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서정우 부장의 말에 조성철 차장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예? 주옥 병원에 데려가라는 말씀이세요?”
그의 말에 서 부장은 곧장 입을 열었다.
“응. 민 과장 보니까, 이제 큰 병원으로 영업 가는 게 맞는 것 같아. 특히나 이번 주옥 병원은 중요한 건이잖아. 가서 조 차장이 한번 경험시켜 줘.”
조 차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 주옥 병원, 꼭 영업 성공해야 한다. 거대 메디컬에 빼앗길 수는 없잖아?”
조 차장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에게도 주옥 병원의 중요성을 알려주려는 듯한 표정.
“네. 꼭 성공해 오겠습니다.”
굳은 표정의 조 차장의 말을 끝으로 회의는 마무리됐다.
회의가 끝나고, 부장들부터 자리에서 한 명씩 일어나기 시작했다.
“민 과장. 잠깐 남아 봐.”
나를 부르는 조 차장.
“넵.”
아무래도 주옥 병원 때문에 나를 불렀을 터.
그의 부름에 나는 그대로 자리에 남았다.
직원들은 나와 조 차장을 바라본 뒤,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민 과장.”
“예, 차장님.”
“창상 피복제 물건, 우리는 두 가지 제품으로 가져갈 거야.”
그는 내게 제품의 카탈로그를 내밀었다.
회의를 위해 준비해 온 모양.
“그리고 우리 회사가 거대 메디컬이랑 라이벌인 건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말이 라이벌이지, 윗선에서는 라이벌이라고 생각 안 해. 거대 메디컬을 우리 라이벌로 생각해 주기도 싫어하니까 말이야.”
조 차장은 검지를 뻗어 위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절대 빼앗기면 안 돼.”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알고 있다.
우리 회사와 거대 메디컬이 자주 부딪친다는 것을.
하지만 그런 경쟁에서 이겼던 건 항상 우리 코리아 메디컬이었다.
그래서 이번 싸움에서도 거대 메디컬은 보다 센 수를 던질 것이다.
이런 제품 경쟁에서는 오로지 단 하나, 단가 싸움뿐이다.
“네. 그럼 저희도 단가로 밀고 나가시는 겁니까?”
“그렇지. 마진이 많이 남아야 좋지만, 마진이 적게 남더라도 우선 납품할 수 있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해. 거기서도 무조건 금액 가지고 나설 거고.”
우리가 금액을 낮추면, 거대 메디컬도 금액을 낮추고, 또 우리도 금액을 낮추고…….
거의 경매와 다를 것이 없다.
경매는 물건을 갖기 위해 서로 금액을 높게 부르며 돈으로 싸움을 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금액을 낮춘다는 게 다르지만, 그래도 그 최후의 1명 안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건 매한가지.
“단가 싸움이라는 게, 결국은 서로 피해를 보는 건데 말입니다.”
“그렇지. 그런데 별수 있겠냐. 그렇게라도 낮추지 않으면 지는 싸움인데.”
서로 금액을 낮추다가 먼저 자신들이 정한 마지노선에 금액이 걸린 사람이 지는 싸움.
단, 서로의 제품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방의 금액이 얼마나 깎이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저 감으로 하는 것이지.
그래서 경험이 많은 조 차장이 주옥 병원의 담당을 맡게 된 것.
조 차장은 아랫입술을 내밀며 내게 말했다.
“근데 이미 내가 몇 번 영업 갔던 터라, 민 과장이 따로 할 일은 없을 거야. 서울에서 아직 큰 병원은 많이 못 가봤을 테니까, 가서 한번 지켜봐.”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제품 영업하러 가는 거니까, 이 두 가지 제품 모두 숙지해 놔. 오후에 병원 가야 해.”
“예.”
나는 그가 건네준 카탈로그를 받아들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지이잉.
자리에 돌아오자 울리는 전화.
김사랑 원장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원장님!”
- 민 과장님! 어디야?
“저 사무실이죠. 병원이세요?”
- 응, 나도 일하고 있지. 우리 병원은 언제 올 거야?
“와. 적응 좀 한 뒤에 부르겠다고 하시더니, 벌써 적응 끝나신 거예요?”
- 그럼, 내가 누군데. 하하. 놀러와. 아니, 영업하러 와.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
모던 정형외과에서 근무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확실히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니 활기를 찾은 모양.
나는 그녀가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힘들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많이 했었다.
처음에 광주에 내려왔을 때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밝은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다행이다.
“정말요? 영업 가면 제 물건 써주시는 겁니까? 하하.”
- 음… 서울에서 민 과장님의 영업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부터 확인하고?
“하하. 예, 알겠습니다. 영업 실력 한번 보여드려야겠는걸요?”
- 좋아. 나 오늘은 오후에 진료가 밀려서 안 될 거 같고, 내가 보고 싶은 제품 문자로 보낼 테니까 챙겨서 내일 와줘.
“네. 내일 제품별로 전부 다 챙겨서 가겠습니다!”
- 응. 고생해.
김 원장과의 통화를 끊은 후, 나는 여전히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녀가 이제야 맞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주옥 병원 앞.
얼마나 큰 병원이길래 서 부장이 나를 조 차장에게 붙여 놨을까? 하고 생각했다.
주옥 병원은 정형외과만 있는 병원이 아닌, 종합병원이다.
그래서 규모 자체가 어마어마했다.
나는 그 규모에 입을 떡 벌리며 조 차장에게 말했다.
“진짜 병원 크네요, 차장님.”
“그렇지? 그러니까 이 병원에 납품 시작해야 해. 거대 메디컬에서 먼저 선점하지 않게 하려면.”
“네.”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그와 함께 병원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똑똑.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조 차장 왔어?”
“예, 여기는 저희 회사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조 차장의 짧은 소개가 끝나자마자 나는 허리를 접었다.
“안녕하십니까.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원장.
“예, 반가워요. 그런데 갑자기 한 분이 더 왔네?”
조 차장은 내게 의자를 가리켰고, 자리에 앉으며 원장에게 답했다.
“예. 주옥 병원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와보고 싶다는 직원이 한둘이어야죠. 게다가 원장님처럼 대단하신 분 뵈러 오는데, 제가 후임한테 자랑 좀 하고 싶어서 데리고 왔습니다. 하하.”
조 차장이 병원에서 원장을 대하는 모습은 지금 처음 대면했다.
그는 내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항상 표정이 없었다.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아주 가끔 옅은 미소만을 보였었지.
자신밖에 모르는 마이웨이 성향이 가득한 조 차장.
그는 병원에 갔을 때, 대체 어떤 식으로 원장들에게 멘트를 던질까?
어떤 표정과 말투로 대화를 주고받을까?
이런 생각들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역시, 경력은 속일 수 없는 것.
그의 한마디에 앞에 앉은 원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네도 참. 하하하.”
“제가 이 바닥 생활이 오래됐지만, 원장님만큼 젠틀하신 분을 만나는 게 정말 손에 꼽거든요. 오늘 후배한테도 좋은 자랑하고 싶습니다.”
“어휴. 조 차장, 진짜 사람이 이렇게 능글맞다니까? 하하. 알겠어, 내가 오늘 조 차장 물건 한번 잘 봐줘야겠네. 후배님도 데리고 오셨으니까.”
금세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뀐 진료실.
연달아 며칠을 이 병원에 왔던 조 차장은 자연스레 견적서를 내밀었다.
“원장님. 말씀하셨던 제품과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은 제품의…….”
그들의 대화에 시간은 몇십 분이 훌쩍 흘러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하지만 전혀 지루하거나 딴청을 피울 새도 없었다.
오전 내내 공부했던 제품이었고, 내용을 복습하는 듯이 조 차장의 말솜씨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원장님. 이 제품은 12만 원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조 차장은 주옥 병원 원장에게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12만 원.
우리가 준비해 온 두 가지의 제품.
그중 하나의 제품 금액에 대해 확정 짓듯이 말하는 조 차장.
그가 말하는 금액은 미리 정해 온 마지노선 금액이 아니다.
우리의 마지노선 금액은 9만 원.
조 차장은 그 금액을 정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높은 금액을 제시한 건 단순히 반응을 보기 위해 던진 것이 아니다.
영업에서 금액적인 부분으로 협상을 하려고 할 때 사용하는 방법.
바로 ‘앵커링 효과’이다.
배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닻’을 내린다.
그 닻과 배를 연결한 유일한 줄은 밧줄뿐.
밧줄이라는 범위에 한해서만 배가 앞뒤로 움직일 수 있다.
그 밧줄이라는 범위처럼, 처음에 제시한 숫자, 그러니까 그 금액이 기준점이 되는 것이지.
처음 그 기준점이 상대방에게 가장 인상적인 금액으로 머릿속에 남게 된다.
이후의 금액 싸움에서 편파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
지금 조 차장이 던진 금액은 12만 원.
원장은 거대 메디컬과의 금액을 머릿속으로 비교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의 금액이 조정될 수 있다는 것쯤 또한 예상할 터.
12만 원이라는 금액의 기준 안에서 원장은 고민할 것이다.
그보다 더 저렴한 금액을 유추하더라도, 기준이 12만 원이 되어버렸기에 확 낮은 금액을 예상하지는 못하고 있을 것.
“12만 원이라……. 거대 메디컬에서도 창상 피복제 가지고 온 건 알고 있지?”
원장은 조 차장에게 패를 던졌다.
거대 메디컬과 금액적으로 싸움을 붙이려는 것일까?
조 차장은 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거대 메디컬이 오전에 왔다가 갔거든. 거기서는 딱 한 제품만 가지고 왔더라고.”
“한 제품만요?”
거대 메디컬에서는 무슨 자신감으로 단 한 가지의 제품만을 들고 왔을까?
다른 메디컬 여러 곳이 동시에 영업하는 와중에 원장에게 선택권도 없게 단 한 가지 제품만을 들고 왔다니.
대체 단가를 얼마까지 낮춰서 왔을까?
원장과 조 차장의 대화는 계속됐고, 나는 귀로는 그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대화에서 나는 제3 자의 입장처럼 옆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눈으로는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하나.
원장 팔 아래 깔려 있는 종이 한 장이었다.
팔에 가려져 있었기에 모든 내용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견적서가 확실했다.
다른 메디컬에서 주고 간 견적서가 분명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다는 표시를 하고 눈으로는 중간중간 견적서를 살펴보았다.
어디서 보낸 견적서인지는 아직 모르지만, 금액은 8만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체 어디서 보낸 거지?
금액적인 부분으로는 너무 저렴했기에, 메디컬 이름이 중요했다.
종이 위에 작게 회사 로고가 있었는데, ‘거대’라고 적힌 로고 같았는데 확실하지는 않았다.
순간, 원장의 손이 슬쩍 움직이며 조금 전 보았던 8만 원이라는 글자가 가려졌다.
그리고 보이는 메디컬.
‘거대 메디컬’이라고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맞다. 거대 메디컬에서 보낸 견적서 8만 원.
나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8만 원이라면…….
우리에게는 금액적으로 승산이 없다.
우리의 마지노선 금액은 9만 원.
사실상 9만 원도 정말 세금만 남다시피 남겨둔 마진율 금액이다.
우리가 거대 메디컬보다 싸게 줄 수 없는 이유는 우리와 거대 메디컬이 다른 제품으로 경쟁을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승산이 없는 싸움으로 원장과 금액으로 줄다리기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다음에 주옥 병원에 또다시 영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입씨름하며 금액을 낮추려고 하다가, 결국은 금액을 충족시키지 못해 영업에서 실패한다면 다음에 우리를 찾지 않을 것이니까.
나는 견적서를 본 이후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조 차장은 이 진료실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불안에 떠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9만 원이라는 금액까지 낮출 것이다.
하지만 원장이 금액 이야기를 딱히 꺼내지 않았다.
비싸다는 이야기도, 싸다는 이야기도, 그리고 거대 메디컬과 금액 비교도 시작하지 않았다.
그저 거대 메디컬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묘수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원장을 바라보았다.
[이거랑 거대 메디컬 제품 중에 어떤 게 더 환자에게 좋을까? 고민되네……. 금액을 떠나 회복이 더 빠른 제품이 훨씬 낫기는 할 텐데…….]
원장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당연히 우리는 회의 때부터 금액 싸움만 생각하고 작전을 짰으니까.
하지만 원장은 금액보다는 제품의 질에 관심이 있다.
나는 여기서 승부수를 띄우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비집고 들어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저… 죄송하지만, 제가 한 말씀 드려도 괜찮을까요?”
내 말에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 새로 온 젊은 직원 말도 좀 들어볼까?”
내 말에 조 차장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조 차장을 쳐다보지 않은 채 원장에게 말했다.
“저희 단가, 더 낮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