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안녕하십니까. 어제 왔던, 코리아 메디컬 민지훈입니다.”
서둘러 도착한 율한 정형외과 한준범 원장의 진료실.
그는 내 인사에도 역시나 시큰둥한 반응이다.
“어제 자료 주셨잖아요? 제가 연락할 텐데, 오늘 또 오셨네. 보통 이렇게 연달아 오시는 분은 잘 없던데…….”
내 특기다.
매일같이 찾아와서 눈도장을 찍는 일.
광주에 있을 때부터 의사들의 눈에 가장 많이 띄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지.
남들이 한 군데 병원에 갈 것을 나는 두 군데, 세 군데를 바삐 다니며 여러 원장을 자주 만났다.
시간은 비록 짧더라도, 연달아 며칠을 눈에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다.
눈에 자주 띄며 기억에 남긴다는 건, 영업에 성공하는 지름길이다.
“그럼요. 자주 봬야죠. 하하.”
내 말에도 그는 나를 달가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보통은 메디컬 직원을 맞이할 때, 애써 미소라도 짓는 원장들이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은 그렇다.
그러나 한 원장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표출한다.
싫어하는 표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항상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그는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내게 의자를 가리켰고, 나는 착석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오늘 밖에 날씨가 아주 좋더라고요, 원장님.”
이틀 연속 만났지만, 아직 한 원장이 편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제보다는 한결 편한 마음으로 그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그에게 날씨 이야기, 어제오늘 있었던 사회적 이슈에 대해 대화를 이어 갔다.
바로 카탈로그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제도 그에게 일 이야기는 내가 먼저 꺼내지 않았었다.
그리고 오늘 역시 더더욱 꺼내지 않을 예정이다.
그저 오늘은 내가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것을 표출하기 위해 온 것이다.
하지만 한 원장도 알 것이다.
내가 영업을 위해 친분을 쌓으려고 하는 것을 말이다.
그와 몇 마디의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 오늘도 여전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
어제 집에서 하도 클래식 곡을 듣다 와서 그런지 오늘은 귀에 더 잘 들리는 느낌이다.
대화의 물꼬는 내가 텄지만, 어느새 그의 자랑으로 마무리되어 가는 이야기.
그러다 순간 진료실에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이때다 싶은 생각에 재빨리 의자 옆에 내려놓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 가방 안에 챙겨온 LP를 가방 속에서 잡은 채 입을 열었다.
“원장님.”
내 부름에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탈로그는 어제 준 것 같은데?”
내가 가방 속에서 쥐고 있는 것이 당연히 영업 자료라고 생각하는 모양.
더불어 그의 표정에서 속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다.
카탈로그 받으면 대화가 끝나고, 이제 나가겠구나, 라고 하는 듯 보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쥐고 있는 LP를 가방 밖으로 꺼내 들었다.
그걸 그에게 건네자, 한 원장은 미소를 짓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표정이 풀어졌다.
기분이 순간 좋아진 것이 아니라 놀란 듯 보였다.
“이게 뭐죠? 헨델… LP?”
LP 표지에 커다랗게 써 있기는 하지만, 그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예, 맞습니다.”
“이걸 왜…….”
“원장님께서 LP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서둘러 그를 향해 말을 이어 갔다.
“어제 제가 찾아뵈었다가 원장님 진료실에서 헨델 연주곡이 몇 곡 흘러나오는 걸 들었습니다.”
“그게 들리던가요?”
“네. 작긴 하지만 들렸습니다. 제가 다른 지역에서 근무하다가 얼마 전에 이사를 왔거든요. LP는 가지고 있지만 플레이어는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들을 수가 없거든요. 하하. 저보다는 원장님께 선물 드리는 게 LP에게도 제 주인을 찾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예전에 선물을 받은 LP 플레이어가 있다.
하지만 막상 집에서는 사용을 하지 않았고, 이번에 이사를 오며 본가인 여수에 두고 왔던 것.
나는 그에게 내가 LP를 선물하는 이유를 길게 풀어 설명했다.
왜냐, 그가 선물을 받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조마조마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물건.
나와 아직 친분도 없는 사이에서 선물을 줬을 때, 받지 않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조금 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물을 받아야 내 작전이 먹히는 것이기에, 나는 한 원장에게 길게 설명을 풀어놓았다.
잠시 그 LP를 바라보던 한 원장은 시선을 그곳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이거 정말 저 주려고 가져온 겁니까?”
“네. 어제 진료실에서 흘러나오는 곡 듣고 집에 갔는데, 집에 저 LP가 있더라고요. 저는 사용하지도 못하니, 원장님께서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나는 한 원장에게 말을 덧붙였다.
“새로 구매하지 않은 거라, 혹시 불쾌하시다면 죄송합니다.”
저 LP 새 제품을 구하는 것은 당연히 어려웠다.
게다가 새 제품을 팔더라도 구매할 생각도 없었지.
중고가 아닌, 새 제품을 사다 주면 부담스러워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용하지 못하니,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준다는 것이 보다 부담 없이 받을 수 있다.
그래서 밤새 가지 마켓을 뒤지며 찾은 것이지만, 그에게 에둘러 말했다.
그러자 그는 한참을 말없이 LP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뒤, 이내 입을 여는 한 원장.
“뭐, 민 과장님이 주신 거니까. 제가 쓰죠.”
내 선물이 마음에 드는 모양.
하지만 그는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나는 한 원장이 물건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은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물건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근데 좀 새롭네요.”
“네?”
“제가 생각보다 여러 방면으로 좋아하는 게 많아요…….”
그는 자신의 자랑을 또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이 음악에 빠지게 된 이유를 모두 설명한 뒤, 다시 내 눈을 보고 말했다.
“…그래서 많은 메디컬 직원들이 와서 내게 이야기도 하고, 몇 번 선물도 받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음악 쪽 선물은 처음이네요.”
“그렇습니까? 좋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하핫.”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한 원장.
“그러게요. 이런 선물도 괜찮네요.”
그리고는 이내 시선을 LP로 옮겼다.
[얘는 지금까지 오던 놈들과는 조금 다른데? 대화가 좀 통하네. 센스도 있고…….]
먹혔다!
나는 그의 속마음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 선물을 받았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그의 속마음의 소리에는 ‘대화가 좀 통한다’라는 말을 했다.
항상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그가 나와의 대화가 통한다라…….
이게 성공한 것이지 무엇이겠는가.
양 주먹을 하도 세게 쥔 탓에 손톱이 손바닥을 찔러 자국이 날 정도였다.
한 원장은 내게 물건 발주를 하겠다거나 하는 등의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금 표정도, 말투도 말이다.
게다가 나는 오늘 물건 이야기를 끝까지 꺼내지 않고 병원을 나갈 예정이다.
아직 영업 성공까지는 멀었다.
하지만 영업 성공에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맞는 길로 다가가고 있다는 기쁨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내가 기쁨을 입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겨우 눌러내고 있을 때, 그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민 과장님은 그림도 좋아하시나?”
“그림이요? 아… 그림은 제가 잘 몰라서요. 근데 전시회는 몇 번 가본 적은 있습니다. 원장님은 그림도 좋아하십니까?”
예전에 여자 친구를 사귈 당시, 데이트로 몇 차례 전시회를 다녔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
“뭐 그런 편이죠. 세상에 모든 지식에는 편식이 없어야 하거든요.”
“역시 예술 쪽으로도 조예가 깊으신 것 같습니다. 대단하십니다, 원장님.”
그는 내 말에 어깨를 들썩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의사 일도 바쁘실 텐데, 항상 다방면으로 활동하시고 공부하시는 거 보면 진심으로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요?”
그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던 그때, 그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아까 듣자 하니 이사를 왔다고요? 뭐 동네를 옮겼다는 건가요?”
한 원장의 질문에 나는 놀라 눈이 두 배는 커졌다.
그리고 순간 놀란 마음에 등줄기로 한 방울의 땀이 맺혀 흐르는 느낌까지 들었다.
단순히 질문을 던졌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놀란 이유.
바로 한 원장이 내게 처음으로 사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자신의 자랑으로 대화를 가득 메우던 그.
조 차장에게 듣기로도, 그리고 소문이 나기로도 자신 잘난 맛에만 산다는 사람이었다.
어제와 오늘 본 것이 다이지만 내가 겪은 바로도 그런 성향의 사람이었지.
남 일에 무관심하고 자신의 지식 표출하고 뽐내기에 바쁜 사람.
그런 사람이 나에게 사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것도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이다.
그 질문 하나만으로도 나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남들과 차별화된 접근.
내 센스로 인해 그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는 사실에 뿌듯함이 온몸을 가득 메웠다.
* * *
며칠이 지난 오늘.
새 거래처 영업도 좋지만 내가 담당으로 맡게 된, 그러니까 전임자가 담당하던 거래처에도 인사 가고 물건 확인, 납품 등을 하며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코리아 메디컬에 온 이후에는 항상 집, 회사, 집, 회사로 살고 있긴 하지만 요즘은 집에 가면 그대로 씻고 뻗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며 보내고 있다.
오늘은 대망의 환영회 겸 회식이 있는 날.
사실, 회식하기 전에 영업 하나라도 꼭 따내고 싶었었다.
담당 병원 관리하고, 새 회사에 적응하는 시간을 보냈다는 것 외에 새로 영업한 병원을 하나 안고 환영회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새 거래처를 뚫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성취해 낸 새 거래처는 작은 거래처가 아닌, 모두가 따내기 힘들고 어려워하는 병원. 그런 곳을 내가 뚫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처음 영업 갔었던 세 군데의 병원.
그리고 며칠 전까지 갔었던 율한 정형외과.
네 군데의 병원에서는 아직도 감감무소식이다.
율한 정형외과 한 원장은 내게 마음의 문을 조금 열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곧장 연락이 와서 발주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존에 받던 물건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은 결정이니까.
그래도 계속 도전해야 한다.
지금 진행 중까지 왔다는 것만으로도 많이 도달했다.
이 정도 성과도 다른 이들에 비해 많은 진척이 있는 것이니까.
지이잉.
그때 울리는 전화.
[발신인 : 율한 정형외과 한준범 원장]
한 원장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놀란 마음에 숨도 고를 틈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네, 원장님.”
- 저 한준범입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원장님, 잘 지내셨죠?”
- 네. 바빠서 바로 이야기할게요. 저번에 줬던 카탈로그 이제 다 봤어요.
“아, 보셨습니까? 혹시 자료 더 필요하시거나 원하시는 거 있으시면…….”
- 그때 줬던 카탈로그 제품 견적서 좀 넣어줬으면 하는데.
“견적서 말이십니까?”
- 네. 뭐, 다른 지역에서 스카우트까지 돼서 왔다는데, 열심히 사는 사람 같아서 말이에요. 스카우트로 온 거면 실력도 좋을 테고, 또 좋은 것도 같고……
병원에서 그가 내게 물었던 사적인 질문.
이사를 왔냐는 말에 내가 코리아 메디컬에 온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펼쳐놓았었다.
그 이야기를 하며 내게 견적서를 요구하는 한 원장.
나는 그의 말에 앉아 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지금 당장 견적서 챙겨서 병원 가겠습니다!”
다급한 내 목소리에 그는 짧은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답했다.
- 메일로 넣어줘요. 내가 품목 많이는 못 넣어줘도, 한두 제품이라도 써보려고 하거든요.
그의 짧은 웃음과 말투.
한 원장을 길게 겪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건 엄청난 변화와 호감 표시다.
성공이다.
한 원장에게 한 제품이라도 넣게 된다면, 앞으로 제품을 늘려가게 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나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그와의 전화를 끊은 후, 나는 내내 입꼬리를 올린 채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내가 율한 정형외과에 영업 성공했다는 보고서를 말이다.
* * *
3층짜리 커다란 건물의 고깃집.
오늘 이곳이 우리 회식 장소이다.
정장을 입은 남성 무리가 우르르 이 안으로 향했다.
그때, 내 어깨를 툭 치는 누군가.
뒤를 돌아보니 바로 조성철 차장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내게 한마디를 작은 목소리로 툭 던졌다.
“민 과장, 보고서 읽었어. 실력 좋네.”
보고서라면 율한 정형외과 영업에 대한 서류다.
내가 회사에서 작성해 비어 있던 조 차장 자리에 올려뒀었던 서류.
나는 그에게 답했다.
“율한 말씀하시는 거죠?”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고, 내가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려고 하자 조 차장은 나를 지나쳐 식당으로 먼저 들어가 버렸다.
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후, 조 차장을 따라 예약된 룸으로 걸어갔다.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는 환영회 겸 회식 자리.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