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과장님이랑 회사 밖에서 커피 마시는 거, 진짜 오랜만이에요.”
박수진 주임이 내 눈을 바라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우리 예전에 WG 메디컬에 있을 때 한번 마셨었는데, 맞죠?”
그녀는 내 말에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만났지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기도 전에 본론을 꺼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화의 흐름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적당히 사담을 주고받다가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사람과의 개인사도 영업과 마찬가지다.
“주임님은 요즘 회사에 별일 없어요? 영업 직원들 많아졌는데, 사무직은 혼자라 힘들지는 않아요?”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신입으로 영업 직원 두 명을 뽑은 게 언제인데, 이제야 묻는다는 게 말이다.
“그럼요. 아직은 할 만해요. 과장님이 업무가 훨씬 많아지신 것 같아서 걱정이던데요?”
그녀와 나는 서로 회사 이야기만을 주고받으며 커피를 마셨다.
어떻게 대화의 흐름을 바꿔야 하나, 눈치를 보고 있던 가운데, 박 주임이 들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저… 과장님.”
불쑥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입에 물고 있던 빨대를 빼냈다.
“네?”
조금 전까지 나와 해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눌 때와는 사뭇 다른 목소리.
차분하고 진지한 톤의 목소리였다.
“과장님한테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아…….”
내가 그녀에게 회사 밖에서 보자고 할 때부터 눈치를 챈 것 같았지만, 확실히 좋은 일은 아닐 거라 예상한 모양.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기대감에 차고 설레는 모습이었을 테니까.
“안 좋은 일이구나…….”
박 주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하듯 말을 내뱉었다.
“저 회사 그만두게 됐어요.”
“네? 회사를요?”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과 목소리였다.
좋은 소식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할 거라는 건 전혀 몰랐던 모양.
하긴, 갑자기 내가 퇴사한다는 게 나 역시 믿기지 않으니까.
그걸 박 주임이 알았을 리가 없다.
“네. 박 주임님한테는 따로 알려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오늘 뵙자고 했어요.”
“…….”
그녀는 내 말에 적잖이 놀랐는지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요? 혹시 제가 불편해서 그러시는 건 아니죠?”
항상 해맑은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
고백을 할 때도, 그리고 내가 연신 거절을 할 때도 그녀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가득했다.
그런 그녀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나를 좋아하는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담겨서라기보다는 그저 ‘이별’이라는 단어에 대한 마음인 것 같다.
그래도 항상 나를 응원해 주던 그녀였는데… 앞으로 서울에 가고 나면 자주 보지 못하게 되겠지.
아니, 어쩌면 영영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문득 이별이라는 사실이 마음속에 확 다가왔다.
나는 애써 입꼬리를 옅게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요. 박 주임님이 왜 불편하겠어요.”
“그럼……. 대체 왜 그만두시는 거예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려고요.”
“더 높은 곳…….”
그녀는 내 말을 따라 작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내가 아닌 앞에 놓인 커피를 뚫어지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왜… 저번에 민 과장님이 저한테 하신 말씀 있잖아요.”
“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물었고,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회식했을 때요. 저랑 끝나고 둘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갔을 때…….”
지난번, 신입 사원들의 환영회 겸 회식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박 주임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편의점에 갔었지.
진지한 고백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내게 연애에 대해 다시 한번 물었었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그녀의 마음을 거절했었고, 그때 내가 했던 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는 모양.
나는 그녀에게 왜 연애를 하지 않는지에 대해 설명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하려는 걸까?
내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민 과장님이 말하는 연애……. 이 업계의 꼭대기에 오르면, 그러니까 정상에 가까워지면 그제야 연애할 마음이 들 거라고 하셨잖아요.”
“아… 네. 제가 그랬었죠.”
그녀에게 했던 그 말은 박 주임의 마음을 거절하기 위해 지어낸 변명은 아니었다.
실제 내 마음이 그랬다.
나는 아직 연애라는 게 내 일상에 큰 부분을 차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뚜렷하다.
업계에서 최고가 되는 것.
그리고 현재 주어진 바에서 최고가 되는 것.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행운도 좋겠지만, 말 그대로 그게 왜 행운이겠는가.
즉,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오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행운을 얻으려면, 내가 그 행운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준비가 된다는 건,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
동시에 모든 일을 이뤄낸다면 좋겠지만, 양쪽 모두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일.
나는 그 정성을 온전히 ‘일’에 쏟아붓고 싶었다.
탑.
업계의 탑을 찍은 후, 내 마음을 돌아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서울에 가겠다고 결심한 이유 중 하나도 그것이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내게 이런 기회가 왔음에 감사해하고 하루라도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니까.
박 주임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민 과장님이 말했던 꼭대기……. 그 정상이 당연히 높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민 과장님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니까.”
그녀는 그 말을 끝내고 드디어 시선을 커피에서 내 눈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산이 저기 있는 무등산. 아니, 한라산 정도일 줄만 알았어요. 그것도 정말 높은 산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에베레스트 정도로 높을 줄은 몰랐어요.”
박 주임의 말에 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 역시 자신의 농담으로 미소를 되찾았다.
하지만 애써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내 눈에 선명했다.
[가지 마. 가야 하는 건 알지만, 가지 마…….]
그리고 나를 아련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자, 들려오는 박 주임의 속마음.
속마음 소리마저 흐릿하게 들려왔다.
박 주임의 진심을 알게 됐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속으로도 그리고 겉으로도 모른 체했다.
“하하. 에베레스트 정도로 보였나요? 열심히 등반해 보겠습니다.”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원할게요. 진심으로요…….”
박 주임은 내게 말을 하며, 침을 크게 한 번 삼켜냈다.
침을 삼켜내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릴 정도.
“고마워요. 그리고 함께 일하면서 좋았어요, 박 주임님 덕분에.”
그녀는 내 말에 활짝 미소를 지었다.
“민 과장님.”
“네, 주임님.”
“이렇게 저 생각해 따로 이야기해 줘서 고마워요.”
“아니에요. 사장님, 차장님만큼 오래 본 사람이 주임님이잖아요. 같은 부서는 아니라, 항상 부딪치는 업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주임님이랑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저도 진심으로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감사하네요. 과장님.”
“감사하긴요. 그동안 고맙기도 했고, 미안한 것도 많은 것 같아요.”
그녀에게 그동안 하지 못했던 진심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나를 이렇게 한결같이, 오랫동안 좋아하면서까지 여러 번의 고백을 했던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그리고 그런 고백을 항상 거절해 미안하기는 했지만, 나에 대해 호의적인 마음을 가졌다는 사실은 고마웠으니까.
서로의 마음을 이야기하다 보니, 우리 주변 공기까지 말랑말랑해지는 듯했다.
어색하고 조금은 오글거리는 분위기.
그 탓에 박 주임의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듯 보였다.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내가 떠난다는 사실과 이별에 대한 생각에 감정을 추스르는 것처럼 보였다.
“저도 과장님 덕분에 행복한 회사 생활이었어요. 오늘 민 과장님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한데, 저 먼저 일어나 볼게요.”
그녀는 말을 하다가 말고 고개를 획 돌렸다.
그리고 고개를 자신의 가방 쪽으로 푹 숙인 채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뜻인가?
“아……. 그래요. 내일 봐요, 주임님.”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를 보며, 나 역시 앞에 놓인 커피를 트레이에 옮겨 담았다.
박 주임이 나간다면 나 또한 이 카페를 나갈 테니까.
그녀는 내 앞에 서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들며 인사하고는 곧장 뒤를 돌아 카페를 나섰다.
내게 인사를 하는 그 찰나,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을 보고 말았다.
굳이 외면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서둘러 카페를 나가는 그녀를 보고 그 눈물을 모른 체했다.
내가 박 주임을 붙잡고 달래주고 위로해 준다고 한들, 내가 떠나는 건 변하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만 복잡하게 만들 테니까.
* * *
광주 메디컬은 내가 빠진다고 해도 인원을 충원할 계획은 아직 없다고 했다.
과장이라는 직책의 사람을 구하는 것도 힘들뿐더러, 나이도 맞지 않다는 게 손 차장의 의견.
맞는 말이다.
내가 과장이라는 직책을 남들보다 빨리 받아낸 편.
내 나이 또래의 경력직은 보통 대리를 달고 있거나, 정말 늦게 메디컬 업계로 온 사람은 사원 직책을 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중간한 사람을 뽑으면 한태준과의 충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으로 장 사장과 손 차장은 한태준을 열심히 키워볼 거라 말했다.
내 판단 역시, 한태준의 능력과 실력이라면 금방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 동안 나는 내 담당 거래처를 돌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 시간 또한 생각보다 만만치 않게 오래 걸렸다.
병원마다 그리고 각 의사마다 ‘저 그만둡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까.
내 업무는 손 차장과 한태준에게 나눠 전달되었다.
후임인 한태준이 오롯이 맡기에는 아직 벅찬 일이다.
반면, 손 차장은 자신의 담당 거래처가 익숙해져 새로운 거래처를 맡기에 충분했다.
그는 기꺼이 내 큰 거래처, 요구 사항이 많은 까다로운 병원까지 도맡았다.
이직을 위해 퇴사하지만, 이렇게 훈훈한 퇴사는 또 없을 것이다.
주변에 퇴사 이야기를 한 후, 나는 매일 같이 술을 마셨다.
이별주 겸 축하주랄까?
다들 코리아 메디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지.
모두가 온 진심을 다해 축하해 주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항상 술자리의 명목은 내가 코리아 메디컬로 가는 축하 자리였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몇 번의 사적인 자리, 술자리를 통해 끝인사는 수없이 나눴지만.
가져온 종이 상자에 책상에 있는 짐을 모조리 담은 후, 그 상자를 들고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니 그제야 퇴사가 실감 났다.
광주 메디컬로 오기 위해 WG 메디컬을 퇴사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
장 사장을 비롯한 이하 직원들이 내 앞에 길게 서 있었다.
“그래. 민 과장, 그동안 고생 많았다.”
“지훈이는 거기 가서도 잘할 거야. 그럼, 누가 키운 놈인데. 하하.”
나는 장 사장과 손 차장의 말에 애써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보고 싶을 겁니다. 아니, 벌써 그리워요.”
한태준은 울상을 지으며 내 팔목을 끌었다.
“과장님, 광주 내려오시면 꼭 놀러 오세요.”
신입 사원 두 명도 내게 한마디씩을 붙였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고, 마지막으로 시선을 옆으로 넘기자 맨 끝에 서 있는 박수진 주임.
그녀는 나를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입술을 말아 넣은 채로.
“주임님. 태준이 놈이 일 처리 똑바로 못하면 언제든 연락해요. 제가 혼내주러 내려오려니까.”
내 너스레에 박 주임은 입술을 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그럴게요. 조심히 올라가세요. 과장님은 뭐든 잘 해내실 거예요. 정말…….”
“아! 과장니임! 아니다, 그럼 혼내주러 가끔 내려오시는 겁니다? 하하.”
한태준은 내가 혼내겠다는 말에 뾰로통 하려다 금세 태세 전환 후 답했다.
나는 모든 이들과 작별 인사를 마친 후, 허리를 깊게 접었다.
그렇게 광주 메디컬에서의 민지훈 과장은 이제 종지부를 찍었다.
* * *
광주 근교의 전남, 전북이 아닌 서울.
무려 300km나 떨어진 타지로 이직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일 급한 집 문제부터 시작해 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할 수 있다.
내게 주어진 기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한 새로운 시작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