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나는 모던 정형외과 박승호 원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동기네 병원에서도 NA 바이오 제품을 엄청나게 찾고 있다고 하더라고. 자기네 담당 메디컬에다가 구해 달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못 구했나 봐.”
박 원장 동기의 말이 맞다.
현재 NA 바이오 제품을 못 구하는 것 말이다.
라운드 바이오 김 대표가 독점으로 가지고 온 것이니, 타 메디컬에서 아무리 노력해 봐야 따내 올 수가 없는 것이지.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엄청난 기회를 가지고 온 겁니다, 원장님. 타 메디컬에서도 언젠가 받아 올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절대 가지고 오지 못할 겁니다.”
“크으. 민 과장 대단하네. 얼마 전에 관절 로봇 가지고 오더니, 이번에는 진짜 아무도 못 가져오는 NA 바이오 제품을 들고 오고 말이야.”
내가 모던 정형외과를 가장 먼저 온 이유.
바로 관절 로봇 때문이다.
최근에 내가 관절 로봇 영업을 했었고, 현재 선발 주자로 모던 정형외과가 관절 로봇을 보유하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광주에서 가장 먼저 관절 로봇을 넣어줬기에, 관계가 호의적인 내가 NA 바이오 제품을 가지고 온다면 당연히 써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니, NA 바이오 제품은 당연히 썼을 테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가장 첫 번째로 온 것은 그들에게 굳히기로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내가 모던 정형외과를 담당 병원 중, 가장 첫 번째로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게 다시 한번 입지를 굳히는 것이지.
모던 정형외과는 광주에서 큰 병원 중 하나이기에 그들과의 관계가 단단할수록 나에게도 굳게 믿을 만한 병원이 자리 잡는 것.
“저도 NA 바이오 제품 받는다고 하게 되자마자 정말 기뻤습니다. 다들 원하시는 제품 아닙니까. 그래서 가장 먼저 모던 정형외과로 달려왔습니다. 하하.”
“그래. 우리가 그래도 광주에서 항상 앞서 나가는 병원이 돼야 하니까 말이야.”
“예, 그렇죠. 모던 정형외과가 잘돼야 저도 잘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는 내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물건 납품 일자는 제가 한 번 더 확인 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원장님은 예상 발주 개수를 알려주시면…….”
박 원장은 내 말을 자르며 물었다.
“그런데 민 과장.”
“예, 원장님.”
“잠깐만 나 그 동기한테 전화 좀 하고.”
“네? 무슨 일로……. 혹시 NA 바이오 건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전화를 찾기 위해 의사 가운 주머니를 뒤적였다.
나는 서둘러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안 됩니다, 원장님.”
단호한 내 말에 그는 놀라 손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왜 안 되는 거야?”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라운드 바이오 김 대표와 있었던 이야기를 말이다.
한참 설명을 한 뒤, 그는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지금 계약하고 물건이 납품되기 전까지는 타 병원에 알리면 안 된다는 거지?”
“네, 맞습니다. 병원에 알리시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데, 병원에서 메디컬 업체로 그 소식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NA 바이오 측에서도 단독으로 진행하는 일이라…….”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다음 주에 물건 받고 나서는 알려도 상관없는 일인 거고?”
“예. 진행된 후에는 상관없습니다.”
라운드 바이오 김 대표가 나에게 요구한 사항으로 납품이 시작되기 전에 자가혈 주사 본사에서 이 사실을 알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이다.
박 원장은 내 말에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알겠어. 동기 놈한테 내가 먼저 사용해 본다고 자랑하려고 했지. 다음 주에 물건 받으면 자랑해야겠다. 하하.”
“넵. 금방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럼 사용량만 미리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원장님들께는…….”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말을 잘라냈다.
“아니야, 그럴 필요 없어. 우리 매일 회의하거든. 내가 이야기할게. 어차피 NA 바이오 제품 안 쓸 것도 아니고 말이야.”
“예, 감사합니다. 원장님. 제가 날짜 확인하고 연락 다시 드리겠습니다.”
박 원장의 진료실에서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걸어가던 그때, 누군가 내 뒤로 다가와 등을 두드렸다.
“민 과장님!”
나는 그 손길과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자, 환하게 웃으며 서 있는 김사랑 원장.
“어? 원장님.”
“뭐야. 언제 왔었어?”
“아까 와서 박승호 원장님 뵙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녀는 코끝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그래? 나 진료 끝나서 쉬고 있었는데, 나는 왜 안 만나고 가?”
“그러셨습니까? 저는 아까 진료실에 진료 중이라 표시되어 있길래, 박 원장님만 뵙고 왔어요.”
김 원장은 곁눈질로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손으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커피 한잔하실까요?”
내 질문에 그녀는 곧장 쏘아보던 눈빛을 풀어내고 답했다.
“좋아!”
김 원장과 함께 나온 병원 앞 벤치.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한 잔씩 손에 들고 자리에 앉았다.
“앞에 카페 있는데, 이거로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내 말에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응, 이것도 좋아. 가끔 이렇게 찐하게 단 자판기 커피 마시면 기분이 좋더라고.”
그녀는 뜨거운 커피를 양손으로 감싸 쥔 채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리고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병원 왔어?”
“새로운 제품이 있어서 박 원장님께 말씀드리러 왔습니다. 박 원장님이 회의 때 원장님들께 따로 말씀드리시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나는 김 원장을 만나 이야기하지 않았기에, 그녀가 서운한 마음이 들까 싶어 제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무슨 제품이냐면요…….”
“아니야. 박 원장님이 어차피 회의 때 말씀하신다며, 괜찮아. 그때 듣지 뭐.”
그녀는 어깨를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 원장님. 블랙박스는 고치셨습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움직이던 입을 멈추고 당황한 얼굴로 내 눈을 피했다.
“아… 그게, 내가 고치려고 했는데…….”
“원장님!”
나는 그녀를 향해 큰 소리를 냈다.
“위험해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누가 또 차에 그런 짓을 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혹여나 차 사고 났을 때도…….”
그녀는 다소 흥분한 나를 보며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알겠어, 알겠다고. 진짜 오늘은 꼭 고칠게. 바빠서 고치러 갈 시간이 없었어. 정말이야. 이제 주말이니까 꼭 고칠게.”
“네. 진짜 꼭 고치세요. 위험합니다, 진짜로요.”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고,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 뒤로는 무슨 일 없으셨죠?”
“어. 그때 민 과장님이랑 주차장에서 인형이랑 꽃 봤던 이후로는 아무것도 없었어.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 문자도 전화도 그리고 집이나 차에도 별일은 없어.”
“다행이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항상 조심하시고요.”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그녀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거나, 표정이 굳는다는 둥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럴게. 근데 그냥 단순히 해프닝이었을지도 몰라.”
“그러기에는…….”
김 원장은 내 말을 자르며 답했다.
“그러니까 민 과장님도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정말 별일도 아닌데 괜히 벌벌 떨 필요는 없잖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생각하려고.”
내가 그녀를 걱정한답시고 하는 말이 오히려 그녀에게 더한 불안감을 줄까 걱정이 됐다.
김 원장도 애써 그 상황을 외면하려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항상 조심하시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시고요.”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이어리에 적혀 있는 다음 행선지.
나는 그곳을 향해 출발했다.
광주 담당 병원 중 큰 곳부터 영업을 시작하려고 한 나의 다음 병원은 바로 ‘광주 권역외상센터’.
광주 권역외상센터는 새로운 물건이 출시되었을 때, 굳이 영업을 오지 않는 곳이다.
왜냐, 이미 이 병원에는 대부분 의료 기기가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NA 바이오 제품은 국내에 사용하는 곳이 한 군데도 없기 때문에 오랜만에 이 병원을 찾게 된 것.
광주 권역외상센터는 환자 수도 상당하기에 납품을 하기만 하면 매출은 걱정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모던 정형외과 다음으로 찾아온 곳이 바로 이곳이다.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습니까, 교수님?”
저 멀리서 나를 반기는 유재필 교수.
오랜만에 보는 얼굴.
그는 의사 가운을 휘날리며 내게 다가왔다.
“어, 민 과장. 오랜만이야. 물건 납품할 때도 항상 내가 바빠서 얼굴을 못 봤네.”
“예. 납품 때마다 교수님 기다렸었는데, 워낙 환자가 많은 곳이다 보니 한 번을 못 뵀습니다.”
그는 내게 오랜만이라며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는 양손 가득 들고 있는 커피 캐리어를 한쪽에 내려놓은 채 그의 손을 잡았다.
“들어가지. 아까 통화한 의사들 다 안에 있어.”
“넵.”
광주 권역외상센터에 오기 전, 이미 유 교수와 통화를 했었다.
NA 바이오 물건에 관한 이야기를 대충 전달했고, 유 교수는 그 제품이라면 여러 의사와 함께 듣겠다며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를 따라 들어간 회의실.
넓은 곳은 아니었지만, 타원형 테이블에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여러 개의 의자 중 나와 유 교수의 자리 2개를 제외하고는 이미 의사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미리 인원수를 유 교수에게 파악했었고, 들고 온 커피를 그들에게 건네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광주 메디컬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그들은 나를 반기며 답했고, 얼굴을 아는 의사들도 몇몇 보였다.
나는 이어 가방에서 NA 바이오 카탈로그를 꺼내 그들 앞에 한 부씩을 건넸다.
그리고 곧장 테이블 옆에 있는 스탠드 칠판 앞에 섰다.
“먼저 시간 내주셔서 다들 감사드립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릴 제품은 NA 바이오의 줄기세포…….”
나는 제품에 대해 소개를 시작했고, 그들은 커피를 마실 때와는 달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칠판을 응시했다.
다들 NA 바이오 제품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듯 보였고, 그들의 호응 속에 나는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그렇게 한참 제품에 관한 설명을 끝낸 뒤, 그들은 썰물처럼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회의실에 남은 사람은 나와 유재필 교수뿐.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교수님.”
“아니야. NA 바이오 제품이라는 말에 다른 교수들도 듣고 싶다고 하더라고. 알잖아, 다들 이 제품에 대해 궁금해하는 거.”
“맞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찾아뵀습니다.”
나는 뿌듯한 마음에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앞에 놓인 카탈로그를 챙기고 있는데 유 교수가 뒤를 돌아 회의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하고 내 쪽으로 다가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민 과장.”
“예, 교수님.”
“이 제품 확실한 건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음……. 사실 내가 이 제품에 대해서 바로 지난주에 서울에 대학교수와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한… 2년 전부터인가? 이 제품이 학회에 나오기 시작했던 게 말이야.”
“예. 1년 반 정도 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서 이 제품에 대해 많은 메디컬에서 컨택을 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런데 최근에 한 메디컬 회사에서 NA 바이오 측과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나라에는 수출 생각이 없다고 했다더라고.”
그는 심각한 얼굴로 카탈로그를 바라보며 말했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지난주라는 말씀이시죠?”
“응. 제품 개발 후 자기네 나라에만 사용하다가 내년 정도나 돼야 수출 생각이 있다고 답변을 받았다는데, 벌써 수입을 받았다는 게…….”
그는 말끝을 흐리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그리고 나는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는 그에게 답했다.
“교수님. 아마 NA 바이오 측에서도 국내 라운드 바이오 회사와 독점 계약이기에 그런 답변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세한 건 저도 라운드 바이오 대표와 이야기를 한 번 더 나눠 보겠습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잖습니까. 독점이라 출시 전까지는 알려지지 않는다는 걸요.”
“하긴, 서울에 있는 메디컬 회사에 거절하려고 둘러댄 말이겠네.”
“예, 그래도 제가 재차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 우리야 NA 바이오 제품 사용하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이지. 우리도 무조건 사용할 테니, 다음에 입고 날짜랑 견적서 함께 넣어줘.”
“넵. 감사합니다, 교수님.”
오늘 찾아간 병원은 두 군데.
내 영업력을 떠나, 제품의 인지도로 벌써 구두 계약을 따냈다.
병원에서 당차게 걸어 나오는 내 입꼬리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지이잉.
주머니 속 울리는 휴대전화.
바로 라운드 바이오 김 대표에게서 온 문자였다.
[민 과장님. 얼굴 한번 봬야죠? 날짜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