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수화기 너머에서는 백승원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얼핏 들리기로는 그의 옆에는 다른 기자들도 함께 있는 듯했다.
백승원이 있는 그곳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
“나 병원에 일하러 왔지. 승원아, 무슨 일 생긴 거야?”
- 나 지금 제보받고 병원 왔거든.
“제보? 무슨……. 어디 병원인데?”
순간 ‘제보’라는 말에 나는 모던 정형외과를 떠올렸다.
WG 메디컬에서 유효 기간으로 물건을 사건 사고 없이 빼서 마무리됐다 싶었지만, 조금 전 환자들 몸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WG 메디컬의 붕대로 인한 것이 추측이기는 하지만, 박 원장이 지금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있으니 밝혀지는 것은 금방일 것.
그런데 그것이 밝혀지기도 전에 제보라니.
나는 백승원에게 전화로 묻자마자 차 안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주변에 기자들이 있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하지만 모던 정형외과 정문에는 아무도 없었다.
- 지금 수완 정형외과거든? 근데 여기 WG 메디컬 담당 병원인 거 너도 알지?
그가 말하는 수완 정형외과.
WG 메디컬의 오래된 담당 병원이다.
이 병원 역시 WG 메디컬의 김윤중 대표와 오래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김 대표와도 오래되었지만, 내가 WG 메디컬에 있을 당시부터 최권호 부장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래된 병원에서 제보라니?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던 정형외과와 마찬가지로 유효 기간 문제였다면 모던 정형외과 안국환 원장보다 더 오래, 더 깊은 관계가 수완 정형외과일 텐데, 그런 그들이 제보를 했다라…….
“그럼 알지. WG 메디컬이랑 오래 관계하고 있는 병원이거든. 무슨 제보인데?”
- 박스 갈이. 유효 기간 지난 제품을 박스만 교체해서 병원에 납품했더라고.
“그걸 병원에서 신고해서 취재 나온 거야?”
- 응. 거기에 있는 간호사 한 명이 기자들한테 제보를 넣었더라고. 그래서 여기에 나 말고도 다른 기자들도 수두룩해.
“간호사가?”
- 어. 최근에 새로 들어온 간호사가 한 명 있는데, 그 간호사가 발견하자마자 병원에 이야기 안 하고 제보부터 한 것 같더라. 그래서 지금 수완 정형외과 난리 났어.
“병원에서도 그럼 지금 알게 된 거야?”
- 그런 것 같아. 지금 취재하고 나왔는데, 지훈이 네가 WG 메디컬에 있었으니까 혹시나 너도 뭐 엮인 건 없는지 해서 연락했어.
“나는 이미 WG 메디컬 나온 지 오래지. 그럼 이제 거기는 어떻게 되는 거야?”
- 우선 나 말고도 기자들이 여럿 와있어서 기사는 바로 나갈 것 같아. 그리고 지금 기자들이 WG 메디컬 담당 병원들 취재하러 다니기 시작할 거고.
“그러겠네. WG 메디컬…….”
- 지훈이 너는 그럴 놈 아니지만, 유효 기간 잘 확인해. 지금 기자들이 WG 메디컬 병원 아니어도 뒤지고 다닐 거야.
“알겠어. 연락 줘서 고맙다, 승원아.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하고.”
- 그래. 나 취재하다가 WG 메디컬에 대해서 물어볼 거 있으면 연락할게.
WG 메디컬이 모던 정형외과에만 유효 기간이 지난 물건을 넣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확신했던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병원에 대담하게 뿌렸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더 맞겠다.
그런데 자신들과 신임이 두터운 수완 정형외과까지 그런 짓을 하다니.
진정 돈 때문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김 대표에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던 정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 * *
“다녀왔습니다.”
모던 정형외과에서 나온 뒤, 곧장 복귀한 사무실.
직원들은 한데 모여 박수진 주임의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과장님! 모던 정형외과 갔다 오시는 거 아니세요?”
한태준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숙이고 있던 허리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WG 메디컬 기사 났어요!”
그는 내게 손짓하며 다급한 목소리로 불렀다.
나는 한태준의 부름에 급히 그들에게 다가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모여 보고 있던 것은 백승원이 통화로 이야기해 주었던 내용.
WG 메디컬이 유효 기간을 속이고, 병원에 물건을 납품했다는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그에게 들었던 것과 다른 점 하나.
바로 그 병원 목록에 수완 정형외과뿐 아니라, 모던 정형외과까지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벌써 모던 정형외과가 기사에 실린 거지?
나는 눈으로 빠르게 기사를 살핀 후, 홀로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던 정형외과 박승호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원장님, 통화 가능하십니까?”
- 어.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지금 모던 정형외과까지 기사 떴길래 연락드렸습니다.”
- 응, 나도 기사 봤어. 그리고 아까 환자들, 붕대 때문인 게 맞더라고. 붕대를 감은 부위에서만 진물이 났고, 다른 환자도 마찬가지야.
“아……. 저도 본사에 확인했는데, 아마 유효 기간 지난 약품 때문에 진물이 발생한 게 맞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나는 모던 정형외과에서 사무실로 오는 길에 붕대 본사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다.
이미 본사 직원도 WG 메디컬이 한 일을 알고 있었다.
수완 정형외과 간호사가 기자뿐 아니라 붕대 본사에까지 전화한 모양.
그 전화로 본사는 WG 메디컬에서 유효 기간이 지난 물건을 유통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광주 지역 내에 WG 메디컬을 통해 납품받은 병원을 모두 조사한다는 것을 알고 붕대 본사 이사가 직접 광주에 내려오고 있다고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모양.
잘못을 저지른 것은 WG 메디컬 김 대표이지만, 자신들의 이름이 찍힌 물건이 그런 식으로 유통되고 있었기에 진상 파악을 하러 내려오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브랜드에 타격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이겠지.
- 어. 그래서 안 원장님이 식약처에 신고하기도 전에, 어떻게 알고 이미 기자들이 찾아왔더라고.
“그럼…….”
- 곧 식약처에서도 조사 나올 것 같아. 우리는 이미 물건을 WG 메디컬에서 전량 회수해 간 상태라 병원에는 확인만 하러 온다고 하네.
박 원장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WG 메디컬 측만 조사를 받을 테지만, 이미 환자 몇몇에게 그로 인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그 진물을 치료하는 것은 모던 정형외과의 몫.
게다가 식약처에서 병원에 확인차 온다고 해도 지역 내에 소문이 퍼지는 것은 삽시간이다.
WG 메디컬의 박스 갈이 만행 때문에 모던 정형외과 역시 타격을 입는다는 말이지.
“병원에 이상은 없는 겁니까?”
- 우리야 붕대 몇 개만 사용한 거라 아마 이상 없이 넘어갈 것 같은데, 기사에 우리 병원도 언급이 됐으니까. 아, 민 과장 나 들어가 봐야겠다. 조만간 다시 연락하자고.
“예, 알겠습니다.”
WG 메디컬로 인해 여러 병원이 피해를 입은 상황.
담당 병원 중 어디까지 손을 댔을지는 모르지만, 현재 기사가 난 것만 보아도 꽤 많은 병원에 유효 기간이 지난 물건을 납품한 것 같았다.
통화를 마치고 회의실에서 나오자, 손지혁 차장과 장홍석 사장이 사무실로 복귀한 후였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들 역시 박 주임 책상 앞에 서서 기사를 살펴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자 손 차장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랑 겹치는 곳은 모던 정형외과 한 곳뿐이지?”
“예, 맞습니다.”
“모던 정형외과에 식약처에서 나오는 불이익은 크게 없을 거야. 그래도 기사도 나갔고, 광주가 좁으니까 한동안 사람들 입에 오르락내리락하겠네.”
나와 손 차장이 말을 주고받던 중, 장 사장이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회야.”
그의 말에 온 직원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WG 메디컬 담당 병원, 민 과장이랑 손 차장이 정리해서 가지고 와.”
WG 메디컬에서 담당하고 있던 병원들의 물품은 전부 빠질 터.
그 빈자리를 우리가 서둘러 영업해 메우자는 뜻이다.
나와 손 차장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모던 정형외과부터…….”
장 사장은 모니터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고, 나는 재빨리 답했다.
“모던 정형외과는 WG 메디컬에서 넣던 모든 제품, 저희한테 받기로 했습니다.”
내 말에 온 직원의 시선은 나에게로 옮겨왔다.
“뭐? 벌써?”
손 차장은 놀란 눈으로 내게 되물었다.
“예. 모던 정형외과에 안 원장님께서 상황 정리되면 연락 주시기로 했습니다.”
“이야, 역시 민 과장이 다르긴 달라. 언제 그렇게까지 움직인 거야?”
내가 유효 기간에 대한 것을 모던 정형외과에 알려준 걸 모르는 장 사장과 손 차장은 내 행동이 빠르다고 생각해 감탄을 자아냈다.
장 사장을 포함한 회사 직원들과 WG 메디컬이 모던 정형외과에 납품하던 품목 리스트에 대해 한참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WG 메디컬 담당 병원에 영업 나갈 구역을 나누기 시작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추측도 함께였다.
한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장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 이제 WG 메디컬은 아니, 김윤중 대표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장 사장은 코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사받은 후에 벌금형 나올 거야. 그리고 아마 영업 정지 먹을 거 같은데, 기간은 정확히 모르겠다.”
“와. 유효 기간 지난 물건 납품한 병원 리스트만 봐도 엄청나던데, 벌금 무지막지하게 나오겠네요. 그럼 WG 메디컬은요?”
“하……. 아마 없어질 거야, WG 메디컬. 영업 정지가 나오면 일을 쉬어야 하는데, 복귀는 힘들지.”
장 사장은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WG 메디컬이 망하게 되면 우리에게, 그리고 다른 메디컬들에게는 기회가 될 것이다.
다른 메디컬과 병원 사이의 단단한 벽을 깨고 영업하는 게 힘든 이곳.
이런 곳의 벽이 자연스레 무너지게 된다면, 그곳을 힘들게 뚫지 않고 들어가도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장 사장과 더불어 손 차장, 그리고 나와 한태준은 WG 메디컬이 망했다고 마냥 기뻐하지는 않았다.
김 대표를 떠나 WG 메디컬에 남아 있는 재고부 직원, 회계부 직원 등 한때는 우리의 동료였다.
김 대표가 망한다는 것은 WG 메디컬 전 직원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이니까.
손 차장은 허공을 바라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김 대표… 언젠가는 돈 때문에 망할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돈, 돈 하던 양반이 결국 진짜 돈에 눈이 멀어 이렇게까지 되네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김 대표.
그는 항상 돈이면 다 되는 것처럼 행동했었다.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돈으로 해결했던 것처럼 말이다.
리베이트 사건은 말할 것도 없이 수두룩했었고, 대리 수술로 인해 최준성 과장이 조사를 받을 당시에도 돈의 힘을 이용해 김 대표는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었지.
이 외에도 많은 사건 사고를 ‘돈’을 이용해 비켜나갔었다.
이번 박스 갈이 역시 돈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유효 기간이 지난 제품을 폐기 처분했어야 했다.
폐기 처분은 곧 돈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셈이었고, 그는 그게 아까워 유효 기간이 지난 제품을 결국 병원에 납품해 돈을 벌었었지.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진실이 밝혀진 것.
그는 폐기 처분을 하지 않음으로써 눈앞의 적은 이익을 취하려 했지만, 결국 더 큰 돈, 더 큰 것을 잃게 된 셈이다.
돈으로 흥한 자, 돈으로 망하는 것처럼.
김 대표와 WG 메디컬의 이후 상황은 조사가 끝나야 나오겠지만, 결과가 확실시되는 그림이다.
걷잡을 수 없이 퍼지고 커진 일.
이것마저 돈으로 매수를 할 수는 없을 테니까.
* * *
한동안 여러 병원에서는 기자들과 식약처 직원들이 득실거렸다.
WG 메디컬을 조사한 후, 담당 병원들만 조사할 거라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로 인해 광주 지역에 있는 온 병원들은 유효 기간부터 의료 기기에 대한 보관 상태까지 점검이 들어갔다.
그리고 결국 WG 메디컬은 막대한 벌금과 함께 영업 정지 처분이 내려졌다.
단순 실수로 인해 한 군데의 병원에만 납품했던 것이 아닌 고의로 여러 병원에 납품했기에 영업 정지 일자가 꽤 길게 나온 편이었다.
영업 정지가 끝나면 영업을 정상적으로 해도 무관했다.
메디컬 이름을 바꿔서 새로 차려도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
하지만 메디컬은 일반 병원이나 약국과는 다르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병원 의사를 대상으로 영업하는 것이기에 재차 회사를 차린다고 하더라도 김윤중 대표를 받아줄 의사는 없을 것이다.
김 대표의 물건을 받았던 병원의 의사들은 이제 그를 신뢰하지 않을 테니까.
영업이라는 직업에서 신뢰를 잃었다는 건 새가 날개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살아갈 수는 있으나 날 수는 없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하지 못하는 새처럼.
그렇게 WG 메디컬, 그리고 김윤중 대표는 결국 메디컬 업계에서 완전히 돌아올 수 없는 문을 스스로 닫았다.
* * *
지이잉.
휴대전화 진동이 한 번 채 울리기도 전에 나는 급히 수신 버튼을 눌렀다.
“네, 광주 메디컬 민지훈 과장입니다.”
- 선생님! 여기 동명 정형외과 수술실인데요.
수화기 너머로 다급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동명 정형외과 수간호사였다.
“네, 선생님. 말씀하세요.”
- 저희 지금 수술 중인데 급해서요!
“예? 무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