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통화를 할수록 미간이 일그러지는 장홍석 사장.
그의 통화 내용을 들으니, 아마 담당 경찰과 통화를 하는 듯했다.
나와 손지혁 차장은 숨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의 통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장 사장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아직 김만호가 잡히지는 않은 모양.
몇 분의 통화가 끝난 후, 장 사장은 휴대전화를 귀에서 떼어냈다.
그가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자마자 손 차장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합니까?”
“김만호 못 잡았다는 거죠?”
우리의 질문에 장 사장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김만호는 못 잡았대. 어제 신고가 들어간 거니까, 조사 착수는 했다고 하거든. 그런데 경남 쪽에는 병원은 물론이고, 메디컬 회사들까지 전부 입금 끝났단다.”
“네?”
그의 말에 나와 손 차장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불행 중 다행히도 우리와 순천 호남 골드 메디컬만이 입금을 하지 않은 것.
“왜지… 분명 날짜는 같았을 텐데…….”
김만호는 모든 병원, 메디컬의 입금 날짜를 동일하게 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경남 쪽에는 메디컬까지 모두 입금을 한 상태.
나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고, 내 말에 손 차장이 답을 했다.
“이유가 뭐 있겠냐. 하루빨리 입금받고 끝내려고 했겠지. 광주 쪽이랑 그냥 날짜가 틀어진 거 아닐까?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말이야.”
“그렇긴 합니다만……. 와, 그럼 김만호가 입금받은 금액만 해도 어마어마하겠는데요?”
내 말에 장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다. 경남 쪽에는 피해 거래처도, 피해액도 많아. 광주 병원 두 곳까지 합치면 거의 10억 좀 안 되는 것 같다더라.”
“10억이요?”
정말 놀라운 금액이다.
10억이라니…….
회사원이라면 평생 만져보기도 힘든 돈.
자가혈 주사와 같은 큰 본사에서 팀장이라는 직책까지 달 정도면 꽤 오랜 기간을 근무했을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회사 생활을 하던 사람이 대체 왜 퇴사까지 하면서 사기를 쳤을까?
적은 것도 아니고 큰 규모로 말이다.
걸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을 했던 걸까?
나와 손 차장이 금액에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 장 사장은 옅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김만호 통장은 거래 정지시켰다더라. 그리고 김만호랑 접촉했던 직원한테 아는 거 있으면 뭐든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하더라고. 손 차장도 한번 만났다며?”
“네, 그때 술자리 한번 가졌습니다.”
“그래. 손 차장도 그렇고, 민 과장은 특히 몇 번 만났으니까 아는 거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 줘.”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거라고는 전주의 사무실뿐이다.
그것도 이미 사업자 등록증에 나와 있는 주소이기에 나만 아는 것도 아니지.
나와 손 차장은 장 사장과의 이야기를 마친 후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민 과장은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지.”
나를 붙잡는 장 사장.
그의 말에 손 차장은 나를 한 번 쓰윽 바라보더니, 이내 자리로 돌아갔다.
“민 과장.”
“예, 사장님.”
“순천에 호남 골드 메디컬 사장님이 민 과장한테 많이 고맙다고 전해 달라셨어.”
호남 골드 메디컬에게 급히 알린 덕에 입금을 막은 것에 대한 이야기인 듯했다.
그는 턱을 치켜들며 내게 말을 이어 갔다.
“거기 형님이, 그러니까 호남 골드 메디컬 사장님이 서울에 메디컬들도 많이 아시거든.”
“예, 서울 쪽으로도 거래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응. 그래서 그쪽이랑도 평소에 많이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김만호 이야기가 사기인 줄 전혀 몰랐다고 하더라고. 의심조차 못 했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NA 제품이라는 말에 다들 의심을 안 했던 것 같습니다.”
“맞아. 다들 기회가 왔다는 생각에 들떠 있던 거지. 수입되는 것만을 기다렸으니까…….”
그는 김만호 사기 행각이 또다시 떠오르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민 과장. 저녁에 약속 있나?”
“오늘 저녁 말씀이십니까?”
그는 입술을 딱 붙인 채로 눈썹을 들썩였다.
오늘 저녁에는 김사랑 원장이 어제처럼 우리 집으로 와 잠을 청할 것이다.
비록 어제 김 원장의 집이 그렇게 되었지만, 바로 다음 날인 오늘, 그곳에 가서 잠을 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집은 정리도 덜 됐을뿐더러, 아직 범인이 잡히기 전이니까 말이다.
어제 불안에 떨던 그녀의 모습을 본 후로 김 원장을 우리 집에 덩그러니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장 사장의 제안을 어떻게 거절해야 하나 싶은 마음에 대답을 망설였다.
약속이 있다고 거절해도 되지만, 회식도 아니고 사장이 따로 청하는 저녁 약속을 단숨에 거절하기는 쉽지 않다.
“아……. 제가 오늘은 일이…….”
나는 말끝을 흐리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장 사장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순천에 그 형님이 나랑 오늘 광주에서 한잔하기로 했거든. 민 과장도 데리고 나갈까 했지. 일 있으면 못 온다고 해도 괜찮아.”
“죄송합니다, 사장님. 오늘은 제가 저녁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참석 못 할 것 같습니다.”
나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괜찮아. 민 과장 같이 만나자고 형님이랑 약속 잡은 것도 아니고, 내가 소개해 주려고 한 거니까. 이 형님은 자주 만나니까, 다음에 같이 한번 보자.”
“예, 정말 죄송합니다. 사장님.”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근데 집안에 무슨 큰일 있는 건 아니지?”
여자 친구도 없고, 광주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 내가 약속을 거절한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광주 메디컬로 온 후로는 한 번도 없었지.
그런 내가 저녁 약속을 거절하자,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 걱정되는 모양.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 그럼 가서 일 봐. 다음에 다시 약속 잡자고.”
“예,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영업이라는 바닥은 무엇보다 인맥이 중요하다.
영업 실력이 당연히 중요하지만, 인맥도 영업 실력에 들어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이 업계에 일하면서 낯선 이를 만나는 것, 그리고 낯선 이를 소개받는 자리는 늘 환영이었다.
그것도 발이 넓은 메디컬 사장님과의 술자리.
그 자리가 어찌 탐이 안 나겠는가.
장 사장과의 저녁 자리, 그 기회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 지금 순간만큼은 순천의 호남 골드 메디컬보다 김사랑 원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혼자 두었다가, 또 그런 일을 당하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 * *
오전 업무를 마친 후,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자마자 나는 모던 정형외과로 향했다.
김사랑 원장이 경찰서를 갔다가 오후에 병원으로 복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똑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색한 미소를 짓고 나를 반기는 김 원장.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경찰서는 잘 다녀왔어요?”
“응, 우선 앉아. 민 과장님.”
나는 그녀의 앞에 의자에 앉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그녀는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경찰서 가서 CCTV 보고 방금 들어왔어.”
“어때요? 뭐 좀 나왔어요?”
내 말에 그녀는 눈을 내리깔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녀의 태도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요?”
내 물음에 그녀는 팔자 눈썹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복도에는 CCTV가 없대.”
“네? 집 앞 복도 말하는 거죠? 거기에 CCTV가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녀의 집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집들이 한 줄로 나란히 펼쳐져 있는 복도식 구조이다.
그곳을 비추는 CCTV가 있어야 그녀의 집에 누군가가 침입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
복도에 CCTV가 없다는 것은 김 원장의 집에 누가 들어간 지 확인을 못 한다는 말.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움찔거렸다.
“오피스텔 쪽에 문의했는데, 요즘에는 뭐 사생활 보호 어쩌고 하면서 집 문을 비추는 곳에는 CCTV를 설치 안 했다는 거야.”
나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생활 보호랍시고 거기를 안 찍었다가 이렇게 범죄가 일어나면……. 누구를 위한 사생활 보호인지 모르겠네.”
나는 다소 흥분된 말투로 언성을 높였다.
“그러게 말이야. 사생활 보호하다가 사람 죽겠어. 근데 또 요즘 이런 건물이 생각보다 많다고 하더라.”
그녀는 한껏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 어떻게 한대요? 건물에 다른 CCTV는 없는 거예요?”
그녀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말했다.
“있대. 그나마 다행인지, 출입구랑 엘리베이터에는 있어.”
“하…….”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한숨을 쉰 이유.
바로 그 오피스텔의 인원수 때문이다.
그녀가 사는 오피스텔은 사람이 많은 원룸촌, 그리고 그 앞은 먹자골목이 펼쳐져 있다.
즉, 유동 인구가 많다는 뜻이지.
또 그녀의 오피스텔 건물에는 많은 인원이 살고 있다.
아마 출입구와 엘리베이터 CCTV에는 수많은 사람이 찍혔을 것이고, 그걸 하나하나 살피며 범인이 누구인지 찾기가 힘들 것이라 예상됐다.
그녀는 내 한숨을 따라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근데 범행 시간도 모르잖아. 내가 워낙 일찍 출근을 하니까……. 우리 오피스텔 인원수도 많고. 내가 집을 나온 이후부터 퇴근해서 들어갈 때까지 그 많은 사람이 오가는 걸 다 확인해야 해.”
“CCTV가 선명하게 사람 얼굴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것만 지켜보면서 찾는 게 너무 힘들겠는데요? 애초에 의심 가는 인물을 좀 제시해 둬야겠네요.”
“맞아. 그래서 나보고 의심 가는 사람이 있냐고 묻더라고.”
“그래서요? 의심 가는 사람은 있으세요?”
김 원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용의 선상에 오른 인물이 있었던 모양.
하긴,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전화부터 집 앞에 두었던 곰 인형.
그 외에도 일이 있었기에 그녀도 평소 생각을 했었을 터.
“전 남자 친구.”
“네? 광주에 없잖아요.”
지난번 발신 번호 표시 제한으로 전화가 걸려올 때.
그녀는 그 발신자가 아마 전 남자 친구일 거라 예상했었다.
보통 그런 전화는 옛 애인의 전화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알기로는 그녀의 전 남자 친구는 서울에 있다고 들었고, 그녀의 옆에 맴돌며 이런 짓을 하기에 장소가 너무 멀었으니까.
“맞아. 근데 정말 나에게 이런 짓을 할 사람이 없거든.”
그녀의 말도 이해가 됐다.
김 원장 근처에는 인물이 없었다.
이럴 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정말 그녀의 주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한 명 더 있어.”
“누구요?”
“이기명 원장.”
이기명 원장.
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에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겼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생각, ‘볼링’.
한참 전, 모던 정형외과의 박승호 원장과 김 원장 그리고 나까지 셋이서 볼링을 치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볼링을 쳤던 박 원장의 동기이자, 타 병원의 원장.
더불어 능글맞은 표정으로 김 원장을 바라보던 그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이 바로 이기명이었다.
나는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기에 그녀에게 물었다.
“그때 그 볼링장, 이기명 원장이요?”
“응, 맞아.”
“그 사람이 왜요? 무슨 일 있었던 거죠?”
그녀는 내 눈을 피하며 답했다.
“그 원장님이 자꾸 사적으로 만나자는 연락이 오는 거야. 내가 몇 번 거절했었거든.”
“그런데요?”
“근데도 꾸준히 연락하더라고. 나중에는 내가 몇 번 씹었더니, 이후에는 안 왔어. 그래서 그냥 나한테 이제 연락 안 하는구나 싶었지.”
그녀의 말에 나는 한 손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수차례의 대시를 했지만, 그녀가 끈질기게 밀어내니 이런 행동을 했다라?
용의 선상에 오를 만한 인물이기는 하다.
그때 볼링장에서 그녀를 바라보던 눈빛, 그리고 말투와 태도.
이런 일까지 저지를 사람이라고 확신은 되지 않지만, 의심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는 하다.
“그리고 진짜 더는 없어. 아무도. 민 과장님도 알잖아. 광주에서 내 주변에 남자 자체가 없어.”
“그러네요. 남사친도 저 하나뿐인 거 맞죠?”
“맞지. 혹시 민 과장님은 아니지……?”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곁눈질로 쏘아보았다.
그녀의 장난기 섞인 표정과 말투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제가 왜 원장님에게 그런 짓을 해요. 하하. 저를 의심하시는 거예요?”
“민 과장님이 곰 인형 때에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 뭐야, 말하다 보니까 그러네! 진짜 항상 현장에 민 과장님이 있었어. 뭐야?”
그녀는 농담으로 시작한 말에 소름이 끼친다는 듯 자신의 양팔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