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오셨습니까?”
오늘은 코리아 메디컬 근처 카페가 아닌, PR 메디컬 신승철 팀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내 요청대로 PR 메디컬에서는 우리 코리아 메디컬 외에는 아무 곳에도 총판 컨택을 하지 않았다.
내가 보낸 자료를 검토한 후, 우리 회사에서 영업할 병원 리스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그때 거대 메디컬 쪽으로 자료를 보낸다고 내게 투명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최대한 빨리 자료를 정리해 그에게 보냈다.
거대 메디컬 쪽으로는 애초에 연락도 보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내가 그에게 다가가며 이야기하자, 신 팀장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도 방금 왔습니다. 어서 앉으시죠. 커피는 제가 방금 아메리카노 주문해 뒀는데, 괜찮으실까요?”
“그럼요.”
“민 과장님의 빠른 진행 덕분에 수월하게 보고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신 팀장님 덕분에 지금 총판 계약까지 하러 왔는걸요.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자료대로 영업 진행해 주신다면, 저희야 굳이 거대 메디컬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던 자료더라고요. 그대로 영업 진행 부탁드립니다.”
그는 내가 보낸 자료를 꺼내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대로 영업 성공해야 저희 쪽도 자가혈 주사 많이 팔 수 있으니까요. 믿고 맡겨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신 팀장은 가방에서 챙겨온 파일 하나를 더 꺼냈다.
그가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린 것은 ‘코리아 메디컬 총판 계약서’라고 커다랗게 적힌 종이.
큰 글씨로 뚜렷하게 출력된 표지를 시작으로 여러 장의 종이가 클립에 집혀 있었다.
신 팀장은 그 종이 묶음을 투명 파일에서 조심스레 꺼내며 입을 열었다.
“과장님. 제가 총판 계약 서류는 가져왔는데, 한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조항 보시면…….”
나는 그의 말에 따라 서류를 하나하나 체크하며 경청했다.
앞에 놓인 커피가 바닥을 보일 때쯤 끝난 설명.
“계약서는 제가 2부 출력해 왔으니, 다시 한번 검토해 보시고 이상 없으시면 도장 날인해서 저희 쪽으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네. 우선 사무실에서 재차 확인해 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 연락 주시면 납품 일자는 추후에 잡는 거로 할까요?”
“그러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일어나실까요?”
신 팀장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앞에 놓인 서류를 다시 투명 파일에 집어넣은 후 내게 건넸다.
“아직 계약서 도장은 찍기 전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가 내민 파일을 받아들며 다른 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신 팀장도 곧바로 내 손을 맞잡으며 답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하하.”
신 팀장과는 카페 밖이 아닌 카페 안, 자리에서 헤어졌다.
그의 휴대전화가 계속 울리는 탓에 신 팀장은 급하게 먼저 카페를 나섰다.
신 팀장이 일어난 후 나도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 문을 열었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며 달려 있던 종이 울렸고, 내가 문을 나오는 순간, 내 앞을 쌩하고 급하게 지나가는 한 사람.
정장을 쫙 빼입고 커다란 백팩을 멘 남성은 뭐가 그리 급한지 거의 달려가다시피 내 앞을 지나갔다.
내가 카페를 급하게 나온 것도 아닌데, 그 남성과 거의 부딪힐 뻔했으니까.
놀란 나는 턱을 당기며 몸을 뒤쪽으로 움츠렸다.
“깜짝이야.”
그리고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튀어나온 한마디.
홱 하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니, 이미 멀어져 가고 있는 그.
무슨 급한 일이길래 저렇게 빨리 가는 거지?
부딪히지는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바닥에 보이는 짙은 초록색 수첩 하나.
조금 전 급히 걸어간 남성에게서 떨어진 듯 보였다.
그렇게 확신했던 건, 내가 방금 카페의 유리문을 나서기 전,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았으니까.
나는 주변을 살펴본 뒤 곧장 몸을 숙여 그 수첩을 집어 들었다.
수첩을 뒤집어 보니 다름 아닌 ‘여권’이 아닌가.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분명 한국인이었던 것 같았다.
아니, 여권의 색만 보아도 그가 한국인이라는 건 알 수 있다.
보통 한국 사람이라면 평소에 여권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는다.
분명 출국을 하려는 사람이거나 막 입국을 했다는 뜻일 터.
혹시나 급한 발걸음으로 걸어간 것이 출국 때문이라면?
그에게 이 여권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수첩을 쥔 채 남성이 걸어간 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달려갔던 것은 아니었기에 잠깐의 달리기를 하니 금방 그 남성을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정장 차림에 백팩을 메고 있는 사람.
“저기요!”
나는 멀리 있는 그를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내 목소리에 나를 바라보았고, 그 역시 뒤를 돌았다.
하지만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미간을 찌푸렸다.
“저요?”
“네!”
나는 조금 더 달려가 그의 앞에 서서 헐떡이던 숨을 빠르게 내쉬었다.
헥헥거리며 여권을 내밀자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세요?”
“저기, 이거 떨어트리고 가셨어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 말했고, 그는 급히 메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돌려 안을 뒤적였다.
“어? 내 여권!”
그제야 내가 들고 있는 여권을 받아드는 그는 재빨리 여권 안을 살펴보았다.
“제 여권 맞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여권을 든 채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아까 카페 앞에 흘리고 가셨길래, 급하게 쫓아왔어요.”
“아,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여권 잃어버렸으면 진짜 큰일 날 뻔했어요.”
그의 손에는 캐리어 하나 들려 있지 않았지만, 커다란 백팩을 보니 출국을 하는 게 맞는 모양.
“해외 나가시는 길이신가 봐요?”
“예. 이제 공항 가려고 했는데, 어휴. 정말 여권 잃어버렸으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아마 다른 분이 발견하셨어도 도와드렸을 거예요. 하하. 그럼 조심히 가세요!”
나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 눈인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내 팔을 붙잡았다.
“저기…….”
“네?”
나는 내 팔을 잡는 그의 손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았다.
“제가 정말 정말 감사해서 사례라도 하고 싶은데…….”
그의 표정을 보니 진심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여권을 찾아준 사람을 본다면 뭐든 해주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권을 발견하고 사례를 받겠다는 생각은 단 1초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권임을 확인하는 순간 달린 것이지.
나는 팔을 잡은 그의 손을 살며시 내려놓은 뒤,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제가 사례를 바라고 온 것도 아니고요.”
“그래도… 정말 감사해서요.”
처음 보는 낯선 사람.
그의 인상은 매우 선해 보였다.
그에게서 진심으로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보답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어서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도 그는 대답 없이 가방을 뒤적였다.
무언가를 찾는 모양.
그러더니 잠시 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선생님. 제가 바로 출국을 해야 해서 가지고 있는 게, 카드와 달러뿐인데……. 저, 명함이라도 한 장 주시겠습니까?”
“정말 괜찮습니다. 다음에 다른 분 도움 드릴 일 생기시면 그걸로 갚아주세요.”
그제야 그는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 어? 메디컬 근무하시나 봐요.”
“네?”
내가 메디컬에서 근무를 하는지 어떻게 알았지?
나는 놀라 그를 바라보았고,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내 한쪽 손에 들려 있는 파일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 PR 메디컬에서 받은 ‘코리아 메디컬 총판 계약서’.
표지를 보고 말한 모양이다.
“아… 네.”
“코리아 메디컬…….”
그는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그러더니 이내 내게 재차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선생님, 제가 비행기 시간 때문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예, 여권 조심하시고요!”
“네.”
누군가의 불행이 될 뻔한 일을 내가 막아냈다는 생각에 나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 미소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기에 지어지는 것도 있지만, 내 손에 들려 있는 계약서 때문인 게 크다.
내가 광주 메디컬에 이어 PR 메디컬 총판을 연달아 해냈으니까.
게다가 코리아 메디컬에 온 이후, 아직 큰 성과를 보인 것은 ‘율한 정형외과’뿐이었다.
물론 영업하기 힘든 병원을 해냈기에 주변에서도 슬슬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는 연달아 성과를 쭉쭉 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
스스로에게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내려놓기 위해서.
내 실력을 의심하는 몇몇 직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앞으로 더 많은 결과를 내도록 애쓸 것이다.
* * *
“안녕하십니까.”
이른 아침.
평소 출근 시간보다 10분은 더 일찍 사무실로 도착했다.
공식적으로 정해진 회의가 아니라, 부장 직책까지만 참여하는 회의.
그래서 이날은 근무 시간보다 조금 일찍 회의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윗선에서는 근무 시간을 잡아먹으며 회의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 뒤로 몇몇 직원이 더 들어오고, 우리는 서로 짧은 인사를 나눈 뒤 곧장 회의실로 들어갔다.
“민 과장. PR 메디컬 자가혈 주사 총판 따냈다는 거 사실이야? 오늘 아침에 조 차장한테 들었는데.”
서정우 부장은 회의실이 떠나갈 듯이 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내가 총판을 따왔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기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
나는 그의 말에 곧장 허리를 세우고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계약서 올렸는데, 확인해 주시면 바로 성사됩니다.”
“하하하. 진짜 대단한데?”
서 부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노트에 연신 동그라미를 치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니 내 이름, ‘민지훈’이 쓰여 있었다.
내 이름에 무언가 표시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침부터 아주 기분이 좋네, 좋아. 앞으로 더 많은 성과 보여줘.”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서 부장의 칭찬에 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붙잡았다.
이 칭찬에 너무 기뻐해서는 안 된다.
주변을 살펴보니 내게 엄지를 치켜드는 직원들.
그리고 그와 상반된 반응을 보이는 직원들도 있었다.
뻔하다, 그 인물들.
김석구 차장과 강대훈 대리.
그들은 그저 표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체 그걸 어떻게 해낸 거지? 하는 듯이.
회의는 내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이후로도 한참 진행됐다.
부장까지만 참석하는 회의다 보니, 사원들까지 의견을 주고받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래인 사원 직책부터 영업 계획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지나 조성철 차장의 차례.
“저는 지금 작업 중인 주옥 병원에 지속적으로 가볼 예정입니다. 서 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거대 메디컬도 작업 중인 거로 확인됐습니다.”
조 차장의 말에 서 부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거대 메디컬도 영업 중인 게 맞았네.”
“네. 주옥 병원에서 창상 피복제 제품을 구한다는 소식이 돌자마자 바로 붙은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유현수 부장이 입을 열었다.
“거대 메디컬……. 만만치 않을 텐데, 밀리면 안 돼.”
“예, 오늘 오후에 병원 들어갈 예정입니다.”
조 차장의 말에 유 부장은 자신의 턱을 괴며 물었다.
“계획은?”
“단가죠. 아무래도 같은 제품으로 들어온다면, 단가 싸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 우리 창상 피복제 제품 마진율 괜찮은데, 단가 싸움 시작되면 마진율 툭 떨어지겠네.”
창상 피복제 제품을 구하는 주옥 병원.
우리 코리아 메디컬과 거대 메디컬은 같은 창상 피복제 제품을 주옥 병원에 영업 중이다.
물론 창상 피복제라는 건 그저 의료기기 종류의 하나다.
즉, 창상 피복제가 시중에 나와 있는 제품의 가지 수가 엄청나게 여러 가지라는 뜻이지.
그래서 우리 회사와 거대 메디컬은 똑같은 제품을 영업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같은 종류의 품목으로 경쟁하는 것.
치료하는 목적만 같은 것이지, 만든 제조사가 다르니 엄연한 다른 제품이다.
이럴 경우, 제품의 성능과 단가로 의사의 선택이 갈린다.
하지만 너저분하게 단가 싸움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서로 경쟁하는 것을 알다 보니, 자신이 영업하는 제품이 채택되게 하기 위해 단가를 계속해서 낮추게 된다.
상대 거래처보다 낮게 말이다.
그렇게 서로 금액을 낮추다 보면 결국은 마진율이 적어지게 되는 것.
“하지만 이럴 때 방법이 금액적인 부분밖에…….”
조 차장은 유 부장을 향해 답했고, 답은 그의 옆에 있던 서 부장이 말했다.
“조 차장. 이번에 주옥 병원 영업 건, 민 과장 데리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