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내 묵직한 한마디에 신 팀장은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입을 열기 전, 나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가혈 주사 기구. 제가 서울 전역에 더 많이 깔아보겠습니다.”
그러자 신 팀장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역시 민 과장님이시네요.”
신 팀장의 말에 내가 눈썹을 들썩이자,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희가 코리아 메디컬과 거대 메디컬 두 군데 컨택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민 과장님께서는 광주 메디컬에 계실 때, 저희와 일을 하셨으니까 일하기가 훨씬 나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요.”
“맞습니다. 팀장님과는 업무를 직접 해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총판 경험도 있지 않습니까. 믿고 총판 맡겨주신다면, 좋은 성과로 보답하겠습니다.”
자가혈 주사는 이미 코리아 메디컬에서도 사용을 하고 있는 제품이다.
담당 병원들도 몇 군데에서는 사용하고 있고, 그리고 더욱 늘려갈 추세인 것도 알고 있지.
여기에 총판을 따오게 된다면, 우리 코리아 메디컬이 서울에서 공격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다른 업체보다는 경쟁력이 있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총판을 따내지 않으면 코리아 메디컬의 라이벌인 거대 메디컬 쪽으로 넘어갈 터.
모르면 몰랐어도 이미 알아버린 지금,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게다가 신 팀장이 내게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나에게 먼저 기회를 주려는 것이겠지.
“오전에 민 과장님과 통화한 후에 윗선에 보고 올렸거든요. 민 과장님이 코리아 메디컬에 계시다고 했더니, 다들 놀라시더라고요. 대단하시다고.”
“하하.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도 웬만하면 코리아 메디컬과 했으면 합니다. 저희가 총판에 드리는 단가야 이미 아시기도 하고, 제품도 민 과장님이 가장 잘 아시니까요.”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죠.”
“다음 주에 병원 리스트들 정리해서 한번 보내주셨으면 해요. 아마 다른 직원도 거대 메디컬에 컨택을 보내기는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아직 컨택을 시도하지는 않으셨다는 거죠?”
신 팀장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이제 주말이라 다음 주 초에 연락할 것 같긴 한데…….”
“그럼 거대 메디컬 컨택 전에 저희 코리아 메디컬만 보고 평가해 주셨으면 하는데, 가능할까요? 총판으로 잡기에는 부족하지 않도록 병원 준비해 보겠습니다.”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내 말에 신 팀장은 잠시 말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자신감이 넘치는 내 태도에 순간 고민스러운 모양.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쐐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저희 지금 업계 1위입니다. 아무리 거대 메디컬이 치고 올라오려고 해도 오르지 못할 겁니다. 제가 그렇게 되도록 노력할 거고요. PR 메디컬도 서울에 하나뿐인 총판을 잡으시려는 거면 당연히 업계 1위와 손잡는 게 나으실 겁니다.”
회사에 대한 나의 어필이 끝나자, 그는 내 눈을 피하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보였다.
커피를 연달아 몇 모금 들이켜던 신 팀장은 이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쨌든, 오늘 제가 민 과장님께 총판 제안을 하러 온 자리니까요. 우선 서류 주시고 검토 넘어가는 동안 거대 메디컬과의 컨택은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예, 저도 좋습니다.”
“대신 총판 선택은 제 몫이 아닙니다. 과장님도 아시다시피, 저도 일개 직원이잖습니까. 윗선에서 결정되는 일이고, 저는 컨택하는 데에서 끝나다 보니…….”
“네. 신 과장님의 안목이 맞단 걸 제가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병원 리스트 제대로 준비해서 다음 주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봐 주십시오.”
그는 그제야 입꼬리를 올렸다.
“알겠습니다. 자료 기다리겠습니다. 저도 제가 컨택하는 코리아 메디컬이 채택되는 게 좋죠.”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는 그 손을 덥석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잉.
그때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휴대전화.
지금은 이미 퇴근 이후의 시간이었다.
애초에 퇴근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에 신 팀장을 만나러 온 것이니까.
나는 그와의 자리가 마무리되지 않았기에, 전화를 받지 않은 채 살짝 들여다보기만 했다.
[발신인 : 모던 정형외과 김사랑 원장]
김사랑 원장이 지금 시간에 무슨 일이지?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 어둑어둑해지려는 지금.
신 팀장과 자리가 곧 마무리되기에 전화를 받지 않으려 했지만, 순간 불안한 마음에 전화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내 표정을 본 신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중요한 전화인 것 같은데, 받으셔도 됩니다. 자료만 다음 주에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다음 주에 자료 보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나눴다.
신 팀장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나는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민 과장님!
“김 원장님. 무슨 일 터졌어요?”
다급한 내 목소리에 그녀가 곧바로 답했다.
- 응.
짧은 그녀의 한마디가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네? 무슨 일이에요. 어딘데요?”
- 어딘 줄 알면 오게? 어쩜 서울 가더니 연락 한 번이 없냐?
“예? 무슨 일 생긴 거 아니에요?”
- 아니야. 내가 무슨 일이 생기겠어. 민 과장님이 서울 가고 나서 연락 한번이 없어서 내가 연락했지.
“하, 다행이다. 난 또…….”
- 왜, 그때 그 스토커라도 또 나타난 줄 알고? 하하. 연락이 하도 없으시니까!
그녀는 웃으며 내게 답했다.
맞다. 사실 그녀에게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긴장감을 가지고 전화를 받았으니까.
“미안해요. 서울 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 서울 간다고 할 때는 광주에서 자주 봤잖아. 근데 한참을 못 보니까 보고 싶더라고.
“네?”
그녀의 입에서 ‘보고 싶다’라는 말이 나와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러자 그녀는 웃지도 않은 채 내게 물었다.
- 민 과장님은 나 안 보고 싶었어?
진지한 그녀의 말투에 나는 에둘러 표현했다.
“저도 원장님이랑 광주에서 술 마시면서 놀 때가 재미있었죠. 하하.”
그러자 그녀는 내게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 그래. 나도 민 과장님이랑 술 마시고 놀던 게 그리워서 전화했지. 그럼 술이나 한잔하자.
“좋죠. 미리 연락드리고 조만간 광주 한번 내려갈게요.”
- 오늘 금요일인데, 광주 안 와?
“이번 주는 광주 못 갈 것 같아요.”
- 민 과장님. 밖인 거 같은데, 아직 퇴근 안 했어?
“아니요. 했어요, 방금.”
- 아, 그래? 어딘데? 사무실이야?
“아니요. 회사 앞쪽에 볼일이 있어서 카페 나왔었어요.”
- 카페 어디?
“말해도 모르시면서. 하하.”
집요하게 물어보는 김 원장.
그녀와 친해진 나는 툴툴거리는 말투로 농담처럼 답했다.
- 그래도 이름은 알지. 나 서울 사람이야. 어딘데?
“저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스벅이요.”
- 아, 거기? 알겠어. 그럼 어디 움직이지 말고, 그 카페 앞에서 잠깐만 기다려!
“네?”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뭐지?
내가 툴툴거렸다고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는 김 원장을 생각하며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곧장 그녀에게 재차 전화를 걸었다.
-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신호가 울리자마자 들려오는 안내음.
그녀가 내 전화를 거절한 모양.
뭐지?
김 원장이 광주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방금 통화 내용이 장난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카페 앞에서, 그러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그렇게 5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
“민 과장님!”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환하게 웃으며 소리치는 사람.
김사랑 원장이었다.
* * *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황당해하는 내 얼굴을 보며 그저 미소를 짓는 김 원장.
“자자, 다 설명해 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던 술 한잔이나 먼저 하자. 짠!”
그녀와 나는 술잔을 부딪쳤다.
김 원장에게 설명을 듣기 위해 나는 재빨리 술을 입에 털어 부었다.
“자. 이제 이야기해 줘요. 무슨 일이에요?”
“진짜, 민 과장님도 참. 안주는 먹고 하자. 하하.”
그녀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안주를 집어 들었고, 나는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울에는 무슨 일이지?
그리고 대체 왜 나에게 갑자기 찾아온 거지?
김 원장은 고개를 왔다 갔다 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내가 궁금해하는 게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이다.
“얼른 이야기해 주세요. 뭐예요?”
“뭐긴, 서울 온 거지.”
“그러니까 언제요? 오늘, 금요일은 원래 모던 정형외과 진료하시는 날이잖아요. 오늘 휴진 일 아닌 거로 알고 있는데?”
“민 과장님은 가만 보면 나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니까? 이러니까 내가 거기서 친구가 없어서 심심했지.”
그녀는 고개를 살살 가로저으며 내게 술을 따라 부었다.
“그럼 일요일에 다시 가시는 거예요?”
“가지 말고 계속 있을까?”
“출근 안 하세요?”
“월요일에는 당연히 출근하지.”
“에이, 깜짝 놀랐잖아요. 갑자기 이렇게 말도 없이 놀러 오시고! 제가 오늘 약속이라도 있었으면 어쩌시려고 이렇게 불쑥 오셨어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녀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는데, 내가 약속이라도 있었으면 못 만났을 거라 생각했기에 걱정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뭐, 민 과장님이 약속이 있었으면 내일 만나자고 했겠지?”
“그래도요.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제가 좋은 술집이라도 좀 찾아놨을 텐데…….”
“여기도 좋은데? 술 마실까?”
“그래요.”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술을 쭉 마셨다.
그리고 술잔을 내려놓자마자 나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민 과장님.”
“네?”
“나 월요일부터 출근해.”
나는 그녀의 당연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알죠.”
내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답했다.
“모던이 아니라, 행복 정형외과로!”
“네? 행복 정형외과요?”
나는 그녀의 말에 놀라 나도 모르게 볼륨이 높아졌다.
내가 이렇게 크게 놀라는 이유.
행복 정형외과는 모던 정형외과처럼 광주에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곳, 서울에 있는 행복 정형외과.
행복 정형외과는 서울에서도 엄청 유명하고 큰 병원이다.
거의 서울에서 탑급에 속하는 병원이지.
아니, 탑인 병원이다.
대학병원도 아닌데, 정형외과로는 대학병원만큼이나 환자가 많은 곳.
정형외과만 전문적으로 하는 곳임에도 의사가 무려 10명이 넘는다.
그뿐이겠는가, 무려 강남에 위치한 어마어마한 병원.
소위 말해 그 병원에서 근무를 하던 의사가 나와서 개인병원을 차린다면 한 명도 망하지 않는다는 그곳.
그런 병원으로 김 원장이 이직했다니.
나는 너무 놀랐고, 한편으로는 정말 기뻤다.
항상 광주에서 힘들어하던 그녀였기에 자신의 고향인 서울로 돌아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이직한 병원은 서울에서 정형외과 의사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곳.
그러나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인 행복 정형외과에 갔다는 사실도 기뻤다.
“응. 나도 이제 서울에 있어! 이제 다시 민 과장님이랑 자주 볼 수 있겠다. 민 과장님도 좋지?”
그녀의 말에 나는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미소를 지었다.
내가 기쁜 이유 중, 그녀가 나와 같은 지역인 서울에 있다는 것도 한몫한 건 사실이다.
“근데 갑자기 왜 서울로 온 거예요?”
“뭐, 타 지역 가보고 싶어서 광주로 갔던 건데, 그 정도 경험했으면 됐다고 생각했지. 원래 계획보다는 조금 짧게 있었지만 말이야.”
그녀가 서울로 돌아온 이유 중에 얼마 전 있었던 스토커 사건이 컸을까 싶었다.
인생을 살면서 경험해 보지 않아도 될 경험을 한 그녀.
그 당시에 나는 그녀가 안쓰러웠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스토커 일도 있었고……. 뭐 딱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향수병도 있고 해서 서울로 돌아왔지.”
“괜찮…아요?”
나는 그녀가 걱정됐다.
스토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진 그녀.
김 원장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까.
“응! 이제는 괜찮아. 그리고 서울에는 친구들도 많으니까.”
“그렇죠. 원장님이 원래 서울분이시니까.”
“민 과장님도 내 친구잖아. 나 이제 광주에 친구도 없다고. 하하. 이제 민 과장님이 타지에 온 거니까, 내가 유일한 친구 해줄게!”
그녀는 술잔을 들며 내게 말했다.
“고마워요.”
나는 그녀의 술잔에 내 잔을 부딪쳤다.
“원장님, 진짜 대단해요. 이직하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인데, 그렇게 좋은 병원으로 한 번에 가시고 말이에요.”
“민 과장님도 행복 정형외과 알아?”
“당연히 알죠. 서울에서 행복 정형외과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어려울걸요?”
“그런가? 하하. 다음에 영업하러 와. 아직 내가 막내라 힘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네. 잘 부탁드립니다, 원장님?”
나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예, 저도 잘 부탁드려요. 민 과장님.”
“자, 축하주 한잔할까요?”
그 뒤로 웃음이 떠나지 않는 술자리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