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턱.
앉은 자리 옆으로 뭉텅이의 파일철을 내려놓는 사람.
나는 몸을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리에 서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나를 바라보고 눈썹을 들썩였다.
“조성철 차장님이십니까?”
그는 내 말에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그를 한눈에 알아본 이유.
아침에 나를 소개해 주던 부장이 내게 말을 해줬었기 때문이다.
내 위에 있는 차장은 김석구 차장이 아닌, 조성철 차장이라고 말이다.
조 차장은 까칠한 얼굴과 날렵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차갑게 풍겨오는 카리스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왠지 모르게 압도되는 것 같다.
나이로 보나, 직책으로 보나 내 윗사람이었지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내 책상 위에 올려놓은 파일을 바라보자,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거, 우리 회사 품목들이야.”
“전 품목이요?”
“응. 공부해.”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 편하게 놔도 되지?”
“그럼요.”
이미 말을 놓은 조 차장.
안 된다고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조 차장이 주고 간 파일의 개수는 어마어마했다.
이 자료들을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습득해야 한다.
그가 나에게 주고 간 숙제는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다.
물건을 팔러 나가야 하는 영업사원에게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
무슨 제품을 팔아야 하는지, 그리고 그 제품은 어디에 좋은지, 왜 우리의 제품을 써달라고 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고 있어야 물건을 팔 수 있기 때문이지.
옆에 쌓여 있는 파일은 인공 관절 임플란트부터 외상 수술 기구, 소모품 등 부류 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 파일 당 안에 들어 있는 카탈로그 수는 어마어마했다.
이 방대한 양을 머릿속에 스캔하듯 집어넣으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할 듯했다.
영업으로 실력을 보여줘야 하지만, 그전에 기본 지식부터 채워야 했으니까.
입사하고 하루 이틀쯤은 사무실에서 인수인계와 공부를 한답시고 있어도 괜찮지만,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무능해 보일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슬슬 뒷목이 뻐근해져 올 때쯤, 나는 구부러진 허리와 거북목이 되어 가는 몸을 스트레칭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팔을 위로 쭉 펴고 고개를 젖히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자, 마주치는 두 눈.
바로 출근 때, 문 앞에서 마주쳤던 그 직원이었다.
뜬금없이 마주친 얼굴에 서로 어색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눈썹을 들썩이며 검지와 중지를 붙여 입에 가져다 대는 제스처를 취했다.
담배를 피우러 가겠냐는 뜻이었지.
그는 내 손짓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여기 좋네요.”
그와 함께 올라온 옥상.
일반적으로 자주 보이는 회색의 콘크리트나 초록색으로 칠이 되어 있는 바닥이 아니었다.
역시 서울의 좋은 건물 옥상은 다른 건가?
이 건물의 옥상에는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벤치도 있었고, 자판기, 그리고 흡연 구역까지 나뉘어 있었다.
“그런가요? 하하. 저는 항상 올라오던 곳이라 좋은지 몰랐는데, 과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뭐 좋은 것 같기도 하네요.”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나는 바로 옥상 문 옆에 위치한 자판기 앞에 서서 주머니를 뒤적였다.
항상 돈은 지갑에 넣고 다니는 편이긴 하지만, 때때로 급하게 천 원 한두 장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금처럼.
주머니 속에 꼬깃꼬깃 접혀 있는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양 끝을 잡고 허벅지에 문질렀다.
그리고 자판기에 지폐를 집어넣자 버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커피… 마시죠?”
“아… 넵. 감사합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커피 버튼을 꾹 눌렀다.
“사무실에 좋은 캡슐 커피 머신 있던데, 이것도 괜찮아요?”
“예, 좋죠. 원래 담배에는 달달한 믹스 커피가 와따죠.”
그의 말투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와따가 뭡니까. 하하.”
그는 내 말에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저도 곧 30살 되어 갑니다, 과장님. 벌써 20대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거든요.”
“찬호 씨가 벌써 29살이에요? 더 어려 보였는데.”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깜빡였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고 보니까 제가 아직 이름도 말씀을 못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나는 턱 끝으로 그의 사원증을 가리켰다.
“괜찮아요. 워낙 직원이 많아서, 차차 알아가야죠.”
“맞아요. 저 처음 입사하고 선배님들 이름 외우는 데 한참 걸렸거든요. 그리고 과장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도 그게 더 편합니다.”
“그럴…까?”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두 잔의 커피가 나왔다.
우리는 커피 한 잔씩을 들고 흡연 구역으로 걸어갔다.
한 손에는 커피, 그리고 한 손에는 담배가 들려 있는 우리.
“과장님, 어떠십니까?”
“응? 뭐가?”
“여기 회사요. 전에 계시던 곳과는 많이 다른지 궁금해서요. 저는 회사가 코리아 메디컬이 처음이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찬호 씨는 첫 회사부터 엄청난 대기업에 취직했으니까, 다른 곳은 궁금해할 것도 없지. 다들 이 업계 사람이라면 오고 싶어 하는 곳이 바로 여기, 코리아 메디컬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가끔 중소기업 쪽으로 가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더라고요.”
“뭐, 이것저것 경험해 보는 것도 중요하니까. 나도 어서 적응해야지.”
이찬호.
29살에 이 회사에 입사한 지는 2년 차 된 사원이라고 한다.
큰 키에 날씬한 체형.
얼굴도 훈훈하고, 아침에 마주쳤던 그대로 정장 핏도 완벽하다.
딱 젊은 피, 녀석은 의료기기 영업이 아니라 제약 영업을 해도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처음 보는 사람과의 대화도 서슴없이 잘 이어 간다.
하긴, 그건 영업사원이라면 대부분이 가진 장점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얀 연기를 서로 내뿜으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우리.
중간중간 아무 말 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지만, 그 정적이 답답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이찬호, 꽤 마음에 든다.
나에게 무언가를 딱히 한 것은 없지만, 그저 내 느낌이다.
“과장님. 회사에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궁금한 거? 글쎄. 아직은 파악 중이라서.”
“혹시 궁금한 거 생기시면 물어보십시오. 당연히 일 적인 부분은 오늘 처음 오셨어도 과장님이 저보다 많이 아실 테니까. 그냥 회사 내부 사항에 대해서 말입니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고마워, 든든하네.”
“하하. 그럼요. 저는 과장님 좋습니다.”
“뭘 했다고 벌써?”
“음……. 모르겠습니다. 남초 회사다 보니 항상 딱딱하지 않습니까. 근데 과장님은 조금 다르실 것 같아서요.”
녀석도 나와 같은 마음인 듯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자신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학연, 지연, 혈연 중에 가장 급격히 친해질 수 있는 게 흡연이라더니. 그래서 내가 벌써 마음에 들었어?”
그는 내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흡연이요? 민 과장님, 센스도 장난 아니십니다?”
담뱃불을 끈 뒤, 아직 종이컵에 남아 있는 커피.
이찬호와 나는 커피를 마저 마시기 위해 제자리에 서 있었다.
“민 과장님. 혹시 라인 정하셨습니까?”
“라인?”
“네. 오전에는 전 직원이 있지는 않아서 못 보셨으려나?”
회사 라인.
사내 정치와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회사를 다녀 본 사람이라면, 회사 라인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큰 회사일수록 더더욱이지.
그 라인을 통해 승진의 속도도 정해진다.
물론 실력에 따라 승진을 하는 것이지만, 라인 역시 중요한 요소 중 하나지.
지방에서는, 아니 내가 있었던 회사들은 중소기업이라고 하기에도 작은 소기업들이었다.
광주 메디컬에서는 라인이라는 것이 나뉠 수도 없을 정도로 적은 인원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라인이라는 말은 광주 메디컬에서 고개도 들 수 없었지.
광주 메디컬보다야 크지만 그래도 작은 규모의 WG 메디컬.
그런 곳에서도 회사 라인은 뚜렷하게 존재했었다.
장홍석 사장, 손지혁 차장 그리고 나.
뭐 밑으로 라인을 더 만들자면 한태준도 있었지.
그리고 반대 라인을 꼽자면, 최권호 부장과 지금은 돌아올 수 없는 곳에 갇혀버린 최준성 과장까지.
그중 최씨 라인은 그 줄이 뚜렷했다.
라인이 있다는 건, 그 라인끼리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요즘은 수평적인 구조라고들 하며 온 직원이 동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추세다.
그렇다고 해도 회사는 실질적으로 수직적인, 그리고 확실한 피라미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가리인 회장, 대표, 사장이라 불리는 사람들.
그들은 회사에 한 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아래로 차례차례 직책이 내려오면서 점점 인원수가 많아진다.
과장보다는 대리 직책의 인원수가 많고, 대리보다는 사원의 인원수가 많듯이.
라인을 타야 하는 게 바로 이때문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리는 부족하다.
사원에서 대리, 대리에서 과장, 과장에서 차장.
이런 식으로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 많은 사원이 전부 동시에 대리가 된다?
그건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왜 만년 대리, 만년 과장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오르지 못하고 정체가 되는 인물들이 있기 마련.
그만큼 회사에서는, 그리고 인생에서는 ‘라인’이 중요하다.
나 역시 이 회사의 라인을 빨리 파악할수록 좋다.
그래야 내가 어느 라인을 타야 하는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찬호의 말에 나는 귀가 솔깃했다.
“라인이라……. 찬호 씨는?”
“네?”
“찬호 씨는 어디 라인인데?”
“저는 아직 라인을 타기에도 너무 병아리 아닙니까.”
“에이. 2년이나 된 병아리가 어디 있어. 얼른 성과도 내고, 30살 정도에는 대리 달아야 하지 않겠어?”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침을 한 번 삼켰다.
자신이 승진한 모습을 상상하는 모양.
“대리라……. 아직은 상상도 안 갑니다. 저는 아직도 누군가의 지시로만 움직이는 역할밖에 못 하는 느낌이거든요.”
그의 말에 나 역시 사원이었던 시절을 회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일이야 하면 느는 거지. 그래서 라인이 어떻게 있는데?”
경로가 이탈한 대화를 다시 붙잡고,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아침에 민 과장님께 질문 던졌던 두 분이요.”
“김석구 차장님이랑 강대훈 대리?”
“맞습니다. 벌써 이름도 다 외우신 겁니까? 와, 민 과장님 머리 진짜 좋으십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내게 이름과 직책을 외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항상 새로운 병원에 영업 가서 의사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그렇게가 한 라인이야?”
“네. 박지웅 과장님까지요.”
“박지웅 과장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 바로 병원으로 가셔서 자리에는 안 계셨던 분인데, 그분까지 한 라인이요.”
“더 위로는?”
“사실 부장님이랑 이사님, 그리고 더 위로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윗분들과는 제가 소통하거나 대화를 나눌 일이 없었거든요.”
“그럴 수 있지.”
이렇게 큰 회사의 경우에는 일반 사원이 높은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사무실에 출근해 대표실로 들어가며 잠깐 마주쳐 인사하는 정도?
“그리고 반대는 당연히 조성철 차장님이요.”
“또?”
“없어요.”
“응? 없는 게 말이 되나?”
“원래 지금 민 과장님이 있던 자리에 계시던 과장님, 그분이랑 친하셨는데, 지금은 뭐 아무도 없어요. 조 차장님이 조금 마이 웨이 스타일이시거든요.”
“마이 웨이 스타일이라…….”
아주 잠깐이었지만, 내가 본 조 차장의 스타일은 마이 웨이라고 해도 그럴듯했다.
처음 온 나에게, 그리고 나와 나눈 첫 대화에서도 인사조차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머지 직원들은 어차피 대리나 사원이라서, 각자 여기저기 눈치만 보고 있죠. 딱히 뚜렷한 라인을 타지는 않았고요.”
“그렇구나. 알려줘서 고마워.”
나는 종이컵에 남은 커피를 모두 입에 털어 마셨다.
“그리고요, 민 과장님.”
“응?”
“차장님 두 분. 동기세요. 나이도 똑같은……. 그래서 그런지 두 분 사이에는 항상 스파크가 튀는 느낌? 뭐 그런 관계세요.”
동기가 함께 차장까지 올라왔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차장이 되려면 이 회사에서 오래 머물렀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상부상조하며 사이좋은 동료 사이가 아닌, 스파크가 튀는 라이벌 관계라…….
서울에서의 생활이 점점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