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낯익은 얼굴에 나도 모르게 남자가 서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손을 뻗으며 외치자 조 차장은 나를 한번 쓱 보더니, 이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이동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면서 내게 물었다.
“누군데?”
나는 조 차장에게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제가 저번에 봤던…….”
설명을 하던 도중 그가 우리 쪽으로 급하게 달려오며 나를 반갑게 불렀다.
“어? 코리아 메디컬… 그분, 맞으시죠?”
나와 조 차장의 대화는 그의 한마디로 인해 중단됐다.
“네, 맞아요. 여기서 뵐 줄이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답했다.
“그때는 정말 감사했어요!”
그는 마치 나를 만날 줄 알았다는 것처럼 크게 놀라지 않는 듯 보였다.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악수를 청하는 남자.
그는 바로 서울 카페 앞에서 마주쳤던 사람.
급히 출국하는 듯 서둘러 뛰어가느라, 여권을 잃어버렸던 그 사람이다.
나를 보고도 태연한 그의 말투와 표정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지경.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흔들며 물었다.
“아니에요. 어떻게 여기서 뵙죠? 신기하네요.”
“그러게요. 사실 이번에 한국에 초청권 보냈던 목록 보고 코리아 메디컬이 있길래 혹시나 했거든요.”
“네?”
“코리아 메디컬에 직원이 많다 보니까 혹시 오실까 했는데. 진짜 오셨네요.”
“아… 네. 저는 메디컬 쪽에서 일하시는지는 몰랐어요. 제가 코리아 메디컬인 건 어떻게…….”
“그때 들고 계신 파일을 봤거든요. 저는 메디컬 제조 쪽에 일하고 있어요.”
내가 그에게 여권을 찾아 줄 당시, 내 손에 ‘코리아 메디컬’이라는 글씨가 크게 적혀 있던 계약서를 들고 있었다.
그때 그걸 보고서 알아차렸었구나.
나는 그 당시가 떠올라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 그러셨었구나.”
우리의 대화에 조 차장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인사를 안 드렸네요. 여기는 저희 코리아 메디컬에 조성철 차장님입니다.”
내 소개에 조 차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눈인사를 보냈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그는 조 차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 역시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나 또한 그가 왜 이 자리에 있는지, 이 학회에는 어떤 명목으로 왔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해외 학회에 참여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게다가 한국 초청 목록을 또 어떻게 확인한 거지?
그는 한국에서 어디 메디컬 소속이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제조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태현이라고 합니다.”
이태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하긴, 내가 그의 여권을 찾아줄 당시에도 몰랐던 이름과 얼굴이었으니까.
더불어 그는 우리와 같은 메디컬 영업 회사가 아닌, 제조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하니 내가 알 리 만무하다.
말해 봤자 모를 거라 생각해 다니는 회사는 이야기해 주지 않은 걸까?
내가 그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기자, 조 차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예, 반가워요. 혹시 제조 회사라면 이번에 부스 참여하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오늘 하루 내내 부스에 있었는데, 두 분을 뵙지 못했던 것 같네요. 괜찮으시다면 저희 부스로 가셔서 말씀 좀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이때까지 조 차장과 나의 발길은 어느 특정 부스로 향하고 있지 않았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부스를 돌아다니고 있었을 뿐.
이태현의 제안에 우리는 서로 고개를 돌려 바라본 후 눈짓을 보냈다.
그의 옆에 서서 나란히 이태현 회사 부스로 가는 길.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직책은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해서요.”
그는 내 말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저희가 해외 기업이라 따로 직책이 없어서요.”
“아, 그러시겠네요. 그럼 회사 이름은…….”
그의 회사 이름을 물어보려던 그때.
이태현은 바로 좌측으로 몸을 돌려 부스를 가리켰다.
“여깁니다, 저희 부스. 안으로 들어가셔서 말씀 나누실까요?”
그의 말에 나는 턱을 바닥까지 떨어트리듯 입을 떡하고 벌렸다.
그리고 눈을 비빈 후 재차 부스 위에 적힌 회사명을 다시 한번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놀라운 회사 이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조 차장을 바라보니, 그의 반응 역시 나와 별반 다를 거 없이 놀란 얼굴.
“저… 이쪽 자리로 오시면 됩니다.”
이태현은 언제 안까지 걸어 들어갔는지, 우리를 향해 외쳤다.
그의 말에 나는 정신을 번쩍 차린 후 답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조 차장을 향해 말했다.
“차장님. 대박입니다! 신비주의 컨셉 잡았던, 별표 표시 부스! 거기가 NA 바이오라니요!”
나는 조 차장에게 최대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NA 바이오.
줄기세포 연골 복원술.
그러니까 광주 메디컬에 있을 당시, 우리에게 사기를 쳤던 김만호.
그가 줄기세포 연골 주사를 단독 입수했다며, 사기 쳤었던 그걸 다루는 회사.
바로 그 회사가 NA 바이오다.
한국에 있는 메디컬, 병원, 어디든 상관없이 원하고 있는 제품.
하지만 수입을 따오지 못했던 그 제품.
그 제품이 바로 지금 내 눈앞에 놓여 있다.
조 차장도 당연히 NA 바이오를 알고 있다.
메디컬에서 조금이라도 오래 근무했다면 모를 수가 없지.
비록 조 차장은 내가 광주에 있을 당시, 이와 관련해 사기를 당할 뻔했다는 것은 모르지만 말이다.
조 차장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귀에 속삭였다.
“여기다! 우리가 꼭 성과를 내야 할 곳.”
나는 그의 말에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이태현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제 소개를 안 드렸네요. 저는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내가 명함을 내밀며 말하자 그 역시 자신의 명함을 내게 건넸다.
“NA 바이오 직원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때 뵐 때까지만 해도 한국 쪽 메디컬 업종에 계실 줄 알았는데, 외국 기업이라기에 놀랐거든요. 그게 NA 바이오일 줄이야.”
“하하. 그런가요? 오랜만에 휴가받고 한국 갔다가 회사로 복귀하는 중이었거든요.”
“그러셨구나. 비행기는 늦지 않고 잘 타신 겁니까?”
“예, 과장님 덕분입니다. 그날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는 내게 재차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아닙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그 누구였어도 저처럼 도와드렸을 겁니다.”
나와 이태현의 대화에 조 차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아… 그게…….”
내가 입을 열자, 이태현이 자신이 목소리를 높여 나 대신 답을 했다.
“제가 한국에서 여권을 잃어버렸었는데, 민 과장님이 바로 찾아주셔서 다행히 늦지 않게 비행기를 탈 수 있었거든요. 너무 감사해서 사례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계속 거절하시더라고요. 겨우 코리아 메디컬이라는 단서 하나만 가지고 헤어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뵙게 된 거고요.”
그의 말에 조 차장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눈빛.
내가 좋은 일을 해서, 여권을 찾아주어서 대단하다는 표정이 아니다.
바로 찬스를 얻었다는 표정이었다.
‘그 사례를 기회 삼아 총판을 따내 보자’라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조 차장.
나 역시 그렇게라도 NA 바이오의 제품을 따내고 싶었다.
하지만 한국에 수출을 하지 않는 NA 바이오에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총판을 받아낼 수는 없을 터.
그때 부스 안쪽에서 한 직원 큰 소리로 이태현을 불렀다.
이태현은 우리에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차장님, 과장님. 잠시만요. 저 안쪽에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그의 양해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부른 그 직원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조 차장은 내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로 사례받자.”
나는 입으로 바람을 빨아들이며, 쓰읍 소리를 냈다.
“차장님. 여권 하나 가지고 NA 바이오 총판을 달라고 하기도 좀 그렇지 않겠습니까? 되지도 않을 것 같고요.”
“하. 그렇긴 하지? 우리 지금 학회 와서 뚜렷한 성과 가지고 갈 만한 게 없는데……. NA 바이오 총판 가져간다면 대박일 텐데 말이야.”
우리가 학회에 와서 성과를 낸 건 소모품 두 개뿐이다.
물론 새로운 제조 품목이라 한국에서 아직 선보이지 않았던 제품이라 의미는 있다.
한국에 돌아가 윗선에 보고 후 결재만 떨어지면 바로 물건을 수입할 수 있게 처리를 해두었다.
하지만 조 차장 말대로 차장과 과장이 여기까지 와서 해가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임팩트가 부족한 건 사실.
어느 직원이 왔어도 이쯤은 해냈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죠. NA 바이오 총판을 한국 어느 메디컬에서 따간다고 해도 대박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 시도라도 해보자. NA 바이오에서 올해도 수출 생각이 아예 없다고 해버리면, 우리가 시도하는 의미도 없지만 말이다.”
우리가 속닥거리며 대화를 나눌 때, 이태현이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는 손에 제품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게 저희 줄기세포 연골 복원 주사인데, 실물은 처음 보시죠?”
우리는 눈을 크게 뜨고 그가 들고 있는 제품을 보았다.
항상 카탈로그에서나 보던 제품.
조 차장과 나는 제품을 설명하는 이태현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설명이 끝날쯤, 나는 그를 향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저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 NA 바이오는 충분히 세계에서 유명한 기업이고 가만히 있어도 잘되는 기업이지 않습니까? 근데 굳이 학회에 참여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내 질문에 이태현은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하하. 그렇게 물어보시는 분은 처음이네요.”
“그런가요? 이미 여러 국가에서 컨택도 오고, 다들 NA 바이오 제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참여하신 이유가 궁금해서요. 이번에 여러 국가로 수출을 늘리실 계획인 건가요?”
내 질문의 핵심.
이미 수출하고 있는 국가 외에도 더 많은 국가에 수출할 예정이 있느냐는 질문이다.
나아가 그 국가에 한국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말이다.
“음……. 회사 기밀이라 전부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뭐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민 과장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썹을 들썩였다.
“말씀하셨던 거 그대로, ‘안달 나게’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네요.”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을 이어갔다.
“안달 나게 하는 거. 그게 저희 기업에서 학회에 참여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월 후, 혹은 내년 정도에 수출하겠다는 식으로 매번 계획을 미뤄왔던 NA 바이오.
그렇게 당장 수출해 줄 것도 아니면서 제품을 학회에서만 보여주며 사람들을 안달 나게 한다.
왜냐, 그래야 몸값이 오르니까.
회사의 몸값도, 제품의 몸값도.
그의 말대로라면 이번에도 역시 다른 곳과 계약할 생각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걸 알아차렸다고 해서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돌아갈 수는 없다.
조 차장 역시 이태현의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곧장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거래 생각은 없이, 제품의 우수함만 보이겠다는 걸 우리에게 털어놓았는데 우리가 반가워할 리가 있겠는가.
성과도 내지 못하고, 제품을 구경만 하고 돌아가야 한다는 건데…….
조 차장은 울리지도 않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내게 눈짓을 보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전화 온다. 그리고 우리 아까 부스에 물건 두고 와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그의 휴대전화를 바라보니 걸려온 전화는 없었다.
게다가 나만 보이도록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는 조 차장.
거짓말이었다.
전화가 온 것도, 전에 들렀던 부스에 물건을 두고 왔다는 것도.
그저 함께 자리를 뜨자는 뜻이었다.
이렇게 기약이 없는 NA 바이오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차장님. 먼저 다른 부스에 가 계시면 곧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아직 나눌 이야기가 좀 남아서요.”
조 차장은 내 표정과 말투를 보더니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으며 답했다.
“그래. 금방 와라.”
“넵.”
조 차장은 자신의 가방을 챙겨 NA 바이오 부스를 벗어났다.
조 차장이 떠난 후 조용해진 NA 바이오 부스.
나는 이태현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NA 바이오에서는… 그럼 올해 한국으로 줄기세포 주사 제품… 수출 계획 없으시다는 말씀이죠?”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길게 빼고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그리고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하지만 올해는 몇 달 남지 않았고, 내년 초라도 계획이 있다면 나는 그걸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심에 찬 표정으로 몸을 이태현 쪽으로 기울였다.
“저…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