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탁.
둔탁하게 열리고 닫히는 문소리.
그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민식이라는 남성의 직장 동료.
하지만 그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여러 명이었다.
저 많은 인원이 다 같이 온 건가?
나와 조 차장은 눈을 찌푸려 뜬 채, 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우리 쪽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박민식 쪽을 향해 손을 뻗는 사람.
한 젊은 여성이었다.
조 차장과 나는 의외 인물의 등장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뭐지?
웬 여자?
그녀는 활짝 웃으며 우리 쪽으로 달리듯 빠르게 걸어왔다.
“박 차장님!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나도 방금 들어왔어.”
그녀는 박민식, 그러니까 박 차장에게 말을 하자마자 우리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박 차장의 지인임을 알아차리고 인사부터 한 듯 보였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조 차장을 한번 바라본 뒤, 시선을 옮겨 나를 바라보는 그녀.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놀란 토끼 눈이 됐다.
눈과 함께 입도 떡 벌린 채 눈을 연신 깜빡이는 그녀.
“어? 서류 가방?”
서류 가방?
무슨 말이지?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생각에 잠겼다.
내가 아는 사람인가?
서류 가방… 아!
이 여자는 지난주 금요일, 여수에 내려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갔던 용산역.
그 용산역 에스컬레이터에서 만났던 그녀였다.
내가 아무런 말 없이 눈썹을 움찔거리며 입을 벌리자, 그녀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기억나죠? 용산역 에스컬레이터!”
맞다.
긴 머리에 찰랑찰랑 굵은 웨이브가 있던 뒷모습.
그때 그 여자였다.
나는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여기에 계세요?”
그녀에게 놀란 듯 묻자 자신이 더 놀랐다는 듯 내게 반문하는 그녀.
“그러는 그쪽은 어떻게 여기에…….”
우리의 대화에 옆에 서 있던 조 차장과 박 차장은 우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둘이 아는 사이야?”
“그래. 둘이 무슨 사이인데 이렇게 반가워해?”
그들의 말에 나와 그녀는 동시에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닙니다.”
조 차장은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인사나 하자. 여기는 박민식 차장. 그리고 여기는 우리 회사 민지훈 과장.”
나는 박 차장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내 인사를 받은 후 조 차장에게 물었다.
“근데 너희 과장이 우리보다 나이 얼마 안 어렸지 않나? 이분이었나, 내가 착각하는 거냐?”
“아… 박지웅 과장? 아니야. 박 과장은 이번에 학회 안 왔어. 여기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민 과장이야.”
“아! 그 스카우트로 멀리서 서울 올라왔다던 그 과장? 아이고, 반가워요. 궁금했었는데.”
그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손을 뻗어 내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차장님.”
“하하. 나한테 부탁할 게 뭐 있나. 앞으로 종종 봐요.”
“넵.”
박 차장은 이미 나를 알고 있었던 모양.
같은 업계라서 소문이 났던 건가?
아니면 조 차장과 친분이 있어 알고 있는 건가?
광주가 아니고, 드넓은 서울 땅에서도 소문은 역시 빠르구나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박 차장은 나와 조 차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는 한민아 과장. 우리 회사 에이스야.”
“박 차장님도 참. 제가 에이스인 거 벌써 알리시면 어떻게 해요. 하핫.”
그녀는 수줍어하지도 않고, 당당한 미소를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반가워요. 조성철 차장입니다. 민식이한테 이야기는 몇 번 들었어요.”
“반갑습니다. 저도 차장님께 말씀 많이 들었어요.”
“우리 민식이가 제 이야기도 하나요?”
“그럼요. 코리아 메디컬에 친구 있다고 저한테 몇 번 말씀하셨어요.”
박 차장은 양손을 뻗어 보이며, 우리에게 외쳤다.
“이럴 게 아니라, 우리 앉아서 이야기할까? 다리 아프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의 자리에 함께 착석했다.
한민아 과장.
그때 용산역에서 마주쳤을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다시 보니 그녀는 나이가 꽤 어려 보였다.
아무리 많게 봐야 나와 동갑 정도?
그런데 나와 마찬가지로 과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녀는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반가워요. 민…지훈 과장님?”
나는 그녀의 손에 내 손을 포개어 올렸다.
“예, 여기서 뵈니까 새롭네요. 한민아 과장님.”
그녀는 내 손을 맞잡고 흔들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로 조 차장에게 물었다.
“차장님. 그런데 어디 메디컬…….”
“아! 내가 메디컬 이름을 이야기 안 해줬구나. 너무 당연해서. 하하. 여기는 거대 메디컬이야.”
“네? 거대 메디컬요?”
거대 메디컬.
한국에서 탑급인 대기업 메디컬이자, 항상 우리와 라이벌 관계인 그곳.
자가혈 주사 총판도 거대 메디컬에 빼앗길세라, 내가 기를 쓰고 받아왔었다.
게다가 얼마 전, 주옥 병원 역시 거대 메디컬과의 경쟁 속에서 조 차장과 내가 영업 성공을 거뒀었지.
그런데 이렇게 거대 메디컬 직원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라니.
내가 서울이고 대기업이라 크고 깊게 생각했었다.
생각해 보면 광주에서 일을 할 때에도 항상 라이벌로 생각하는 메디컬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회사 직원들과 앙숙이지는 않았었지.
회사끼리야 라이벌 관계인 것이지, 실제로 직원들끼리는 친목을 다지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는 성격이 조금만 맞아도 친해지기가 쉽다.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는 회사 안에서밖에 만나는 일이 없다.
그러나 타 메디컬 직원은 병원에 영업 갔다가 마주치는 일이 꽤 많은 편이다.
그렇게 한두 번 마주치다 보면 얼굴을 익힐 수밖에 없다.
병원 앞에서 담배라도 몇 개비 피우며 몇 마디를 주고받으면, 친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박 차장은 내가 되묻는 말에 허허 웃으며 답했다.
“거대 메디컬이랑 코리아 메디컬 직원이 친구라니까, 웃기죠?”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보기 좋으신데요? 두 분은 어떻게 친해지시게 된 건지 여쭤봐도 됩니까?”
내 말에 조 차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예전에 한 회사 식구였어. 둘 다 완전 생 신입일 때였지. 지금은 없어져 버린 작은 메디컬 회사. 그때, 우리 진짜 영업 못 해서 매일 술 마셨었는데. 기억나냐, 민식아?”
“하하하. 그래. 우리 진짜 일 못 했었어.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큰 회사에 차장까지 올라왔냐. 그것도 이렇게 해외에서 각자 회사 이름 달고 와서 만나니까, 신기하다.”
“그러게. 그때 우리가…….”
조 차장은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처음 봤다.
조 차장의 저런 모습.
아이같이 신나서 떠드는 모습, 그리고 저렇게 내내 활짝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모습.
그에게 저런 면도 있구나, 싶었다.
조 차장과 단둘이 있을 때는 한 번도 나누지 않았던 사적인 이야기.
조 차장과 박 차장의 추억 이야기라 공감은 되지 않았지만, 즐거웠다.
그렇게 우리는 분위기에 취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조 차장과 박 차장은 자연스레 일어나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무슨 할 이야기가 있는 모양.
테이블에 남은 건, 한민아 과장과 나 둘뿐이었다.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들이 자리를 벗어나자마자 그녀가 내게 말을 건넸다.
“민지훈… 민지훈 과장님 맞죠? 성함이?”
“네, 맞아요.”
“그날 도와줘서 고마웠어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아니었어도, 누구나 그렇게 도와드렸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만나게 되네요?”
“그러게요. 근데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니까 엄청 반가운데요?”
“하긴. 같은 직종에서 일할 거라고 상상도 못 했는데, 한국도 아닌 여기에서 만나니까 신기하긴 하네요.”
그녀는 앞에 놓인 맥주를 들었다.
그녀와 잔을 부딪친 후,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었거든요. 달려가시는 뒤통수에다가 대고 크게 외쳤었는데. 하하.”
그녀는 시종일관 눈웃음을 지은 채로 내게 말했다.
“제가 그때 기차 시간이 촉박해서, 급하게 달려갔어요.”
“그러셨구나. 급하신 것 같더라고요. 감사 인사를 그때 못 전해서 마음에 걸렸었거든요.”
“아니에요. 항상 조심하셔야 해요. 그런 쓰레기 같은 놈들 때문에 조심하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좀 그렇긴 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런 세상이 되어버렸네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녀는 내 말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내가 실수를 한 건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잔소리하니까 꼭 우리 아빠 같아요, 민 과장님.”
“아……. 아버지라면,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민 과장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과장치고는 너무 젊으신 것 같은데? 그냥 동안이신 건가?”
“저는 32살이요.”
그녀는 헉 소리를 내며, 놀라고는 곧장 입을 열었다.
“32살이요? 그렇게 어리세요? 과장이라면서? 역시 실력이 좋으시기는 한가 보네요. 아까 들어보니까 스카우트 돼서 코리아 메디컬로 오셨다더니.”
“하하. 아닙니다.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러는 한 과장님이 더 어려 보이시는데요?”
“저요? 저는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어려요. 31살!”
그녀는 손가락을 펴서 31살이라는 표시를 내게 보였다.
“예? 31살이요?”
나는 그녀의 나이에 깜짝 놀라 재차 되물었다.
“왜요? 생각했던 것보다 많다는 거예요? 아니면 생각했던 것보다 적다는 거예요?”
“더 어려 보이세요! 그리고 31살에 과장하고 계신 것도 대단하시고요.”
“뭐, 제가 일을 잘하니까 벌써 과장 달았겠죠?”
그녀는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과 함께.
그녀를 마주한 지 한 시간이 되어가는데, 그녀는 여전히 밝고 활기찼다.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매력이 있는 것 같은 한 과장.
나이를 떠나, 여자인 데에도 메디컬 영업직을 하고 있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대단하세요. 메디컬에서 영업직, 여자가 하시기 힘들었을 때도 많으셨을 텐데…….”
여자가 메디컬 영업에서 힘든 이유.
영업이라는 건 사람과의 소통이다.
모르는 사람과 말을 해야 하고, 그저 말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얻어 내야 하는 것이지.
그런 점에서 여자와 남자 중 누가 더 일을 잘한다고 구분 지을 수는 없다.
영업에서 성별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지.
하지만 메디컬 영업에 유독 남자 직원이 많은 이유.
바로 의료 기기라는 특성 때문이다.
의료 기기 자체가 워낙 무겁기도 하고, 특히 우리 정형외과 병원 쪽에는 의사들이 절반, 아니 대부분이 남자 의사이다.
여자 의사를 찾는 게 힘들 정도니까.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대하기 쉬운 남자 영업사원이 많은 편.
내가 이 업계에서 일하며, 여자 영업사원은 처음 보았다.
게다가 그런 그녀가 거대 메디컬과 같이 대기업의 과장이라는 직책까지 하고 있었고, 과장이라는 직책치고 나이까지 어렸다.
그녀에게서 놀랄 만한 포인트가 한두 가지를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제가 좀 여러 방면에서 대단하죠?”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게 답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잠시의 정적도 없었다.
그저 어색함을 채우기 위해 쉴새 없이 말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었다.
한 과장과 말을 할수록, 그녀에게 궁금한 점이 생겼고 그녀 또한 내게 궁금한 점이 많은지 질문을 쏟아냈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한 과장이 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겠구나.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한참을 대화 나누던 그녀는 고개를 사선으로 꺾으며 내게 말했다.
“민 과장님.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나는 그녀의 제안에 망설일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서울에 올라와서 다른 메디컬 직원과 친분이 생겼던 적이 없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직 나는 코리아 메디컬에도 적응 중이었으니까.
다른 메디컬 직원과 친분을 쌓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래요. 서울에서 제 첫 번째 타 메디컬 지인이세요, 한 과장님이!”
그녀는 내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전남 영광입니다!”
“네?”
“영광이라고요. 하핫.”
그녀의 아재 개그.
하지만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하자, 분위기가 싸해지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으. 한 과장님이 어떻게 영업하시나, 영업 노하우가 뭘까 했더니만. 이런 개그 코드라는 거죠?”
“아니에요. 제가 제대로 개그 코드 보여드리면 놀라실걸요? 하핫.”
거대 메디컬 직원들과 한참의 수다 끝에 자리가 마무리됐다.
그마저도 내일 있을 학회 때문에 황급히 마무리한 자리였다.
* * *
다음 날, 긴장되는 마음으로 학회로 출발했다.
입구에 들어서며 느낀 건, 이번 학회가 내가 그동안 갔던 학회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규모가 너무 커서 입구에 있는 부스 지도를 보지 않으면 목적지를 찾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반나절을 넘게 학회를 보던 조 차장과 나.
그러다가 사람들이 하나둘 빠지기 시작하고 우리는 드디어 안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보이는 낯익은 사람.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어? 저 사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