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이렇게 셋이서 술자리 갖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장홍석 사장은 손 차장과 내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맞습니다. 벌써 회사 식구가 많이 늘었잖습니까.”
손 차장은 그가 건네주는 술을 받으며 답했다.
그리고 곧장 우리는 술잔을 부딪쳤다.
장 사장 혹은 손 차장이 내게 무슨 고민이냐고 물어본다면, 뭐라 둘러대야 할지 고민을 하며 나는 술을 목구멍으로 털어 부었다.
우리는 최근에 있었던 일,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술병을 비웠다.
그렇게 그들은 한참 동안 내게 이 자리를 가지게 된 이유에 관해 묻지 않았다.
소주를 한 병 더 추가 주문하고, 병뚜껑을 열었다.
이렇게 친목을 위한 자리로 마무리되려나 싶을 때쯤, 장 사장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민 과장.”
“예, 사장님.”
갑자기 조용해진 분위기.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할 말이 있어서 만든 자리 아닌가?”
뭐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과 말투의 장 사장.
나는 손 차장에게도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아직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손 차장과 술자리를 가지고 싶었다고 둘러 대답을 하려고 할 찰나.
내가 입을 뻥긋거리기도 전에 장 사장은 재차 말했다.
“코리아 메디컬……. 결정 끝냈어?”
나는 육성으로 ‘헉’ 소리를 내고 말았다.
대체 장 사장이 코리아 메디컬에서 나에게 스카우트 제의한 것을 어떻게 알게 된 거지?
게다가 결정이 끝났냐고 묻는 그의 말.
이미 내가 고민을 시작하고 있을 때부터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다.
나는 순간 멘붕에 빠지고 말았다.
스카우트라는 게 다른 회사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존에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떠나야 한다는 것.
기존 회사 사장 입장에서 보자면, 나쁘게 말해 배신을 하고 떠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스카우트를 제안하는 회사에서는 절대 그 회사 직원 외에는 알리지 않는다.
그런데 대체 장 사장은 어떻게 이 일을 알았으며, 왜 내게 이 질문을 직접 하는 걸까?
마치 시험대에 올라가 있는 듯했다.
잘 대답해야 한다.
사실 내 마음은 이미 코리아 메디컬로 기울고 있다.
인생을 길게 놓고 보자면, 성공할 수 있는 좋은 발판이 되는 곳이기 때문이지.
그런데 오래 봐왔던, 그리고 내가 처음부터 몸을 담던 이곳을 두고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 손 차장에게 조언을 구한 뒤, 결정이 끝나면 장 사장에게 이야기를 하려 했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나는 장 사장의 눈치를 보며 손 차장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손 차장은 장 사장의 말에 태연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역시 내가 이미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을 알고 있던 모양.
내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하자, 장 사장이 들고 있는 술병이 내 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그가 따라주는 잔을 받기 위해 앞에 놓인 술잔을 한입에 털어 마셨다.
그리고 그가 부어주는 술을 받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민 과장. 더 큰물로 가 봐.”
“예?”
술잔에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그의 말에 놀라 고개를 쳐들고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나를 너무나도 놀라게 만드는 그의 한마디.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내가 가는 것을 반기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더 큰물로 가라는, 코리아 메디컬로 가라는 말을 하는 장 사장.
나는 급히 들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에 탁하고 내려놓았다.
무슨 일인가 생각할 틈도 없이, 손 차장이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욕심 같아서는 민 과장 붙잡고 싶지.”
그의 말에 장 사장은 눈을 지그시 깔아 내린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지. 근데 지훈이 네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가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잖아?”
나는 그들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줄 거라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이직이라고 하면 남은 이들과 적대 관계가 되기 쉬우니까.
그냥 동생도 아닌, 회사 후임의 일이다.
장 사장 입장에서는 자신의 회사 직원의 일이지.
이런 사이에 내 미래까지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느끼고 있는 마음을 그들도 알았는지, 쉬지 않고 조언을 쏟아냈다.
“인생 선배로서 솔직히 말해 주는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가는 걸 추천해. 큰일 한번 펼쳐봐. 민 과장 항상 광주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고 했잖아. 아니야?”
장 사장은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그 꿈도 이뤘는데, 언제까지 광주에 있으려고. 서울에서, 아니 서울 가면 전국이지 뭐. 우리나라에서 최고가 한번 되어봐야 하지 않겠어? 민 과장 덕에 광주 메디컬이 광주에서 최고가 됐잖아.”
“아닙니다. 제가 아니라, 장 사장님과 손 차장님이 만드신 거죠.”
내 말에 손 차장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서울로 올라갈 마당에 겸손은. 하하.”
그의 한마디에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한껏 풀린 분위기에 장 사장은 건배 제안을 하듯 술잔을 들었다.
장 사장의 뻗은 손을 따라, 나와 손 차장도 술잔을 재빨리 허공으로 들어 보였다.
“지훈이 네 선택을 존중해. 하지만 그 고민의 기로에서 우리의 정은 빼고 생각했으면 좋겠어. 다른 생각은 하지 마. 오로지 네 미래만 생각해.”
장 사장은 할 말을 모두 다 했는지, 우리가 들고 있는 잔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려 찰랑거리는 술잔을 입에 모조리 털어 마셨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 있냐. 대신 코리아 메디컬 가면 중간 다리 잘라버리고, 우리 회사로 물건이나 납품시켜줘라.”
손 차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미소로 화답했다.
“나는 담배 좀 태우고 올게.”
장 사장은 겉옷을 챙기며 말했고, 그의 말에 우리는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 몸을 들썩였다.
“같이 가시죠, 사장님.”
“아니야. 둘이 이야기하고 있어. 나 혼자 다녀올게.”
그는 손바닥을 뻗어 우리에게 보이며, 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남은 손 차장과 나.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고 물었다.
“차장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저 코리아 메디컬, 그러니까 스카우트 제의받은 거…….”
그는 내 말을 자르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언제부터, 어떻게 알았냐고?”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코리아 메디컬에서 스카우트하려고 전국적으로 직원 많이 알아봤나 보더라. 당연히 거기서 실력이 좋은 사람을 데려가야 하니까, 얼마나 많이 알아봤겠어.”
“그렇겠죠?”
“근데 순천 호남 골드 메디컬 사장님 기억하지?”
순천 호남 골드 메디컬.
김만호의 사기 사건에 함께 묶여 있던 곳이다.
더불어 내가 그 사기를 밝혀내 김만호에게 입금을 하지 않은 유일한 회사이지.
“예, 당연히 기억합니다.”
“거기 사장님 발이 좀 넓냐, 서울 쪽에 물건도 보내고 받기도 하고. 그러다가 코리아 메디컬 쪽에서 사람 찾는다는 말 듣고, 민 과장 추천하셨대.”
“네?”
나는 그의 말에 놀라 큰소리로 외쳤다.
그 사장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이해는 되지 않았다.
분명 장 사장과 친한 관계라고 들었는데 나를 왜 추천한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손 차장은 내게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거기 사장님 마음대로 그런 거 아니야. 장 사장님한테 먼저 물어보셨대. 너무 좋은 기회가 있는데, 민 과장 추천해도 되겠냐고 말이야.”
“정말입니까?”
“응. 장 사장님이 고민 많으셨을 거야. 그래도 민 과장 인생을 위해서라면 거기가 더 낫다고 판단하시고 추천 부탁하셨다고 하더라고.”
손 차장에게 말을 전달받고 나는 가슴속이 뜨겁게 타올랐다.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말 그대로 ‘사회 친구’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장 사장과 손 차장은 내게 그 편견을 깨게 해준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익이 아닌, 내 인생을 생각해 주는 사람들.
나는 몸속 저 깊숙이에서부터 감동이 밀려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생각에 잠겼고, 그런 나를 보며 손 차장은 재차 입을 열었다.
“민 과장. 아니, 지훈아.”
“예, 차장님.”
“근데 단순히 순천 메디컬 사장님의 추천만으로 네가 거기까지 올라갈 수는 없어. 대기업이 괜히 대기업이겠냐. 정말 많이 조사했을 거야. 지훈이 네가 그 자리에 부합했던 거고.”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올라가.”
“늦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충분히 생각해야 하는 게 당연하지. 사장님이 나보고 그러셨거든. 민 과장이 나한테 고민 상담 요청을 하는 날이 있을 거라고. 그때 사장님도 그 자리에 불러 달라고 하셨었어.”
“그래서 오늘 사장님도 알고 오신 거구나…….”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응. 민 과장이 오늘 술 한잔하자길래, 오늘이구나 싶더라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내 빈 술잔을 채우며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오늘 한 말들 전부 진심이야. 민 과장 나이에 이렇게 되는 거 정말 흔치 않은 일이고, 너무 좋은 기회야. 꼭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차장님.”
“이미 결정한 것 같지만, 내일이든 며칠 후든 사무실에서 제대로 한번 이야기해 줘.”
“예, 그러겠습니다.”
“나이 더 먹으면 그런 기회 절대 오지 않을 수도 있어. 알지? 윗선으로 올라갈수록 스카우트라는 말 없다는 거 말이야. 이미 높은 사람을 데리고 가는 회사는… 없어.”
“네, 명심하겠습니다.”
* * *
장 사장, 손 차장과의 술자리 이후 나는 더 신중히, 그리고 깊게 고민했다.
그리고 긴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코리아 메디컬로 올라가기로.
누가 내 상황을 본다면 당연한 결과를 왜 고민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만큼 여기 있는 사람들, 내 직장 동료들이 좋았으니까.
결심하고 사무실로 출근한 오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업무를 보고 있는 그때, 박수진 주임이 내게 다가왔다.
“민 과장님.”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가 두 잔 들려있었다.
“네, 주임님.”
그녀는 그중 한 잔을 내게 건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시죠?”
“예?”
“고민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세요, 요즘. 괜찮으신… 거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커피 잘 마실게요.”
그녀는 내 대답에 빙그레 눈웃음을 보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이야기하세요. 제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도움이 된다면 뭐든요.”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사무실에는 신입 직원 두 명과 한태준이 있었다.
살짝 파티션 너머로 바라보니, 그들의 책상에는 커피가 올라와 있지 않았다.
박 주임이 내게만 커피를 준 모양.
그리고 커피를 주며 보였던 나를 걱정하는 표정.
그녀는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회사에서 나와 오래된 사람은 장 사장과 손 차장. 그리고 박수진 주임이다.
박 주임은 지금까지 내게 몇 번의 고백까지 한 사람이다.
물론 그 고백들을 내가 거절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그대로인 듯 보였다.
내가 서울로 올라가더라도, 그녀에게만큼은 따로 알려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그녀를 위한 배려이자, 오래된 직장 동료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나는 커피를 모두 마신 뒤, 영업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이 아닌, 박 주임의 자리로 걸어갔다.
“저… 주임님.”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렸다.
“아! 과장님. 네, 무슨 일로……. 병원 가시는 거예요?”
“네. 이제 나가려고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고, 나는 다른 직원이 들을세라 몸을 그녀 쪽으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혹시 오늘 저녁에 퇴근하고 약속 있어요?”
그녀는 내 물음에 턱을 자신의 몸쪽으로 당기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퇴근하고 저랑 커피 한잔할래요? 주임님한테 할 말이 있어서요.”
내 말에 그녀의 시선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좋아요.”
나는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를 툭툭 치며 몸을 일으켰다.
“예, 이따가 봐요.”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먼저 밖에서 보자는 이야기를 처음 한 건 맞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만나자는 게 데이트 신청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했다.
더불어 그녀의 표정에는 설레거나 신나 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내가 무슨 말을 할까,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