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그가 건넨 종이에는 관절 로봇 예상 판매 대수부터 기기 한 대를 판매할 때마다 남는 이윤이 적혀 있었다.
총판은 전국에 한 군데만을 잡을 거라 적혀 있었고, 내용도 굉장히 상세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나는 그가 건넨 종이를 하나씩 꼼꼼히 살펴 읽고 있었고, 그는 나를 보며 물었다.
“총판… 광주 메디컬에 맡겼으면 하는데, 어떠세요?”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잠깐 보았던 서류를 보면, 본사의 제안을 거절할 만한 이유는 정말이지 단 하나도 없었다.
총판이 된 후 단점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본사에서 물건을 받아 다른 메디컬에 보내주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
우리가 번거로울 일은 없다.
그저 메디컬들에서 주문 연락이 온다는 거?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주문이기에, 그 연락으로 물건을 팔게 되면 돈을 벌게 되는 것이지.
총판이라 함은 어떻게 보면 마진을 남겨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다.
물론 우리의 영업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당연히 그의 제안을 거절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섣불리 제안을 덥석 받지 않는 이유.
왜 전국에 하나밖에 선택하지 않을 총판 회사가 바로 우리 광주 메디컬이냐는 것이다.
우리 회사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만큼 전국에는 내로라하는 메디컬 회사가 많았고, 그중 우리에게 총판을 맡기는 이유가 궁금했다.
“저희야 총판을 주신다면 당연히 감사한 일이죠. 하지만 광주 메디컬로 지정해 주시는 이유가 알고 싶습니다.”
“이유라…….”
내 눈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시선은 허공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일도 그렇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가 말을 낚아챘다.
오늘 나와의 접촉 사고로 인해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뿐이라면 이 제안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물론 총판을 단칼에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부담스러운 마음이 가득한 것은 사실.
단순히 이 일로만 큰 건을 받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오늘 일 때문에 저에게 총판을 주신다면, 저는 신중하게 저희 광주 메디컬을 평가해 봐 달라고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네?”
그는 내 말에 놀란 듯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금세 내리고 재차 되물었다.
나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
“물론 저희에게 총판을 주신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만. 오늘 일로만 그러시는 거라면 받는 제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마음이 조금 있어서요.”
내 말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요. 저 돈 좋아하는 사업가입니다. 돈이 되는 일에만 움직인다는 거죠. 제가 광역시 메디컬 중에 알아볼 때, 광주 메디컬 그리고 민지훈 과장님을 알아보게 된 것도 같은 이유죠.”
그는 어깨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어 갔다.
“광주 메디컬이 오래된 회사는 아니지만, 광주 내에서 입지를 굳혔다고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만큼 성장 가능성도 확인했고요. 거기에 민지훈 과장님의 영업력까지 말이죠.”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회사는 원래부터 큰 회사가 아니었습니다. 개발하면서 점차 커진 회사다 보니, 광주 메디컬처럼 성장 가능성이 보이는 회사를 좋아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총판을 드릴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저희 회사를 좋게 평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광주에서 최고가 되는 메디컬 회사가 되려고 노력 중입니다. 저 역시 그렇고요.”
“오늘 일로도 충분히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제가 총판을 드리는 건 아니니까요. 제안서 보시고 충분히 검토하신 후에 결정해 주셔도 됩니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제안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예. 아시다시피 제가 과장이다 보니, 결정을 제가 할 수가 없어서요. 회사에 보고 후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그는 양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에게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늘 있었던 일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그는 나를 보며 재차 고개를 숙였다.
* * *
“안녕하십니까."
월요일 아침, 총판 제안서를 들고 사무실로 출근했다.
장홍석 사장은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이 아닌, 병원으로 먼저 직출했다.
사무실로 출근한 건 손지혁 차장과 나 그리고 밑에 직원들뿐.
모두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자신들의 일과를 시작했다.
나는 가장 급한 업무, 제안서를 들고 손 차장에게 다가갔다.
“차장님. 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서류를 파일에 끼워 들고 비장한 얼굴로 다가가자 그는 자리에 앉아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뭔데, 무슨 일이야?”
그리고는 시선을 내려 내가 들고 있는 파일철을 바라보며 고개로 회의실을 가리켰다.
회의실에 들어와 지난 토요일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손 차장에게 제안서를 내밀었다.
그는 제안서를 보기 전 내 말을 듣다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뭐라고? 관절 로봇 본사 대표가?”
“예. 관절 로봇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알지. 어떻게 모르겠어. 안 그래도 저번에 사장님이랑 병원 같이 들어갔다가 관절 로봇을 병원에서 물어봤었거든.”
“정말입니까? 벌써 광주에서 찾으시는 분도 계시는군요.”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사장님한테 말씀드려야겠네. 잠시만.”
손 차장은 한껏 달아오른 얼굴로 장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장님! 어디십니까? 우리 지훈이가 또 일낸 거 같은데요. 아, 오셨어요? 알겠습니다.”
손 차장은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 앞에 다 오셨대.”
“넵.”
손 차장과 짧은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장 사장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뭔데. 지훈이가 또 일냈다고?”
장 사장은 손 차장의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달려 들어온 것 같았다.
그의 말에 손 차장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장 사장은 곧장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 좋은 일이겠지?”
장 사장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기대에 가득 차 있는 장 사장의 얼굴을 보며 제안서를 눈앞으로 펼쳐 들었다.
“제안서?”
“예. 관절 로봇 본사에서 총판을 제안한 서류입니다.”
“뭐?”
장 사장은 내가 들고 있는 제안서를 급히 낚아채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손으로는 제안서를 넘기고 시선 역시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입으로는 내게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된 일이야?”
“그게…….”
내가 그의 옆에 서서 입을 열자, 손 차장이 내 말을 가로막은 채 대신 답했다.
“민 과장이 주말에 병원에 갔다가…….”
손 차장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한껏 업된 목소리로 내 이야기를 펼쳤다.
그의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장 사장도 제안서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눈을 뗐다.
“손 차장. 우리 지난주였나? 병원에서 관절 로봇 찾았던 거?”
“예, 맞습니다. 그 병원 원장님께서 관절 로봇 써보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래. 당연히 아직 지방으로 내려오려면 한참은 걸리겠다 싶었는데, 우리가 총판을 맡게 된다니. 그럼 호남권에는 우리가 다 깔 수 있겠는데?”
장 사장은 한껏 부푼 얼굴로 말했고, 나는 그를 향해 더 기쁜 소식을 투척했다.
“사장님.”
“응?”
“호남권뿐 아니라 전국에서 총판이 저희 한 곳입니다.”
탁.
장 사장은 내 말에 책상을 양손으로 내리치며 되물었다.
“전국에 우리 한 군데야?”
“네. 서울, 경기권까지만 본사에서 관리하고, 아래 지역은 저희 광주 메디컬 한 군데만 했으면 한다고 하더라고요.”
장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민 과장. 아니, 지훈아 진짜 큰일 했다.”
“아닙니다. 이미 본사에서 저희 회사를 알고 있더라고요. 광주 쪽에서 성장 가능성도 있고, 입지가 굳어진 곳이라고요.”
손 차장은 나와 장 사장 사이에 대화를 섞었다.
“이렇게 우리가 광주에서 입지가 굳어지게 된 것도 민 과장의 몫이 크지. 사장님과 나는 이미 이 업계에서 오래된 인물들이잖아. 신규 거래처나 여러 곳에 이름 알리게 된 건 민 과장 힘이 컸지.”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저야 다 사장님과 차장님께 배운 건데요.”
장 사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민 과장 다른 병원들에서도 칭찬이 자자해. 일 잘한다고 말이야. 그러니 서울에서 스카우트 제의까지 온 거 아니겠어?”
나는 장 사장의 말에 놀라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지난번 IBH 제조사 본사에서 나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제안을 거절했기에, 장 사장과 손 차장에게 숨겼었다.
회사 직원이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기분이 좋을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 차장은 본사 직원을 통해 그 일을 알게 되었다.
손 차장 역시 장 사장이 알지 않는 편이 나을 거라 판단했고, 우리는 그 일을 묻어두기로 했었다.
그런데 장 사장은 이미 그 일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것도 한참 전에 말이다.
“예? 스카우트요?”
나는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피하며 장 사장에게 물었다.
그러자 장 사장은 아랫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IBH 이사가 나랑 친구 놈이야. 이 바닥 십 년이 넘으면 친구들도 이 바닥 사람밖에 없지.”
“아…….”
장 사장이 이 업계에 발을 들인지 어마어마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나와 손 차장보다 훨씬 더 위에 있다는 것을.
순간 장 사장이 어떤 말을 할지 걱정됐다.
내가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 그리고 그가 다른 사람을 통해 내 이야기를 듣게 됐다는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가득했다.
나는 사과를 하기 위해 장 사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장님. 죄송…….”
그러자 그는 검지를 뻗어 휘저으며 내 말을 막아냈다.
“우리 광주 메디컬. 손 차장도 민 과장도 함께 힘써줘서 금방 자리 잡을 수 있었어. 민 과장 역할이 컸던 것도 사실이고. 손 차장이야 워낙 잘하는 친구고, 경력도 뛰어나잖냐.”
손 차장은 장 사장의 말에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긴. 그리고 민 과장은 경력도 그렇게 길지 않은데, 제 몫을 넘어서까지 과분하게 잘해 줬어. 스카우트 제의 안 들어오는 게 이상한 거야. 미안한 마음 가질 것도 없고, 오히려 내가 고마워.”
장 사장의 말에 나는 허리를 접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그는 내 어깨를 잡고, 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고맙긴. 내가 고맙지. 민 과장이 처음에 우리 광주 메디컬 시작할 때 했던 말 기억나나?”
나는 그의 질문에 어렵지 않게 답할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이니까.
“광주를 대표하는 메디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근데 그걸 민 과장이 진짜 해내겠어. 머지않았다고 생각해.”
장 사장의 말에 손 차장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맞아. 벌써 어디 가나 ‘광주 메디컬’에서 왔습니다. 라고만 해도 알아 듣잖냐, 벌써. 빨리 망하기는 쉬워도 이렇게 빨리 성장하고 자리 잡는 건 정말 힘든 일이야.”
“손 차장 말이 맞지. 너네한테 다 고맙다.”
“아닙니다.”
회의실은 서로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우선 이 건에 대한 회의는 내가 일정 다시 알려주도록 할게. 손 차장이랑 민 과장은 광주 큰 병원에 관심도 확인 먼저 해봐.”
“네, 알겠습니다.”
“예. 저는 그럼 모던 정형외과부터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자 행선지를 정한 뒤, 우리는 곧바로 각자의 일터로 뿔뿔이 흩어졌다.
* * *
“안녕하십니까.”
모던 정형외과 김사랑 원장 진료실.
이 병원에는 만나볼 원장님이 매우 많다.
지금 내 앞에 앉은 김 원장, 그리고 박 원장, 이 원장.
이번에 WG 메디컬과의 연을 끝내며 내게로 발길을 돌린 안 원장과 모던 정형외과의 나머지 원장들까지.
모던 정형외과의 온 원장이 내 담당이다.
오늘은 이 병원에서 만날 수 있는 분들만 만나도 퇴근 시간이 될 만큼 많은 인원.
우선 시간이 되는 김 원장부터 찾아왔다.
“민 과장님, 왔어?”
“네, 잘 지내셨죠?”
“그럼. 얼른 앉아.”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기며 인사했다.
“요즘 별일 없으시죠?”
“응. 이번에 WG 메디컬에서 물건 다 빼고, 광주 메디컬 물건으로 넣고 나서 공급실 선생님들이 정신없으신 거만 빼면?”
“맞아요. 전량 다 바뀌어서 공급실 선생님들이 힘드신 것 같더라고요.”
그녀는 내 말에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근데 민 과장님이 이미 공급실에 간식도 잘 넣어주고 있어서 선생님들이 힘든 소리도 못 한다고 하시던데? 민 과장님은 센스가 어디서 그렇게 타고난 거야? 하하.”
나는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저희 물건 받아서 힘드시니까, 몇 번 드렸어요. 하하.”
웃으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눌 때, 내 눈에 들어오는 그녀의 얼굴.
평소에도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오지 않는 김 원장.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다크서클이 평소보다 진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녀에게 물어보려던 그때.
그녀의 속마음이 들려왔다.
[대체 새벽에 그건 뭐였을까? 대체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