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소탐대실】
내 앞에 놓인 소모품의 상태가 이상했다.
육안으로만 보아도 내가 평소에 보던 제품과는 달라 보였다.
나는 제품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옆에 서 있는 공급실 간호사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문제 있는 거예요, 민 과장님?”
나는 입술을 말아 넣고,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었다.
그녀에게 어떻게 질문을 던져야 할지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에 놓인 상자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 제품은 붕대였다.
“선생님. 이 물건 언제 들어온 거예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물건이에요. 오늘 들어온 거.”
“오늘 들어온 게 확실한 거죠? 기존에 들어왔던 제품이랑 섞인 거 아니고요?”
내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허공을 바라보고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어… 그게……. 제가 조금 전에 교대한 거라, 잠시만요.”
그녀는 서둘러 뒤를 돌아 입고 물품 목록을 확인했다.
내가 그녀의 선임도 아닐뿐더러, 이 물건도 우리 회사에서 입고한 제품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심각한 표정에 그녀도 무슨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서둘러 확인에 나섰다.
그리고 그녀는 확인을 마치고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게 답했다.
“이거 오늘 들어온 거 확실해요!”
그녀는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며 재차 물었다.
“과장님, 근데 이거 광주 메디컬 물건 아닌데 무슨 일로 물어보시는 거예요? 혹시 광주 메디컬이랑 제품이 겹치는 건가요?”
공급실 담당 간호사가 메디컬 회사에 직접 발주를 하는 병원도 많다.
여기 모던 정형외과도 공급실에서 소모품을 발주한다.
하지만 물품을 바꾸거나, 메디컬 업체를 바꾸는 일은 공급실 간호사 소임이 아니다.
병원의 의사가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아 바꾸거나, 메디컬을 바꾸고 공급실에는 통보식으로 알려 주는 것이지.
공급실과 협의를 하거나, 공급실에서 먼저 의사에게 제안해 물건을 바꾸는 병원들도 종종 있다.
하지만 모던 정형외과는 거의 의사 주도하에 업체 선정을 하는 편이다.
공급실에서는 의사가 정해 준 물건의 재고를 관리하고, 그 재고가 부족해질 때쯤 담당 메디컬에 발주를 하는 것.
의사가 거래처를 바꾸는 과정에서 공급실이 뒤늦게 통보를 받으면 실수로 바뀌기 전 거래처에 발주를 하는 일이 간혹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런 사정 때문에 간호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게 묻는 것 같았다.
우리 광주 메디컬로 발주를 해야 하는데, 자신이 다른 메디컬에서 잘못 발주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
그녀는 자신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는지 무척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선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요. 저희 광주 메디컬 제품과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물건이 조금 이상해서요.”
“다행이다. 저는 제가 실수한 줄 알고……. 휴.”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숨을 내쉰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질문했다.
“어? 그럼 과장님, 물건에 무슨 이상이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물건 받은 간호사가 따로 특이 사항은 기재해 둔 게 없는 거로 아는데?”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제품은 붕대다.
한눈에 스쳐 지나가며 보아도 이 제품이 어디 제품인지 알 수 있었다.
왜냐, 내가 WG 메디컬에 있을 당시 이 제품을 수도 없이 팔았으니까.
“이거 WG 메디컬에서 입고된 거 맞죠?”
그녀는 내 말에 재차 고개를 돌려 노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상했다.
이 붕대는 롤마다 각각 진공 상태로 개별 포장이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진공 포장이 몇 개는 풀려 있었고, 몇 개는 조금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곧장 상자를 닫고 제품의 유효 기간을 확인했다.
이 제품은 포장지마다 제품의 유효 기간이 없었고, 상자에만 쓰여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효 기간은 아직 많이 남은 상태.
우리 회사 제품도 아니었기에, 내가 제품을 들고 가서 확인할 수는 없었다.
더불어 WG 메디컬에서 넣은 제품에 내가 관심 가질 이유도 없지.
하지만 병원에 들어온 제품은 환자에게 사용하는 제품이기에 신경이 쓰였다.
그때, 울리는 휴대전화.
바로 김사랑 원장에게서 오는 전화였다.
“여보세요?”
- 민 과장님. 병원 왔다며?
“네, 지금 공급실에 있어요.”
- 응, 들었어. 내가 요청한 샘플은?
“가지고 왔습니다. 진료 끝나셨어요? 지금 가지고 가면 될까요?”
- 어. 방금 끝나서 지금 오면 될 것 같아.
“네,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공급실을 나가야 했기 때문에, 우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후 서둘러 내가 가져온 물건을 정리했다.
WG 메디컬에서 넣은 물건이 의심스러웠지만, 현재로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김사랑 원장에게 서둘러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과장님. 정리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녀는 나와 함께 상자를 옮긴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인사했다.
“아닙니다. 저희 물건 많이 발주 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많이 팔아서, 얼른 또 주문하도록 할게요.”
그녀는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또 봬요, 선생님. 고생하세요.”
“네!”
찜찜한 기운이 맴도는 공급실.
나는 찜찜함을 뒤로한 채 그곳을 빠져나왔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민 과장님! 뭘 이렇게 올 때마다 깍듯이 인사야. 얼른 와.”
“하하. 당연히 원장님 만날 때는 깍듯해야죠.”
“됐어. 나한테는 안 깍듯해도 돼. 그나저나, 오래 기다렸어? 마지막 환자분 상담이 좀 길어져서…….”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며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요. 저 공급실에 물건 넣느라 기다린 거 없었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김 원장은 그제야 미소를 지으며 숨을 내쉬었다.
나는 가져온 샘플을 책상 위에 올리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 말씀하신 샘플 가져왔습니다. 이 제품이 이번에 출시된…….”
제품의 포장을 뜯으며 말하던 그때.
책상 위에서 큰 소리를 내는 휴대전화 진동 소리.
지이잉.
지이잉.
나는 내 휴대전화를 바라보았지만, 내 휴대전화의 화면은 꺼져 있었다.
이 진동 소리는 김사랑 원장의 휴대전화에서 나는 소리였다.
샘플 봉지를 만지던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릴세라 급히 손을 봉지에서 뗐다.
하지만 그녀는 전화가 오는 화면을 한 번 바라보더니, 이내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전화를 거절한 것이다.
“어? 전화 받으셔도 됩니다. 통화하신 후에 설명 시작할게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양손을 뻗어 손사래 쳤다.
“아니야. 안 받아도 되는 전화야. 계속해.”
“아… 네, 그럼 계속 설명할게요. 이 제품은 그때 말씀하셨던 대로 수술 침대에 올려서 쓰는 제품인데…….”
나는 그녀에게 제품을 뜯어 상세히 설명했다.
그녀 역시 내 설명에 집중했고, 제품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조금 전까지 진료실에 들어오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던 그녀.
사담과 농담을 던지던 그녀는 내가 제품 이야기를 시작하자 곧바로 표정이 변했다.
1초 만에 집중하는 모습.
언제 내게 웃으며 인사했냐는 듯이, 제품에 대한 질문을 쏟아 낼 때는 굉장히 날카로운 표정과 말투.
냉철하고 차가워 보일 수도 있지만, 일할 때 내게 보이는 모습이 프로페셔널해 보이고 멋있어 보였다.
그렇게 그녀와 몇십 분을 앞에 놓인 제품 하나로 오디오가 잠시도 비지 않게 떠들었다.
“그럼 이 제품 나 주고 가는 거지?”
이야기가 끝나자 표정이 확 풀어지는 김 원장.
“그럼요. 포장지도 다 뜯었는걸요.”
“알겠어. 이따가 박 원장님도 보여드려 봐야겠다.”
지이잉.
지이잉.
그때 또다시 책상이 흔들리듯 세차게 울리는 휴대전화 진동 소리.
이번에도 역시 김 원장의 전화였다.
그녀와 순간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전화를 받으라는 표시라고 할 수 있지.
그녀는 눈썹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잠깐만.”
그녀는 곧장 책상 위에 뒤집혀 있던 휴대전화를 손으로 들었다.
화면을 본 그녀가 순식간에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미간에 잔뜩 힘을 준 김 원장.
무슨 전화길래 저렇게 화가 났지?
아마도 그녀에게 전화를 건 상대 때문에 화가 난 듯했다.
이럴 때는 내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장 옆에 놓인 가방을 뒤적이며, 다른 일에 신경을 쏟는 듯한 모습을 취했다.
하지만 그녀는 뚫어지게 휴대전화를 쏘아볼 뿐, 전화의 수신 버튼은 누르지 않았다.
혹시 내가 있어서 전화를 받지 못하는 건가 하는 마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원장님. 제가 있어서 못 받으시는 거면, 저 잠깐 나갔다가 올까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니야. 안 받아도 되는 전화야.”
김 원장은 내게 대답하며 손으로 휴대전화의 거절 버튼을 꾹 눌렀다.
제품 설명 전에도 그녀는 전화를 한 통 거절했었다.
나는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내 질문에 김 원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휴대전화를 들어, 내게 보여주었다.
“민 과장님. 이거 좀 봐…….”
그녀가 내게 내민 화면은 바로 통화 목록.
그 통화 목록 가장 위에 보이는 빨간 글씨.
김 원장이 전화를 거절했기에 부재중 전화로 2통이 찍혀 있었다.
[발신 번호 표시 제한(2)]
바로 발신 번호 표시 제한으로 걸려온 2통의 전화였다.
발신 번호 표시 제한은 자신의 번호를 뜨지 않게 상대방에게 전화를 거는 것.
학창 시절에나 친구에게 장난삼아서 했던 그것.
혹은 전 여자 친구, 전 남자 친구 등 번호를 보이지 않게 전화를 거는 거로 유명한 방법이지.
그런데 뜬금없이 이 대낮에 발신 번호 표시 제한으로 김 원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실수로 잘못 걸었다고 하기에는 몇십 분 간격을 두고 무려 2통이 왔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원장님. 이거 뭐예요?”
“몰라. 사실 며칠 전에 발신 번호 표시 제한으로 전화가 걸려와서 받았거든?”
“네. 누구래요?”
그녀는 어깨를 올렸다 내려놓으며 답했다.
“몰라. 아무 말도 안 해.”
“아무 말도요? 그럼 왜 전화를 한 거지?”
“내 말이! 그래서 그 뒤로 또 오길래 받았는데, 역시나 아무 말도 없더라고. 그리고서 방금 또 온 거야.”
“아무 말이 없다라…….”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번호는 뜨지 않게, 자신이 누군지는 밝히지 않고 싶은 사람.
그렇게 전화를 걸었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한쪽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혹시 내 전 남친인가?”
“예?”
나는 턱을 당기고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엄청 예전에 만났던 남자 친구가 있거든. 근데 얼마 전에 어쩌다가 소식을 들었는데, 오래 만나던 여자 친구랑 헤어졌다더라고. 그래서 내가 생각난 건가?”
그녀는 이야기를 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와. 이 대낮에 술도 안 마신 맨정신으로 전 여친한테 발신 번호 표시 제한 전화를 한다? 대단한데요?”
“그러게. 있을 때나 잘하지. 참, 남자들은 왜 그래?”
그녀는 어깨를 올리고,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내게 물었다.
“그 전 남친과 저를 동급으로 보시면 안 되죠!”
나는 그녀에게 눈을 찌푸리며 장난스레 답했다.
“하하. 알겠어. 그런데 진짜 누구지?”
“그럼 오늘 두 번, 지난번에 두 번 온 거예요?”
김 원장은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모르니까, 이런 거 또 와서 이상한 이야기하면 바로 신고해요.”
“에이, 무슨 신고는. 아무 말도 안 하는데 뭐.”
“그래도… 또 오면 받지 말아요. 떳떳하게 전화하지, 뭐 하러 발신 번호 표시 제한으로 전화하는 걸 받아줘요.”
나는 진심 어린 마음으로 걱정하듯 다그쳤고, 그녀는 내 걱정하는 말이 싫지 않은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알겠어. 민 과장님이 받지 말라니까 안 받아야지. 친구 말은 내가 또 잘 듣거든.”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 박 원장님도 오늘 뵙고 가?”
“그러려고 했는데, 오늘 진료가 길어지시나 봐요.”
“그러게. 오늘 박 원장님 예약이 많아서 아마 한참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다음에 다시 오는 게 나을 거야.”
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박승호 원장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그녀에게 샘플을 건넨 후,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진료실을 나와 모던 정형외과 정문으로 걸어가는 길.
그 통로에서 보이는 공급실.
나는 아까 보았던 물품 생각에 마음 한편이 영 찝찝했다.
혼자라도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나는 서둘러 차에 올라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여보세요. 저 민지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