눌 이야기도 많지만! 이제 원하는 정보 좀 드려볼까요?”
그녀의 말에 나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코메 바이오에서 발을 뺀 이유가 따로 있는 게 맞죠?”
“일 이야기 나오니까 눈 반짝거리시는 거 봐.”
“하하. 아니에요.”
나는 그녀에게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저희 거대 메디컬에서 총판 직전까지 갔는데, 저희가 왜 아무 이유도 없이 발을 뺐겠어요. 이유가 분명히 있었죠. 잠시만요, 서류가 어디 있더라?”
그녀는 가방을 뒤적이며,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했다.
“여기 있다. 서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