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사실 제가 코리아 메디컬에 이직하기 전, 광주에 있는 메디컬 회사에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이태현은 내 뜬금없는 대화의 시작에 흥미롭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했다.
“그런…데요?”
“NA 바이오 제품을 한국에서 필요로 하는 건 알고 계시죠?”
“예. 저도 한국에 자주 왔다 갔다 하니 알고 있습니다.”
“광주 쪽에서 근무할 당시, 그러니까 몇 달도 채 안 된 사건이죠. NA 바이오 제품을 단독 입수했다고 무려 10억 사기를 쳤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네? 10억이요? 저희 제품으로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태현에게 광주에서 김만호가 NA 바이오 제품을 가지고 사기를 쳤던 사건에 대해 자세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태현은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요? 잡혔나요?”
“네. 시간이 조금 걸리긴 했지만, 다행히도 잡히기는 했습니다.”
“하. 그런 일까지 있었다니… 놀랍고 충격적이네요.”
“맞습니다. 한국에 오래 계시지 않아서 모르시겠지만, 요즘 한국에 젊은 사람들도 인공 관절 수술을 필요로 하는 심각한 연골 수술 사례들이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말을 이어 갔다.
“현재 유통되고 있는 줄기세포 연골 복원술은 수술 후 회복 기간이 너무 길어요. 그래서 NA 바이오 제품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렇겠네요. 저희 제품은 회복 기간이 매우 짧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저희 회사에서는 몸값을 더 올리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내게 고마운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같은 한국인이라 그런 것인지 사실대로 내게 답을 해주었다.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기 위해 수출을 미루고 있다는 사실 그대로를 알려주어 고맙기는 하지만, 나는 이 물건을 하루빨리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라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무려 사기 금액만 총 10억이었습니다.”
그는 내 말에 시선을 빠르게 움직였다.
“어떻게 보면 허술했을지도 모르는 사기였습니다. 하지만 거액을 사기 당한 여러 회사, 그 회사들이 결코 허술하고 작은 회사는 아니었어요. 그만큼 NA 바이오 제품이 절실해서 앞뒤 보지 않고 덥석 물었다는 거죠.”
내 말에 틀린 점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태현은 고개만 주억거릴 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NA 바이오 제품을 필요로 합니다. 물론 NA 바이오의 몸값, 제품값, 브랜드값 올라는 거? 중요하죠. 그런데 그저 국가 구분 없이 아픈 환자만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는 내 말에 갑자기 앞에 놓인 다이어리와 펜을 집어 들고 무언가 끄적이기 시작했다.
내 말에 동요하고 있다는 걸까?
“이미 높은 금액으로 한국에 들어온다고 해도 받지 않을 곳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환자를 위해 만든 제품인 만큼, 진정 환자를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수출해 주셨으면 합니다.”
“과장님 말씀, 무슨 뜻인지 충분히 잘 알겠습니다. 저도 한국인이에요. 아니, 그걸 떠나 환자에게 필요한 수술 재료라면 공급해야 하는 게 맞는 거죠.”
“네. 이건 한국 메디컬 업계에 있는 사람을 대표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현은 잠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긴 후, 고개를 들고 내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가 코리아 메디컬과 거래를 해야 하는 이유는요?”
“네?”
예상치 못한 그의 답변.
내년에 있을 수도 있는 그 한국 수출에 우리 회사가 후보에 들 수 있는 건가?
나는 이 기회를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
“저희 코리아 메디컬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대표 메디컬 회사입니다. 물론 업게 1위라고 해서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업이라는 게 천장이 없지 않습니까?”
그는 내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
“NA 바이오 제품의 총판을 저희에게 맡겨주신다면, 당연히 예상하시는 수량 이상으로 판매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코리아 메디컬이 한국에서 유명하고 큰 회사라는 거, 너무 잘 알고 있죠. 오랜만에 좋은 이야기 나눴던 것 같습니다. 민 과장님과요.”
그는 충분히 나와 이야기를 나눴다는 듯, 정리하는 멘트를 던졌다.
하지만 나는 그에 그치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
내가 붙잡는 말을 하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여나 저희 코리아 메디컬을 총판으로 선택을 안 하신다고 하더라도, 어느 회사를 통해서건 수출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게 무슨…….”
“회사의 매출? 실적? 당연히 중요하죠. 그래서 저희 회사에 총판을 주셨으면 하는 거고요. 하지만 저는 NA 바이오 제품이 그저 한국에 들어와 많은 환자가 제품을 사용해 치료에 도움을 받았으면 합니다.”
그는 내 말이 끝나자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무슨 말씀이신지 너무 잘 알겠습니다. 저도 같은 한국인으로서 민 과장님 말씀처럼 됐으면 좋겠네요. 아시다시피, 저도 결정권자가 아니다 보니… 과장님 바람처럼 될 수 있게 보고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해요. 덕분에 좋은 의견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내 뒤쪽에서 들려오는 한국어.
“어머! NA 바이오가 그 별표 부스였나 봐요! 빨리 와보세요!”
한국말이 들려오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획 돌렸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니, 어제 술집에서 마주쳤던 거대 메디컬의 한민아 과장.
그녀 역시 NA 바이오를 보고 자신의 일행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곳에 더 있다간 내 이야기를 그녀가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태현과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럼 한국 가서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민 과장님.”
“저도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태현과 악수를 한 뒤, 부스를 나왔다.
마침 나를 알아본 한 과장.
“어? 민 과장님?”
그녀가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를 부르는 커다란 목소리에 놀라 몸이 움찔거렸다.
“네, 한 과장님. 오늘 또 뵙네요.”
“그러게요? NA 바이오에 저희보다 먼저 오셨네요?”
“예, 이제 다른 부스 가려던 참이에요.”
“하긴. 다들 NA 바이오 제품에 관심이 많으니까요. 박 차장님! 여기요.”
그때 우리 앞으로 걸어오는 거대 메디컬의 박민식 차장.
“차장님. 또 뵙습니다.”
“응, 민 과장. 조 차장은?”
“먼저 다른 부스로 가셨어요.”
“그래? 다음에 학회 끝나고 한국 가면 또 보자고.”
“예, 좋습니다.”
박 차장과 내 대화에 한 과장이 불쑥 손을 들고 외쳤다.
“어? 저도요! 저도 끼워 주세요.”
“하하. 그래요. 한 과장님도 같이 봬요.”
“정말이죠? 민 과장님, 한국 가서 연락 주세요.”
그녀는 나를 보고 싱긋 웃으며 손을 들어 인사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바로 NA 바이오 부스를 끼고 코너를 돌았다.
학회가 워낙 컸기에 코너를 돌자마자 이동하지 않은 채, 학회 지도를 펼쳤다.
그때 칸막이 너머에서 박 차장과 한 과장의 목소리가 선명히 들렸다.
그들은 내가 이미 자리를 떠났다고 생각했는지 코리아 메디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다.
“한 과장. NA 바이오, 우리가 먼저 총판 꼭 따내야 해. 코리아 메디컬에는 절대 빼앗기면 안 되는 거 알지?”
“아! 네, 그럼요. NA 바이오 총판 따기만 하면 업계 1위는 무조건 저희잖아요.”
“그렇지. 떼를 쓰든, 어떤 수를 써서라도 NA 바이오에 이름이라도 올리고 가야 할 텐데. 우선 들어가자.”
그들은 그 대화를 끝으로 부스 안으로 완전히 들어간 듯했다.
NA 바이오 이태현에게 했던 내 말이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나는 여러 번 NA 바이오의 문을 두드릴 예정이다.
* * *
정신없었던 해외 학회가 끝이 났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짐을 풀고 그대로 침대에 뻗으려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다음 날은 회의가 있는 월요일.
분명 회의 때 학회에 대해 물어볼 것이 뻔하다.
회사에서는 보고서로 작성해도 된다고 했지만, 그때는 회의가 끝난 후라 늦을 터.
그렇게 휴일을 반납해 가며 주말 짧은 밤을 보내야 했다.
학회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서로 작성하며 며칠 간의 일을 돌이켜 보았다.
해외 학회에 대한 경험은 내 커리어에도 충분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더불어 얻어온 것 한 가지.
바로 조 차장과의 친분이다.
학회에 가 있는 동안 조 차장은 나에게 전보다 편한 얼굴, 편한 말투로 대해 주었다.
그와 친분을 쌓기 위해 떠났던 학회는 아니었지만, 조 차장과 한 뼘 가까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 *
“그래서 이번에 해외 학회 다녀온 조 차장이랑 민 과장, 어땠어?”
회의가 시작한 지 1시간이 지나갈 무렵.
백승민 이사가 조 차장과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조 차장은 내게 자신이 이야기하겠다는 눈짓을 보낸 뒤 입을 열었다.
“다녀왔던 해외 학회 중 꽤 규모가 큰 편이었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컨택해 온 두 가지 제품이 있는데, 보고서는 따로 올리기는 하겠지만…….”
조 차장은 우리가 따온 소모품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펼쳐놓았다.
어떠한 제품인지, 우리가 그 제품을 판매했을 때의 기대 효과까지.
“음……. 괜찮네. 근데 그게 다야? 좀 특이한 부스나 더 큰 제품은 없었고? 그때 뭐 비밀리에 오는 부스 있었다면서, 그건 어디였어?”
“…NA 바이오였습니다.”
조 차장은 NA 바이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는지, 살짝 망설이다 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NA 바이오와 관련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 차장은 NA 바이오 제품에 가망이 전혀 없다고 생각해 부스에서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기 때문이지.
“NA 바이오? 대박인데? 거기는 어떻게 됐는데?”
기대감에 부푼 백 이사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올해까지도 수출 생각이 없더라고요. 항상 그렇지 않았습니까, NA 바이오는. 올해는 가망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 민 과장 생각도 마찬가지고?”
백 이사가 나에게 묻자, 회의실에 있는 직원들 시선이 내게로 쏟아졌다.
나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잘게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예. 그렇지만 계속 시도해 볼 예정입니다. 우선 어필은 했고, 수출이 되는 건 확실하지만 올해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추후 상황은 따로 보고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도 회사에서 능력자 둘이나 갔다 왔는데, 생각보다 성과가 조금 실망적이네. NA 바이오는 생각도 못 하기는 했지만, 둘이서 조금 작은 성과를 보이지 않았나 싶다.”
몇몇 직원이 조소를 지었다.
특히 강대훈 대리와 김석구 차장.
사실 한국에 와서 곧장 NA 바이오 이태현에게 메일을 보냈다.
우리에게 총판을 주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우리에게 총판을 주었을 때 예상 매출까지.
하지만 회의에 들어오기 전까지도 ‘읽지 않음’으로 표시되어 있는 메일.
사실 기대를 조금밖에 하지 않기는 했지만, 여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때 조소를 보내던 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나를 한번 쓱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그.
좋은 소식을 들고 내게 떵떵거리고 싶은 모양이다.
“저, 이사님. 저도 보고 드릴 게 있습니다.”
“강 대리가? 무슨 보고?”
“코메 바이오 물건 총판 따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NA 바이오 총판이 미궁으로 빠지니까, 강 대리가 새로운 총판 소식을 들고 왔네? 하하. 제대로 가져올 수 있는 건가?”
조금 전 조 차장과 내가 보고한 NA 바이오 총판과 비교하듯 이야기하는 백 이사.
하지만 NA 바이오와 코메 바이오는 절대 비교할 차원이 되지 않는다.
NA 바이오는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도 않은 제품이고, 전체 메디컬에서 탐내는 제품.
그에 반해 코메 바이오는 국내 회사 제품으로, 이번에 새로운 신제품이 나온 것일 뿐이다.
다른 이야기지만 코리아 메디컬에 온 뒤 총판이 많아진 이유.
우리 회사가 많은 병원에, 그리고 많은 타 메디컬에 납품하는 큰 회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총판을 많이 가지고 있을 수밖에.
강 대리는 신이 난 듯 브리핑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코메 바이오에서 거대 메디컬과 저희, 이렇게 두 곳이 컨택 중인 거로 확인됐습니다.”
그의 말에 백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 또 거대 메디컬이야?”
그의 한숨에 옆에 있던 김 차장이 답했다.
“영원한 라이벌이지 않습니까. 항상 저희가 가는 곳에 따라오는 게 거대 메디컬이니까요.”
“아무튼, 그래서? 이어서 해봐, 강 대리.”
“예. 그런데 제가 컨택을 시작하고 난 후에, 거대 메디컬이 아닌 저희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 확인됐습니다.”
“그래? 확실한 건가? 자세히 이야기해 봐.”
백 이사의 말에 나 역시 강 대리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네. 거대 메디컬 쪽에서 저희 회사가 들어오니, 지레 겁을 먹은 듯 슬금 발을 빼는 것 같았습니다. 저희가 초기 발주 물량도 훨씬 많이 이야기했고요.”
‘어? 뭔가 이상한데?’
강 대리의 이야기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강 대리에게 좋은 마음이 있지 않아 삐뚤어진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저 그의 말에 설득을 당할 수가 없었다는 것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에 필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