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햇살이 드리우는 침실.
아무 알람 소리도 없이 오전이 다 가도록 늦잠을 잤다.
직장인에게 유일하게 늦잠이 허용되는 날, 바로 주말이니까.
몇 시가 됐는지는 개의치 않은 채 겨우 눈을 뜨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고요하던 집 안.
들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인 : 모던 정형외과 김사랑 원장]
나는 발신인을 확인한 뒤 곧바로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주말에 김 원장에게 무슨 일이지?
혹시 그때 그 범인으로 인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나는 놀란 마음을 가라앉힐 틈도 없이 수신 버튼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 민 과장님!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격양되어 있었다.
확실히 무슨 일이 생긴 모양.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던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 일어났다면 곧바로 나가야 한다고 본능적으로 생각을 한 것이지.
“어디에요. 무슨 일 있어요?”
다급한 내 목소리에 그녀는 큰 소리로 답했다.
- 잡았대!
“네?”
- 범인 말이야. 잡혔대!
“정말입니까?”
- 응. 방금 경찰서에서 전화 받았어.
다행이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걱정이 되는 마음으로 서 있었는데, 범인이 잡혔다는 말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크게 새어 나왔다.
- 민 과장님도 걱정했지? 고마워.
“그럼요. 걱정이야 당연히 했죠. 그래서 범인이 누구래요?”
제일 궁금했던 것.
당연히 범인이 누구인지였다.
김 원장은 내 질문에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 민 과장님, 혹시 그때 내가 병원에 자주 온다고 말했던 환자 기억 나?
“꽃다발 줬던 환자요?”
- 어! 맞아. 기억하네?
“당연하죠.”
- 그 환자였어. 경찰이 집으로 찾아가서 잡았는데, 글쎄… 그 집에 내 사진이 뭉텅이로 쏟아졌대…….
“스토커가 맞았네.”
역시 내가 예상한 그 환자.
그 환자가 스토커이자 범인이었다.
나는 내 생각이 맞았다는 생각에 휴대전화에 대고 혼잣말을 하듯 말을 내뱉었다.
- 응? 스토커인 줄 알았어?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내게 질문을 했고, 나는 곧바로 그녀에게 답했다.
“아… 뭐 집까지 그렇게 할 정도면 당연히 스토커겠구나, 생각했죠. 전 남자 친구든, 이기명 원장이든 원장님을 좋아하다가 스토킹을 한 거였을 테니까요.”
- 맞지. 아무튼, 진짜 무섭더라……. 밖에서 내가 돌아다니는 걸 엄청나게 찍었더라고.
“그러게요, 정말 무섭네요. 그래도 빨리 잡혀서 다행이에요. 이제 집으로 들어가세요?”
- 그래야지. 민 과장님, 이번에 나 많이 도와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제가 도운 게 뭐가 있다고요.”
- 민 과장님 없었으면… 나 진짜 여기서 뭐 어떻게 해야 했을지 몰랐을 것 같아. 내가 조만간 진짜 거하게 쏠게.
“하하. 예,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그녀와의 전화를 끊은 후,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김 원장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역시도 범인이 잡히지 않아 마음을 졸였으니까.
스토킹은 삐뚤어진 사랑?
절대 그건 사랑이 아니다.
그저 범죄일 뿐이지.
* * *
“안녕하세요.”
“아… 오셨어요?”
김사랑 원장은 자신의 담당 경찰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경찰 역시 그녀를 기다렸다는 듯 맞이했다.
“네, 제가 월요일에는 출근 때문에 오늘 왔어요.”
“예. 아까 전화로 말씀드려서 따로 오시지는 않아도 괜찮은데. 어떤 게 궁금하시다는 거죠?”
그녀는 경찰에게 물어볼 점이 있어 경찰서에 온 모양.
“저… 아무래도 궁금해서요.”
“예,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번에 저한테 전화 주셨을 때, 의심 가는 사람 알려달라고 하셨었잖아요.”
“그랬죠.”
“그때 분명히 제가 전 남자 친구랑 이기명이라는 남자. 이렇게 두 명만 알려드렸었는데, 어떻게…….”
경찰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끊었다.
“알려주신 게 총 세 명이었는데요?”
“네? 세 명이요?”
그녀는 경찰의 말을 처음 듣는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예. 모르셨어요? 권정열이라는 분. 이미 의심이 가서 알려주셨던 거 아닌가요?”
“어? 저는 권정열이라는 사람 알려드렸던 적이 없는데…….”
김 원장은 팔뚝에 소름이 돋는지 손으로 자신의 팔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녀의 반응에 그는 자신의 자료를 뒤적이며 답했다.
“남자 친구분이 전화로 알려주셨잖아요. 권정열 이 사람 좀 확인해 봐 달라고.”
경찰의 말에 김 원장은 아무런 말 없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노트에 적혀 있는 것을 마저 이야기했다.
“그리고 여자 친구분,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그 집에 계신다고 위험하니까 동네 순찰 좀 돌아달라, 범인 잡힐 때까지 잠복 좀 서달라, 몇 번이나 전화 주셨잖아요. 그래서 저희도 열심히 범인 찾았죠. 덕분에 범인도 금방 잡을 수 있었고요.”
김 원장의 주름진 미간은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앞에 앉은 경찰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남자… 친구요? 누구 말씀하시는 건지…….”
“남자 친구분 아니세요? 그때 신고하시고 현장에 오셨던 그분이요.”
그의 말에 김 원장은 미간을 펴냈다.
그리고 떡하니 벌어진 입을 한 손으로 가리듯 막았다.
‘뭐야. 민 과장님, 뒤에서 이렇게까지 했던 거야?’
* * *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법한 일들.
사기꾼인 김만호, 그리고 스토커 권정열까지.
그저 남에게만 일어날 법한 일들이 바로 내 근방에서 일어났다.
폭풍우가 몰아친 것처럼 너무 큰 사건 2개가 터진 후.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잔잔한 파도도 치지 않는 고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출근, 평범한 영업, 퇴근의 반복.
나를 비롯해 모두 언제 큰일이 있었냐는 듯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몫을 하며 지냈다.
이 평탄함에 금세 적응이 되어갈 때쯤.
오늘도 마찬가지로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영업을 나섰다.
오늘만 해도 몇 군데의 병원을 돌았고, 사무실로 복귀하려는 그때, 울리는 전화.
이제 주머니 속에서 큰 소리를 내며 울리는 휴대전화 벨 소리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은 울리니까.
휴대전화를 꺼내, 익숙하지 않은 번호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민지훈 과장님 전화 맞을까요?
“예, 그런데요. 어디서 전화 주셨을까요?”
- 아, 반갑습니다. 여기는 코리아 메디컬입니다.
“네? 어디요?”
나는 낯선 목소리, 그리고 익숙한 회사 이름에 놀라 전화를 건 상대방에게 되물었다.
- 코리아 메디컬 본사에서 연락 드렸습니다.
“코리아 메디컬이요?”
내가 이렇게 놀라 몇 번이고 재차 되묻는 이유.
바로 코리아 메디컬이라는 곳 때문이다.
코리아 메디컬은 우리나라에서 손에 꼽히는 의료기기 메디컬 회사다.
우리 광주 메디컬처럼 지역에서 손에 꼽히는 회사가 아니다.
병원을 상대로 영업하는 일반 의료기기 도소매 메디컬 회사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지.
쉽게 설명하자면, 업계 대기업 중 탑.
업계에서 코리아 메디컬과 견줄 만한 기업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 회사는 단순히 물건만 판매하는 게 아니라, 의료기기 역수출까지 하고 있다.
코리아 메디컬은 굳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리고 메디컬 업계에 종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누구나 알고 있는 기업.
그런 회사에서 나에게 왜 전화를 준 거지?
우리 광주 메디컬은 코리아 메디컬과 일을 하고 있지 않다.
왜냐, 코리아 메디컬은 워낙 대기업이다 보니 본사에서 바로 우리 회사에 물건을 넣지 않는다.
아니, 받을 수 없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중간에 업체를 한두 군데는 거쳐야 받을 수 있는 곳.
즉, 내가 코리아 메디컬과 통화를 할 리는 없다는 뜻이다.
- 예. 혹시 저희 회사 알고 계신가요?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저에게 전화를 주셨을까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시고?”
- 다름이 아니라…….
코리아 메디컬 직원은 내게 긴 이야기를 했다.
몇십 분의 통화가 이어졌다. 그 통화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바로 ‘스카우트’.
나는 통화를 하는 내내 입꼬리가 귀에 걸려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코리아 메디컬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다니!
믿기지 않을 만큼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통화를 하는 내내 내 심장 소리는 귓가에 들릴 듯 쿵쾅댔다.
예상하지도 못했던 일.
상상도 못한 통화 내용에 나는 전화를 끊은 뒤, 자동 통화 녹음이 된 파일을 다시 한번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코리아 메디컬 담당자는 내게 회사 메일이 아닌, 개인 메일 주소를 물었고 그쪽으로 자세한 내용을 보내겠다고 했다.
한참 전, 내게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졌던 적이 있다.
스카우트 제의.
그때 역시 기분은 좋았지만, 나는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었다.
이직에 대한 생각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지.
지금 역시 이직을 꿈꾸거나 한 적은 없다.
하지만 그 스카우트 제의를 한 회사가 코리아 메디컬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대기업의 느낌이 아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높은 곳, 꿈꿔본 적도 없는 그저 큰 회사.
나에게도 코리아 메디컬은 그런 존재였다.
스카우트 제의 전화를 끊은 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저 광주에서 우리 회사가 최고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나 또한 광주에서 이름을 날리는 메디컬 영업 직원이 되어보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에 임했다.
어쩌면 그 바람이 생각보다 조금 일찍 이뤄진 듯한 것이지.
내가 꿈꿔왔던, 그리고 바라왔던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 그다음 스텝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광주라는 이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더 큰물로 나아가야 한다.
하지만 내게 걸리는 단 한 가지.
바로 지금 내가 몸을 담고 있는 곳.
광주 메디컬이다.
이곳을 과연 내가 떠날 수 있을까?
* * *
코리아 메디컬과 통화를 한 지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수도 없이 생각하고 고민했다.
기회를 거절하고, 광주 메디컬에 남는 것이 맞는 걸까?
광주 메디컬을 떠나기로 하고, 기회를 잡는 것이 맞는 걸까?
그러다 문득 예전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던 때, 손지혁 차장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내가 스카우트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회사 선임이 아닌 인생 선배로서 안타까움을 드러냈었다.
기회를 날린 것을 보고 아쉽다고 생각을 했던 게지.
그리고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긴다면, 자신에게 편히 상담하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현재 내 마음은 코리아 메디컬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 있지만, 그래도 내가 항상 존경하던 선배에게 조언을 구하기로 결심했다.
“차장님.”
“어. 민 과장.”
“저…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십니까?”
“오늘 저녁?”
그는 사무실의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지금 시각은 오전 11시.
점심시간도 되지 않은 지금, 저녁 약속을 물어보는 나를 보며 무슨 일이 있음을 직감한 모양.
그는 고개를 홱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고민 생겼냐?”
“역시, 귀신이십니다.”
그는 내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술 한잔하자.”
나는 그의 말에 허리를 접었다.
* * *
오후 내내 병원을 돌아다녔기에, 손 차장과는 술집에서 바로 만나기로 약속했다.
시간에 맞춰 병원에서 직퇴를 한 나는 곧장 약속된 술집으로 향했다.
손 차장에게 조용히 고민 상담을 하기로 했기에, 오늘 술집은 룸이 있는 곳으로 예약했다.
내가 먼저 그에게 자리를 갖자고 했으니 이왕이면 괜찮은 곳에서 술을 사고 싶었다.
평소 손 차장에게 항상 얻어만 먹었으니까.
나는 예약자 명단을 확인 후, 해당 룸으로 걸어갔다.
룸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는 이곳.
나는 고개를 숙여 신발을 바라보았다.
“어?”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터져 나온 말.
바로 내 시선에는 나란히 벗어놓은 신발 두 켤레가 있었다.
대체 손 차장 말고 누가 더 있는 거지?
안으로 들어가야만 확인을 할 수 있었고, 나는 서둘러 신발을 벗은 후 문을 천천히 열었다.
“민 과장, 왔어?”
의자에 기댄 채 나를 반기는 두 사람.
손 차장.
그리고 바로 옆에는 장홍석 사장이 있었다.
“아! 사장님 오셨습니까?”
내 당황한 표정을 그는 읽어버린 듯했다.
“내가 오면 안 되는 자리였나? 하하.”
그랬다.
내가 손 차장에게 고민 상담하려고 한 것은 스카우트.
이직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말을 회사 사장인 장 사장에게 할 수는 없는 터.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고민이 있어 손 차장과 약속을 잡은 것인데, 무슨 고민이냐고 물어본다면 어떤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나는 장 사장의 말에 서둘러 표정을 풀고 미소를 장착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오셔도 되죠. 하핫.”
나는 자리에 앉으며 손 차장의 눈치를 살폈다.
손 차장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