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 결정 】
김사랑 원장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뜨며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같이 있는데,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전화를 했겠어요.”
“그런가? 하하.”
김 원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그럼 의심되는 사람은 그 두 명뿐인 거예요?”
그녀는 입술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잡혀야 할 텐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원장님! 저 그 담당 경찰 전화번호 좀 알려주세요.”
김 원장은 내 말에 가방을 뒤적여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분이 담당 형사님. 근데 왜?”
“아……. 뭐 저라도 생각나는 거 있으면 연락 드리려고요.”
그녀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머리를 흔들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농담 섞인 말투로 답했다.
“저 범인 아니니까, 의심하시지 말고요.”
내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쏘아보았다.
“알겠어, 의심 안 해.”
“그럼 저는 업무가 있어서 이만 가볼게요.”
나는 그녀가 건넨 명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어, 조심히 가.”
“아! 오늘은 퇴근하고 바로 올 거죠?”
“응?”
“집이요. 아직 범인도 안 잡혔고, 집은 위험해요.”
내 말에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숙소 잡았어. 내일부터는 집 들어가려고, 민 과장님한테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하고 말이야.”
“신세라니요. 혹시 우리 집이 불편했어요?”
“아니, 좋았어. 거기서 잠도 푹 잤고. 근데… 민 과장님이 나 때문에 불편해하는 건 더 싫어.”
“저는 괜찮아요. 원장님이 숙소 가시는 게 편하시면 가도 괜찮은데, 저는 정말 괜찮으니까 저희 집으로 오셔도 돼요.”
김 원장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저 불안하니 우리 집이 가장 안전할 거라 생각했던 것.
그래도 남녀 사이에 우리 집에서 며칠 머무르라고 했던 게, 그녀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김 원장을 더는 붙잡지 못했다.
대신 언제든 그녀가 원한다면 오라는 말만을 덧붙일 뿐.
“알겠어. 오늘은 숙소 잡았으니까, 자고. 내일부터는 집으로 들어갈 거야. 무슨 일 있거나 무서우면 바로 민 과장님한테 연락할게.”
“네, 그렇게 해요.”
“응. 나도 언제까지 그놈 때문에, 내 집 못 들어갈 수는 없지. 가해자 때문에 피해자인 내가 피해를 봐서는 안 되잖아.”
“맞죠. 그래도 언제든 필요하면 연락해요.”
그녀는 내 말에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던 정형외과에서 나와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출발을 하지 않은 채, 그 자리에서 다이어리와 펜을 집어 들었다.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페이지를 편 후, 펜으로 글씨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집 앞에 둔 곰 인형]
[병원 주차장 차 보닛 위의 곰 인형……. 그리고 꽃 한 송이]
모두 김 원장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게 동일인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소행이라면?
그녀의 말대로 내 다이어리에도 적었다.
[전 남자 친구]
[이기명 원장]
정말 이 두 사람 중에 범인이 있는 걸까?
나는 다이어리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곰 인형과 꽃 한 송이…….
왜 꽃 한 송이였을까?
보통 꽃을 구매하면 꽃다발로 주문하지 않나?
글자 위에 연속으로 동그라미 표시를 치며 생각하던 그때, 떠오르는 한 가지.
바로 ‘꽃다발’이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처음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전화가 오기 전.
그러니까 김 원장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받았던 것은 전화가 아니었다.
바로 배달로 온 꽃다발이었다.
김 원장과 나 모두 그 꽃다발의 존재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왜냐, 그건 바로 다른 사람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꽃다발을 보낸 사람이 이 모든 일을 한 동일인이라면?
의심 가는 인물에 추가할 사람이 생긴 것이지.
그때 꽃다발이 배달왔을 때, 김 원장도 그리고 병원의 간호사들도 입을 모아 환자일 거라고 했었다.
그 환자는 가벼운 인대 문제로 병원을 찾았고, 치료가 끝나 병원에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수차례 진료를 받으러 왔다는 것.
그때는 단순히 그 환자가 김 원장에게 마음을 품고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김 원장도 그리고 주변 간호사들까지.
그 사람이 그녀에게 마음을 품다 못해, 스토킹을 한 것이라면?
지금 내 예상이 그저 소설을 쓰는 것처럼 상상만으로 그칠 수도 있지만, 이게 진짜라면 빨리 범인을 잡아야 한다.
스토킹이란 건 상상보다 더 무섭고, 더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금은 집까지 알아냈고, 그 집의 비밀번호까지 알아낸 것이기에 이후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나는 그 환자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차에서 내려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든 건 내 예상일 뿐이니, 나는 김 원장이 아닌 친분이 있는 외래 간호사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차트를 보고 있던 그녀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과장님, 또 오셨어요? 원장님 방금 진료 시작하셨는데…….”
그녀는 김사랑 원장의 진료실을 바라보며 내게 말했다.
나는 애초에 김 원장이 아닌, 그녀를 만나러 온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대놓고 환자 정보를 달라고 할 수는 없는 터.
간호사에게 김 원장의 일을 설명하고 환자 정보를 받아 경찰에 넘기려고 한다면 병원에 협조 후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김 원장은 자신의 일을 병원에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바로 내가 그 환자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알아내는 것, 그것뿐이다.
“아……. 원장님한테 뭐 하나 확인하러 왔는데, 다음에 다시 올게요.”
나는 김 원장을 만나지 못한다는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면 조금 기다리시면 제가 원장님께 말씀드릴까요?”
“괜찮아요. 아, 근데 요즘도 그 환자분 자주 오세요?”
나는 그 환자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간호사에게 떠보듯 물었다.
내 앞에 있는 간호사는 그때, 김 원장에게 꽃 배달이 올 때 함께 있었던 간호사이기 때문이지.
더불어 외래에 가장 오래 있는 간호사이기에, 그 환자에 대해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네? 어떤 환자분이요?”
“그… 인대 다친 환자분인데…….”
나는 주변을 살펴보며, 그녀의 귀 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레 속삭이며 물었다.
“김사랑 원장님한테 관심 있는 것 같다고 한 그 환자요. 꽃다발 보낸 것 같다고 한 그 환자분.”
내 속삭임에 그녀는 손뼉을 한 번 부딪쳤다.
내 말에 그 환자가 생각난 모양.
“아! 그 권정열 님?”
권정열…….
그녀는 하도 그 환자를 자주보다 보니, 이름을 외운 듯했다.
나는 그 환자의 이름을 몰랐기에, 들어도 맞는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녀가 이름을 외울 정도라면 내가 찾는 환자가 맞겠지.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아… 네. 그분이 저랑 동갑이라고 했던가요?”
“권정열 님이……. 잠시만요.”
꽃다발을 줬을 때, 김 원장이 그 환자와 내가 동갑이라는 이야기를 했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서 권정열이라는 사람의 나이가 나와 동갑이고, 인대 치료를 한 사람이라면 김 원장이 말하는 사람과 동일할 거라 예상해 질문을 던졌다.
간호사는 내 말에 차트를 뒤적이며 그 환자의 생년월일을 확인했다.
그리고 금세 찾았는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 맞네요. 민 과장님이랑 나이가 같아요!”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답했다.
나는 재빨리 그녀가 들고 있는, 차트를 눈으로 스캔했다.
증상과 날짜가 적혀 있었지만, 그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가 찾는 것은 오로지 생년월일.
외우기에 많은 숫자가 아니었기에 나는 목표를 달성하고 머릿속으로 숫자를 되뇌었다.
그리고 입으로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정말요? 신기하네요. 하하.”
“그런데 권정열 님은 무슨 일로 찾으세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고, 나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말했다.
“아……. 그분 자주 오신다길래, 몸은 다 나으셨나 생각나서요.”
“민 과장님은 저희 병원 환자분까지 생각해 주시는 거예요? 진짜 대단하시다니까. 하핫.”
나는 숫자를 잊지 않기 위해 서둘러 그녀와 인사를 마무리한 뒤,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권정열이라는 환자.
그 사람이 스토커가 과연 맞을까?
정말 단순히 치료가 고마워서 김 원장에게 꽃다발을 주지는 않았을까?
다이어리에 적은 생년월일과 이름을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 꽃다발에 함께 있던 쪽지가 떠올랐다.
정확히 모든 글자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노란 옷이 잘 어울린다’라는 말이 분명 들어 있었는데…….
찾았다!
권정열이 수상하다는 증거.
바로 그 쪽지였다.
꽃다발에 있던, 노란 옷이 잘 어울린다고 적힌 쪽지.
그 멘트는 지금 생각해 보니 수상할 수밖에 없는 문구다.
평소 의사들은 사복을 입고 출퇴근을 한다.
그리고 겉옷만을 벗어둔 채, 의사 가운을 걸치고 일하는 거지.
하지만 여자 의사인 김사랑 원장은 남자 의사들과는 달리 평소 조금 밝고, 튀는 옷을 입고 다녔다.
남자 의사들은 보통 바지에 셔츠, 바지에 면티 등을 입는다.
그러나 김사랑 원장은 주로 치마도 입었고, 원피스를 입기도 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치마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항상 병원 내에서 바지와 편한 윗옷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의사 가운을 걸쳤었지.
그러니, 노란 옷이 잘 어울린다는 그 말.
즉, 사복을 입은 김 원장을 본 것이다.
환자가 김 원장을 보려면 병원에서 보았어야 했는데, 사복을 보았다는 건?
병원 밖에서 보았다는 뜻이겠지.
그러니까 그 환자가 범인이 맞다면, 김 원장을 병원 밖에서도 지켜보았다는 말이다.
물론 이 모든 말이 맞으려면, 권정열이 범인인 그 스토커여야 하겠지.
나는 서둘러 김 원장에게 받은 명함.
담당 경찰에게 전화를 걸어 권정열의 신상 정보와 함께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 * *
“크으. 술맛 좋다. 고맙다, 홍석아.”
“아닙니다, 형님. 다 제 직원 덕분이죠. 하하.”
장홍석 사장과 순천 호남 골드 메디컬 사장은 술잔을 입에 털은 후 대화를 나눴다.
“어쨌든, 너희 회사가 김만호 그 자식 건에 같이 있지 않았으면 우리는 돈 보냈을 거야.”
장 사장은 그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답했다.
“진짜 다행입니다.”
“근데 그 과장이라는 애는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예?”
“아니, 홍석이 너는 어떻게 그런 놈을 데리고 있었어? 내 주변에 이야기해도 다들 대단하다고 칭찬 일색이야.”
“하하. 전 회사에서부터 함께 일하던 놈인데,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합니다. 센스도 좋고요.”
그들의 테이블에는 온통 민지훈의 이야기로 대화가 흘렀다.
“내가 광주 쪽 메디컬에 알아보니까, 이미 소문이 좀 난 친구더라고.”
“맞습니다. 요즘 저희 회사가 급부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하. 그래서 저희 회사와 함께, 지훈이도 이름을 날리고 있나 보더라고요.”
광주 메디컬과 민지훈의 칭찬에 장 사장의 어깨는 하늘 높이 치솟았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주변을 살피며 어깨를 으쓱하는 장 사장.
그들은 대화 주제를 바꾸고, 술병을 여러 병 비워 냈다.
그렇게 몇 병의 술이 비워지고, 호남 골드 메디컬 사장이 장 사장을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홍석아.”
“예, 형님.”
“근데 말이다. 내가 이 업계에 오래 일했잖냐.”
“그러시죠. 저보다 더 오래되셨으니까요.”
“그런 직원 데리고 있는 거, 생각보다 힘들어.”
“네? 그게 무슨…….”
그의 말에 장 사장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능력이 너무 뛰어나잖아. 물론 사장 입장에서 어디 내놔도 일 잘하는 직원? 데리고 있는 거 좋지. 돈도 많이 벌어오고, 병원도 많이 따오고 말이야.”
그의 말에 장 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남 골드 메디컬 사장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는 미안한 마음도 들더라. 이놈이 더 클 수 있는데, 내 우물이 작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무슨 말인 줄 알겠냐?”
장 사장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압니다. 지훈이 벌써 다른 곳에서 스카우트도 받았었습니다.”
“벌써?”
“네. 저한테는 말 안 하고 넘긴 모양이던데, 그거 알고 난 이후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장 사장의 말에 그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 스카우트는 거절하고 끝났던데, 또 언젠가 다른 회사에서 연락이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항상 하고 있습니다.”
장 사장은 말을 끝내자마자 씁쓸한 표정과 함께 술을 들이켰다.
“그래서… 또 스카우트 제의가 오면 어떻게 하게?”
그의 말에 테이블에는 몇 초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생각해 봤을 거 아니야?”
재촉하는 그에게 장 사장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렇게 일 잘하는 놈, 어디 보내고 싶은 사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붙잡으려고?”
“글쎄요…….”
장 사장은 소주를 들며,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