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 아, 그 WG 메디컬에 민지훈 대리님이요?
“제가 퇴사해서요. 지금은 다른 곳에 다니고 있습니다.”
- 그러셨구나. 오랜만이네요, 대리님.
내가 전화를 건 곳은 붕대를 판매하는 제조사 본사였다.
모던 정형외과 공급실에서 본 붕대가 이상이 있는 제품인지 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
직접 WG 메디컬에 확인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WG 메디컬에서 퇴사한 후였기에 WG 메디컬에 연락해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
호의적인 관계라면 회사에 연락해서 모던 정형외과에 납품한 물건이 조금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물어보거나, 알려주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다.
하물며 내가 그들을 위해 알려준다고 한들, 그들은 그 마음을 좋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이대로 눈을 감고 넘어가자니 환자들이 쓰는 물건이기에 신경이 계속 쓰였고, 가장 최선의 방법이 물건을 제작하는 본사에 전화하는 것.
나 역시 WG 메디컬에 있을 때, 이 제품을 사용해 왔었고, 본사 연락처를 알고 있었기에 바로 본사로 전화한 것이다.
그들은 내가 WG 메디컬에서 근무할 당시 통화를 한 게 마지막이니, 내가 WG 메디컬의 민지훈 대리에서 정보가 멈춰 있었다.
“그러게요.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시죠?”
- 그럼요. 퇴사하신 줄도 몰랐네요. 연락이 통 없으시길래, WG 메디컬에서 발주 담당자만 바뀐 거로 알고 있었어요.
“따로 말씀 못 드리고 퇴사했어요. 죄송합니다.”
- 아이고, 아닙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현재 계신 곳에서 저희 물건 사용해 주시려고 하는 겁니까? 하하.
본사 직원답게 곧장 영업 멘트가 훅 들어왔다.
“예. 자료 한번 보내주시면, 제가 윗선에 보고 올려보겠습니다.”
-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근데 진짜 무슨 일로 연락 주셨을까요?
“저 하나 여쭤볼 게 있어서요.”
- 예. 뭐든 말씀하세요.
“붕대 있잖습니까.”
- 네. 저희 붕대 제품 많죠.
“제가 WG 메디컬에 있을 때 받아 쓰던 붕대요, 약품 묻어 있는 붕대. 그거에 관해서 뭐 좀 확인하려고 하는데요.”
- 예. 그 제품 있습니다. 그건 무슨 일로…….
“그 제품 저도 사용해 봤잖습니까. 그거 원래 색이 상아색 정도인데, 조금 누렇게 변색 되는 건 왜 그런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진공 포장되어 있던 거로 기억하는데, 그 진공 포장이 풀려도 괜찮은 건가요?”
- 역시 민 대리님은 저희 제품 잘 알고 계시네요. 그때도 제품 특성을 잘 파악하셨던 분으로 기억하거든요.
“하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닙니다. 아무튼, 말씀하신 건은 색이 누렇게 변색 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나는 본사 직원의 말에 황급히 노트를 펼치고, 펜을 꺼내 들었다.
- 하나는 보관 방법이 잘못되어 직사광선을 받아서 색이 변색 되기도 하고요. 나머지 이유는…….
나는 그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휴대전화 볼륨을 최대로 올렸다.
- 유효 기간이죠.
“예? 유효 기간이 지나면 변색이 된다는 말씀이세요?”
- 네. 일반 붕대도 유효 기간이 있긴 하지만, 기간이 길기도 하고 상처 부위에 거즈를 덧대고 감는 거라 큰 의미가 없긴 하죠. 근데 저희 제품은 약품 처리가 되어 있다 보니, 유효 기간이 중요합니다.
나는 그의 말에 재빨리 손을 움직여 필기했다.
“감사합니다. 아! 그럼 진공 포장은요?”
- 그것도 마찬가지로 보관을 잘못하셨거나, 받을 때부터 그러셨다면 저희 공장 측 실수죠. 하지만 한 상자는 같은 LOT로 생산하다 보니, 한 제품이 그렇게 된다면 그 상자는 전부 그럴 텐데요.
그의 말과는 달리 모던 정형외과에 있던 제품은 모두 제각각이었다.
몇 개는 진공이 풀려 있었고, 몇 개는 단단하게 진공이 잘 된 상태로 있었다.
“어? 만약에 상자에 진공 상태가 모두 다르면요?”
- 한 상자 안에 있는 제품인데 상태가 다르다는 말씀이시죠?
“예.”
- 그럴 리가 없는데……. 만약에 그러면 유효 기간이 가장 의심스러운데요? 아무리 진공 포장이라도 시간이 오래되면 풀리는 경우가 있어서요.
두 가지에 대해 본사 직원은 모두 유효 기간을 의심했다.
하지만 분명히 상자에 적힌 유효 기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대체 뭐지?
보관 방법이 잘못됐다고 하기에는, 내가 아는 WG 메디컬 창고 중 직사광선을 맞을 만한 곳은 하나도 없다.
의료 기기 대부분은 직사광선이나 햇빛이 잘 들어오는 곳에 보관하지 않는다.
서늘하고 환기가 잘 되는 곳에 보관해야 하기에, 그에 맞춰 창고가 준비되어 있다.
더불어 그 제품들만을 관리하기 위한 창고 직원이 몇 명이 배치되어 있기도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보관 방법 때문은 아닌데…….
그렇다면 유효 기간뿐.
나는 본사 직원과의 통화 중에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고민해 보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혹시 물건을 섞는 건요?”
-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한 상자 내에 생산 일자가 다른 제품이 섞일 수가 있나요?”
- 에이, 그런 일은 절대 없죠. 저희가 한 상자 단위로 물건을 제조하거든요. 절대 그럴 일은 없습니다.
“그럼 본사 측이 아니라, 메디컬 업체에서 섞어서 판매할 수도 있겠네요?”
- 어……. 그건 저희도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저희 제품이 개별적으로 유효 기간 표시가 되는 게 아니거든요. 상자에만 유효 기간이 표시되는 제품이라 한 상자대로 물건이 나가야 합니다.
“그렇죠? 상자 안에 물건이 섞이면 안 되는 거죠?”
- 네. 그리고 아까 말씀하셨던 붕대 변색, 진공이 풀리는 제품은 환자에게 사용하셔서도 안 되고요. 유효 기간이 지난 제품은 당연히 폐기 처분하셔야 하는 거고. 혹시 보관 방법이 잘못돼서 변색이 된 거라도 약품에 이상이 생긴 거니, 더더욱 폐기 처분하셔야 합니다.
나는 그의 말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WG 메디컬에서 모던 정형외과에 넣은 제품에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네, 이해가 잘 됐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대리님 혹시, 그런 제품 가지고 계신 거 아니죠? 저희 제품, 병원에 그렇게 들어가면 절대 안 됩니다. 저희 회사 이름이 박힌 물건인데, 잘못 환자들에게 사용했다가 신고라도 들어가면 식약처에서 저희 감사 나옵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서요. 제가 사용하는 제품도 아니라, 확인해 보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 예. 그런 일은 당연히 없겠지만, 혹여나 그런 상태의 제품을 병원에서 보시면 연락 부탁드릴게요.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담당자님.”
그와의 전화를 끊은 후, 나는 온 신경이 곤두섰다.
WG 메디컬에서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 * *
다음 날, 다시 찾은 모던 정형외과.
어제 진료가 길어져 만나지 못했던 박승호 원장에게 연락이 왔고, 나는 그를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더불어 WG 메디컬에서 넣은 제품.
그 제품을 한 번 더 확인해 보기 위해 나는 박 원장과의 약속 시간보다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커피 몇 잔을 사 들고, 챙겨온 샘플 상자를 가지고 공급실로 향했다.
“안녕하십니까.”
“어? 민 과장님 오늘도 오셨네요?”
“예. 오늘은 박 원장님 뵈러 왔습니다.”
공급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나를 반기는 간호사 두 명.
그녀들은 앉은 자리에서 환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피곤하실 텐데, 이거 드시면서 일하세요.”
나는 그녀들에게 커피를 건넸다.
“어머. 저희까지 챙겨주시고, 감사해요.”
“아닙니다. 선생님, 저 어제 제가 납품했던 물건 좀 봐보려고 하는데, 안에 창고 좀 들어가 봐도 될까요?”
“예, 그러세요.”
나는 창고 안에 들어가 어제 그 붕대를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병원 공급실 창고에 들어가 물건을 헤치거나, 일을 저지를 것은 없기에 간호사는 흔쾌히 나를 창고로 들여보내 줬다.
“감사합니다. 뭐 좀 확인해 볼게요.”
“네, 천천히 보세요.”
그녀들은 나와 함께 창고로 들어갔고, 그중 한 간호사는 창고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나를 지켜보았다.
나는 우선 우리 제품을 살펴보았다.
우리 광주 메디컬 역시, 붕대 제품을 모던 정형외과에 납품하고 있었기에 우리 제품도 이상이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선생님. 저희가 넣은 물건, 선입 선출되고 있는 거죠?”
“네. 거기 앞에 보시면, 제일 앞 상자가 더 빨리 들어온 제품이에요.”
우리 제품 중 유효 기간이 가장 짧은 제품.
그 상자를 열어 확인했지만, 제품 중 이상이 있는 물건은 단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 저 다른 메디컬 물건 좀 확인해 봐도 될까요?”
병원 창고에는 메디컬 회사별로 물건을 정리해 두지 않는다.
공급실에서는 당연히 자신들이 보기 편하게 정리를 해두었고, 붕대는 붕대끼리, 부목은 부목끼리 묶어 둔다.
그렇기에 내 앞에 있는 붕대 상자들 바로 옆에는 WG 메디컬에서 납품한 붕대 상자가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내 질문에 내게 다가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확인하시는 건 상관없는데, 무슨 일 있으세요?”
“다른 메디컬은 어떤 제품 사용하는지 좀 봐보려고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녀가 다시 자리에 앉고, 나는 곧장 열려 있는 첫 번째 상자 안 붕대를 확인했다.
역시나, 어제와 마찬가지로 붕대 안에는 진공이 풀린 것, 풀리지 않은 것, 그리고 상아색의 정상적인 붕대와 변색이 되어 누렇게 된 붕대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녀를 불렀다.
“선생님!”
“네?”
“이거 좀 여쭤봐도 될까요?”
“어떤 거요?”
그녀는 내 진지한 물음에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로 급히 다가왔다.
나는 그녀에게 WG 메디컬에서 납품한 붕대를 보여주며 물었다.
“선생님. 이 붕대는 물건 상태가 좀 이상한데, 혹시 제품이 문제 있는 거 아닌가요?”
내 말에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이 제품 받을 때 제가 있었거든요. 색이 좀 다르길래 담당자분께 여쭤봤더니, 유효 기간도 많이 남았고 사용하는 데는 문제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근데 과장님도 WG 메디컬에 계셨었잖아요?”
그녀는 공급실에 근무한 지 오래된 간호사.
내가 WG 메디컬에서 물건을 납품할 때부터 봐오던 간호사 중 한 명이다.
“네, 그렇죠.”
“저 이거 하나만 여쭤보려고요.”
“예, 물어보세요. 어떤…….”
그녀는 공급실 창고에 살짝 열린 문을 발길로 조심히 닫았다.
비밀리에 내게 물을 말이 있는 걸까?
그녀는 소모품 옆, 인공 관절 임플란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은 자주 사용하는 인공 관절 임플란트들이 쭉 쌓여 있는 곳이다.
인공 관절은 말 그대로 인공으로 만들어진 관절이다.
사람 뼈, 관절을 자르고, 인공으로 된 관절을 삽입하는 것이지.
사람마다 뼈의 크기와 굵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사이즈가 천차만별이다.
예를 들어 어깨 인공 관절 수술을 한다고 하면, 조립하는 임플란트 부품이 사이즈 별로 전부 수술실에 들어가야 한다.
미리 그 환자 것만 챙겨 가면 되는데, 굳이 온 사이즈를 무겁게 챙겨 들어가는 이유.
바로 그 환자의 몸을 열기 전까지는 사이즈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술실에서 사람 몸을 열어, 그 뼈 사이즈를 직접 잰 후에 그에 맞는 소독된 임플란트를 뜯어 삽입한다.
임플란트는 사람 몸 안에 넣는 것이다. 그러니 임플란트는 애초에 제조사에서 나올 때부터 소독이 완벽하게 되어 포장된 제품으로 나온다.
소독된 임플란트는 진공 밀봉이 되어 있고, 그 밖으로 한 번의 상자 포장, 그리고 그 밖으로는 또 비닐이 감싸져 있다.
그래서 비닐이 한 겹이라도 벗겨지지 않게 하려고 조심을 해야 하는 물건이다.
제조 본사에서 역시 겉 비닐부터 파손이 된다면, 물건을 교환해 주지 않을 정도다.
“과장님. 이거 WG 메디컬에서 넣어주는 임플란트거든요? 이것 좀 보세요.”
그녀가 보여주는 WG 메디컬에서 넣은 임플란트들이 풀세트로 들어 있는 상자.
거기에는 수십 개의 임플란트가 사이즈 별로 정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드는 것.
바로 포장이었다.
그 옆에 진열되어 있는 우리 광주 메디컬에서 넣은 임플란트 상자는 정갈하고 일관된 상태인 반면, WG 메디컬 상자 안에는 비닐이 뜯어진 제품, 개별 상자가 파손된 제품이 수두룩했다.
사실상 비닐이 뜯어지고, 그 안에 개별 상자가 살짝 구겨진 것까지는 수술에 사용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는 제품이 맞기는 하다.
몇 차례의 밀봉이 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안에 들어 있는 제품이 파손되거나 공기 중에 닿아 오염만 되지 않으면 되니까.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
가장 안 포장지뿐 아니라, 겉 포장까지 완벽하게 훼손되어 있지 않아야 정상이다.
나는 그녀의 말에 WG 메디컬 임플란트 전체 상자를 천천히 꺼내어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