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강 대리는 자신감이 솟는 듯, 어깨가 올라간 채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이번에 코메 바이오에서 나온 신제품은 관절 주사입니다. 기본 5회, 고령 또는 증상이 심할 경우 7에서 9회까지 처방이 가능합니다.”
그의 말에 백 이사는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환자에게 처방할 수 있는 횟수는 제품의 성능에 따라 정해진다.
그 횟수가 많을수록 당연히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뜻이지.
강 대리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더군다나 실비 청구도 가능하다고 하니, 반응이 매우 좋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래? 괜찮네.”
“예. 충분히 좋은 제품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러니 거대 메디컬에서도 붙은 거 아니겠습니까?”
“음……. 근데 거대 메디컬에서 우리 쪽으로 총판이 기울고 있는 이유는? 거대 메디컬에서 발을 빼는 거야, 아니면 코메 바이오 쪽에서 우리한테로 기울인 거야?”
백 이사의 예리한 말에 강 대리는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정확하게 알아내지는 못한 모양.
그저 거대 메디컬이 아닌, 우리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나서 온 듯 보였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제가 저희 영업 범위와 한 달 발주량을 이야기하니 우리 쪽으로 기운 것 같습니다. 정확한 건 제가 다시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래. 그 총판이라도 따와야지.”
“넵. 단지, 최소 발주량이 조금 많은 편이고 제품 특성상 반품이 불가하지만, 충분히 재고는 안고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서정우 부장이 입을 열었다.
“관절 주사야 뭐 반품이 안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최소 발주량은 몇 갠데?”
“500개입니다. 그런데 저희 영업 예정 판매 개수를 생각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보통 대형 병원에서 관절 주사가 한 달에 100개에서 많으면 200개 나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 제품을 이번에 받을 코메 바이오 관절 주사로 변경하고, 다른 병원에도 영업한다면 최소 발주량인 500개가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두 달 안에는 소진 가능합니다.”
강 대리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백 이사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그리고 눈썹을 들어 올리는 강 대리.
마치 내게 ‘봤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의 표정에 나는 입꼬리를 올리고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강 대리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거대 메디컬보다 우리가 앞서 나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당연히 병원 영업력으로는 우리가 앞서는 것이 맞다.
다만, 영업력과 말발만으로 우리에게 기울었다는 것이 의문이다.
거대 메디컬에서도 역시 한 달에 500개 발주를 하겠다고 했을 텐데…….
특히나 강 대리의 실적이나, 그간의 일을 지켜봐 왔을 때 이렇게 큰일을 홀로 따내 온다는 게 의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강 대리가 거대 메디컬을 밀어내고, 일을 따내 온다면 대단한 것이지만 그가 혹시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됐다.
잠시 노트를 끄적이며 계산하던 백 이사가 입을 열었다.
“그래, 강 대리. 열심히 해봐. 그 정도면 매출이 꽤 오르긴 하겠네. 요즘 강 대리 실적 안 좋았던 거 알지? 꼭 성공해 오도록 해.”
“예! 결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는 확신에 찬 두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 회의는 이쯤하고 마지막 전달 사항이 있다.”
백 이사의 말에 직원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다음 주에 새로운 직원이 출근할 거야.”
“네?”
“새로운 직원이요?”
백 이사의 갑작스러운 말에 온 직원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새 직원이 온다는 사실보다, 그 일을 이렇게 회의 시간에 이야기한다는 게 놀라웠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밑에 직원이 필요하다는 말은 항상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공고를 올렸다거나, 면접 본다는 이야기, 면접 보았다는 걸 들은 사람은 없었다.
백 이사는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재차 입을 열었다.
“과장직으로 올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그의 말에 회의실은 더욱더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었다.
과장직으로 새로운 직원이 온다니.
이미 우리 부서에는 과장직이 2명이나 존재한다.
박지웅 과장과 바로 나.
회사에서 필요로 하던 직책은 바로 사원인데, 갑자기 과장이 온다라…….
직원들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냈다.
“이미 과장은 2명이나 있는데, 또 오는 겁니까?”
“어디 회사에서 오는 겁니까?”
“민 과장처럼 스카우트로 또 뽑으신 겁니까?”
질문이 폭주하자, 백 이사는 검지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대며 외쳤다.
“자자, 조용!”
그리고는 그 검지를 얼굴 옆에 가져다가 하늘을 향해 뻗으며 말했다.
“위에서 내려온 지시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이사 위에 사장밖에 더 있으랴.
나와 같은 스카우트일까?
내가 스카우트 될 때는 이미 회사에 어느 회사에서 오는지까지 소문이 돌았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저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고만 말하는 것을 보니 스카우트가 아닌 낙하산이지 않은가.
정말 낙하산으로 과장직이 온다고?
백 이사는 그 말을 끝으로 회의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남은 직원들은 한참 동안 회의실을 나가지 않고 새로 올 직원에 대한 이야기로 추측성 대화를 나눴다.
* * *
휴가를 다녀온 것도 아니고 해외 학회를 다녀온 것뿐인데, 오랜 휴가에 다녀왔던 것처럼 유독 힘들고 바빴던 한 주를 보냈다.
휴가를 보내고 일상 복귀해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겨우 적응하고 정신을 차린 금요일.
오늘은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더군다나 오늘은 퇴근 후에 약속이 있다.
유독 후다닥 지나간 것 같은 하루가 지나가고, 퇴근 시간.
김사랑 원장과 영화를 보기로 했지만, 그녀가 원하는 영화의 상영 시간이 우리 일정과 맞지 않았다.
애매한 시간 탓에 우리는 곧장 그녀가 말한 술집으로 향했다.
행복 정형외과 근처에 있는 와인바.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안에는 손님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았다.
“여기 새로 생긴 곳이라는데, 우리 병원에 간호사 쌤이 좋다고 해서 오자고 했어.”
그녀는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내게 말했다.
이제 막 리모델링을 한 터라, 분위기도 깔끔하고 인테리어도 삐까뻔쩍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내부는 꽤 아담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LP로 틀어둔 재즈가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음원이 아니라 그런지 특유의 지직대는 소리가 더 분위기를 로맨틱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그래서일까,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연인 사이로 보이는 남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분위기 좋은데요?”
내 말에 환하게 웃는 그녀.
“영화 그거 보고 싶다고 하셨는데, 못 봐서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병원 앞에 있는 영화관은 상영 시간이 꼭 애매하더라. 아쉽다.”
그녀는 눈썹을 한껏 축 내려뜨린 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사선으로 꺾은 채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막 내리기 전, 주말에 보러 갈까요? 항상 퇴근 시간에는 애매하니까.”
“정말? 나야 좋지. 그럼 민 과장님이 가자고 하면 나는 바로 튀어 나갈게.”
그제야 활짝 웃는 그녀.
얼떨결에 주말 데이트 약속을 잡아버린 느낌이다.
그때 직원이 다가와 우리에게 메뉴를 건넨 후 돌아갔다.
두꺼운 메뉴 책자.
항상 소주와 맥주만 마실 줄 알았지, 와인에는 취미가 없었던 터라 나는 눈을 사방으로 굴렸다.
그녀와 함께 메뉴를 보고 있었지만, 봐도 잘 모르겠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민 과장님. 어떤 거로 마실까?”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있어 보이는 척 아무거나 골라 봐?
와인을 잘 모르는 나는 솔직하게 그녀에게 털어놓았다.
“음……. 저는 사실 와인을 잘 몰라서요. 원장님이 추천해 주시는 거로 마실게요.”
그녀는 자신의 손을 턱에 가져다 대고 말없이 메뉴를 살폈다.
김 원장도 잘 모르는 건가?
그녀가 민망하지 않게 직원에게 추천을 받는 게 좋겠다 싶어 말하려던 그때.
“아니면 추천해 달라고 할…….”
그녀가 내 대답을 듣지 못했는지, 말을 자르고 직원을 불렀다.
“예, 주문하시겠어요?”
직원은 우리 테이블로 오자마자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시선을 김 원장에게로 돌리자, 직원 역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직원에게 말했다.
“제가 풀 바디 와인을 좋아하는데, 혹시 이 중에 추천 좀 받을 수 있을까요?”
“네. 보시는 페이지에서 찾으시는 거면 까베르네 소비뇽이나 말벡…….”
직원이 전문 지식을 선보이며 말하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메뉴를 짚으며 답했다.
“아, 근데 저는 말벡 보다는 템프라니요나, 보르도 블렌드…….”
예상외였다.
그녀가 이렇게 와인에 대해 해박한 줄은.
게다가 직원과 와인에 관한 이야기를 한참 주고받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이 꽤 멋있어 보였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대화에 빨려 들어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의사 가운을 입고 나를 만나던 김 원장.
물론 그녀를 사석에서 만난 것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전문 분야도 아닌 곳에서 지식을 뽐내는 건 처음 봤는데, 그게 또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의식하지 못한 채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던 나.
아직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내가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분위기 탓인가?
의식이 돌아오니 내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럼 이거로 주세요!”
“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 나는 그녀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와. 원장님, 멋있는데요?”
“그래? 내가 한때 와인을 좋아했었거든.”
“저는 항상 소맥파라, 이렇게 와인 좋아하시는 분이랑 와인바 오니까 좋네요.”
“소맥도 좋지. 여기 분위기도 좋은데 다음에 또 오자. 내가 다른 와인도 소개해 줄게.”
“좋아요.”
나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우리의 테이블에는 와인이 세팅되었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와인 잔을 끼우고, 바닥에 붙인 채 휘휘 저으며 내게 묻는 김 원장.
“학회 다녀온 건 어땠어?”
“좋은 경험이었어요. 근데 다녀오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순식간에 벌써 금요일이에요.”
“그러겠다. 저번 주부터 주말 없이 일했으니까. 오늘 피곤할 텐데, 괜히 나 만난 거 아니야?”
“아니에요. 내일 주말이라 쉬면 되는데요.”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떠오른 선물.
나는 가방을 휘휘 저어 안에 담긴 작은 쇼핑백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거 선물이요.”
“선물? 뭐야?”
“지난주에 약속 깨버리고 학회 갔잖아요. 미안해서 면세점에서 작은 거 하나 사 왔어요.”
“미안해할 거 없다니까.”
그녀는 쇼핑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녜요.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는데……. 열어보세요.”
“선물인데 뭐든 고맙게 받아야지! 뭔데?”
그녀는 쇼핑백을 뜯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립스틱?”
“네. 색이 마음에 드실지는 모르겠어요. 가서 인기 많은 거로 추천받아서 사 오기는 했는데.”
김 원장은 내 말에 립스틱을 꺼내 손등에 쓰윽 그어 색상을 확인했다.
“뭐야? 완전 내 스타일인데? 민 과장님은 여자 선물 고르는 것도 어쩜 센스가 이렇게 넘치는 거야? 나 쿨톤인 거 어떻게 알고 레드로 골라왔대?”
“인기 많은 거로 달라고 했더니 직원이 잘 골라줬나 보네요.”
김 원장은 내 말에 립스틱 포장지를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아마 여기 립스틱에서 제일 유명한 색상이 웜톤 색상이라 코랄 섞인 거로 줬을 텐데. 신기하게 나랑 맞는 쿨톤 립스틱으로 골라줬네? 신기하다.”
그녀가 의아해하며 신기해하는 이유.
맞다. 사실 직원에게 그냥 추천받은 색상은 아니다.
가서 김 원장의 카톡 프사 사진까지 보여주며, 그녀에게 맞는 색상으로 추천받아 사 온 립스틱이다.
그러니 그녀에게 어울리는 색상으로 고를 수 있었지.
그녀를 생각하며 사 온 물건을 보고 그녀가 기뻐하니 다행이었다.
면세점에서 비행기 시작이 촉박해졌을 때, 사지 말고 비행기 탈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었다.
하지만 급히 달려가 사 오기를 잘했구나 싶은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잘 쓸게. 고마워.”
“하하. 아녜요. 아, 그런데 원장님, 저번에 저한테 뭐 고마운 일 있다고 하셨던 건 무슨 말이에요?”
지난주, 그녀가 내게 고마운 일이 있어 술을 사겠다며 약속을 잡았었다.
“아… 사실 광주에서 스토커 일 있었을 때 말이야. 민 과장님이 경찰관님들께 따로 연락했었다며?”
“네?”
“다 들었어. 우리 집 앞쪽에 따로 순찰 돌아 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며? 그때 용의자도 민 과장님이 경찰에 이야기했던 거고.”
“들으셨…어요?”
내가 경찰에게 따로 이야기했었던 걸 김 원장에게 전달한 모양.
“응. 진짜 고마웠어. 아마 광주에서 민 과장님 없었으면, 나는 오래 못 버텼을 거야.”
“아니에요.”
지이잉.
그때 테이블 위에서 세찬 진동과 함께 울리는 휴대전화.
테이블 위에 있었기에, 김 원장 역시 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건 사람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곧장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한민아? 여자 이름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