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더본 정형외과의 원장과 몇 마디 인사를 더 나눈 후에야 나는 그의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내가 가장 묻고 싶은 말.
더본 제약 기업에서 지금 매출이 반 토막이 난 병원에 더 투자해 줄 것이냐, 아니면 광주 병원 사업을 접을 것이냐이다.
하지만 이 질문 그대로 물어볼 수는 없는 터.
혹여나 내가 이 질문을 한다고 하면 내 앞에 앉아 있는 원장이 그 말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게다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는다고 해도 그 대답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오늘 이 질문을 하지 않고, 어떻게 답을 찾아갈 수 있을까?
자리에 앉아 원장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날씨 이야기, 주식 이야기 등 처음 앉은 몇 분간은 오랜만에 만난 원장과의 관계를 위한 대화였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그에게 본론을 꺼내기 위해 시동을 걸었다.
“원장님, 근데 오늘 금요일도 아닌데, 환자분들이 좀 빠졌네요?”
보통 병원은 월요일에 사람이 가장 많다.
주말이 지난 후에 환자들이 몰리기 때문이지.
그런 이유로 금요일에는 병원이 조금 한산한 편이다.
내 말 뒤로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번에 원장님 한 분이 나가서 그런지 환자가 많이 빠졌네.”
나는 어깨가 처져 있는 그를 보며 곧바로 입을 열었다.
“에이. 그래도 실력 좋으신 원장님들이 이렇게 세 분이나 더 계시고, 지금 제 앞에도 원장님이 계시는데 곧 회복될 겁니다. 원래 새로운 사람이 오거나 있던 사람이 나가면 잠시 뒤숭숭하지 않습니까.”
“…그래야지.”
“그럼 한 분이 나가셨으면, 충원으로 다른 원장님은 새로 안 오시는 겁니까?”
나는 그와의 대화를 통해 답을 찾기로 했다.
기업에서 손을 놓은 건지, 놓지 않은 건지 알기 위해 에둘러 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글쎄다? 지금 당장 환자도 없는데……. 모르겠네.”
계속해서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명확히 내놓지 않는 그.
나는 그에게 확실한 대답을 듣기 위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로 했다.
확실한 질문과 확실한 대답…….
나는 미리 검색해 보고 온 정보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 맞다! 원장님. 다음 달에 있을 더본 기업 창립 기념일이 주말이던데, 그럼 행사는 금요일에 하는 겁니까, 월요일로 미뤄서 하는 겁니까?”
더본 정형외과, 그러니까 더본 제약 기업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기업 행사를 하고는 한다.
기업 창립 기념일에 맞춘 행사지.
더본 정형외과는 병원 설립 일자가 아닌, 기업 창립 기념일에 맞춰 병원에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
보통 창립 기념일에는 회사를 하루 쉬는 게 대부분이지만, 병원인 이곳은 창립 기념일이라고 휴진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기념일에는 병원에서 매년 현수막을 걸고, 환자들에게 기념 떡과 의료 물품을 나눠 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그 행사 여부에 대해 직접적으로 물으면 그는 내게 무슨 꿍꿍이인가 하며, 대답을 회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둘 중 하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게끔 질문을 바꿨다.
금요일이나 월요일 중에 어떤 것이든 답이 나온다면 이 병원은 다음 달 행사까지 진행하는 거니까.
만약 행사를 하지 않는다면 기업에서 병원을 최대한 빨리 정리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기업 입장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병원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면, 손실을 막기 위해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정리를 할 테니까.
“아, 맞다. 행사! 가만 있어 보자, 그날이 토요일인가?”
“일요일입니다.”
그는 내 말에 컴퓨터에서 무언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우스를 왔다 갔다 하며 몇 번 클릭하던 그는 이내 내게 답했다.
“우리는 당겨서 금요일에 행사할 것 같아.”
언뜻 곁눈질하니, 그가 본 화면은 아마 기업 내부 메일 같았다.
행사가 한 달 정도 남았으니, 이미 지시가 나왔을 테지.
이것으로만 보아도 대충은 예측할 수 있었다. 더본 제약 기업에서는 더본 정형외과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것을.
적어도 다음 달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건 언제까지나 예측일뿐.
나는 보다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내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자, 앞에 앉은 원장은 나를 보며 물었다.
“근데 민 과장.”
“예, 원장님.”
“오늘 무슨 일로 온 거야? 우리 발주한 물건도 없고, 혹시 뭐 할 말 있어서 온 거 아니야?”
그 역시 내가 찾아와 여러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시답잖은 이야기들만 펼치고 있으니 이상하게 여긴 모양.
나처럼 더본 정형외과에 와서 기업에서 지원을 언제까지 해줄 것이냐에 대한 이야기를 떠본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지.
“아… 그게 말입…….”
[더본 제약 덕분에 숨통은 트이겠는데……. 빨리 회복해야지. 하. 다들 물건 하나 넣어달라고 애걸복걸할 때는 언제고, 다들 이렇게 발 뺀다 이거지? 그래. 조만간 다 후회할 거다.]
어?
미간을 찌푸리고 내 입 모양을 바라보고 있는 원장.
내 대답을 기다리는 그의 속마음이 내게 들려왔다.
나는 그에게 하려던 말을 급히 멈췄다.
어쩐지, 이래서 삼 일만에 나를 만나준 거였네.
기업에서 지원을 해주기로 지난밤 사이에 결정이 난 거니까.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더본 정형외과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이건 내가 그의 속마음을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이지, 이걸 그대로 회사에 보고할 수 없는 노릇.
더군다나 모기업이 어떠한 방식으로 병원에 도움을 주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기업에서 지원을 이어 간다 한들, 이렇게 매출이 반 토막이 난 곳에 돈으로만 빈 곳을 메꾼다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더본 제약에서 어떤 식으로 병원에 도움을 줄지 궁금했다.
더불어 난 이 기회에 내 앞에 앉은 원장의 신임을 더욱 얻고자 했다.
현재 대부분의 메디컬 회사에서는 더본 정형외과와 거래를 끊거나, 끊으려고 하는 중이다.
이때, 나는 더본 정형외과와 거래를 이어 가는 것뿐 아니라 그와 관계를 더욱 돈독히 만들어 둔다면 이후 더 큰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응? 왜 말을 하다가 말아?”
그는 내가 말을 하지 않자 미간에 주름을 풀어내고 물었다.
“아… 좋은 생각이라고 여겨 오긴 왔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되고……. 제가 주제 넘는다는 생각이 드실까 싶은 마음이 들어서요.”
그는 내 대답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사실 지금 더본 정형외과에 환자가 많이 빠지지 않았습니까.”
“어, 그렇지?”
“이번에 개인 병원을 차리겠다고 나가신 원장님 환자분들을 다시 붙잡아 오기보다는 새로운 방법으로 환자 유치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며칠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 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아 몸을 앞쪽으로 기울였다.
몸이 내게 가까워졌다는 것은 마음이 내게 기울고 있다는 뜻.
“민 과장이 그런 생각까지 했단 말이야?”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제 담당 병원이다 보니…….”
나는 혹여나 싶은 마음에 그에게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는 내 말을 자르고 미소를 지었다.
“전혀. 기분 나쁠 게 뭐가 있어. 민 과장 말이 팩트니까, 다음 단계가 더 중요한 게 맞지. 그래서 민 과장이 생각한 건?”
그는 내게 턱을 치켜들며 물었고, 나는 생각해 본 방법을 그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요즘 아무래도 SNS 시대 아니겠습니까?”
“응, 그렇지. 우리 딸들도 그렇게 SNS를 달고 살더라고.”
“그래서 너튜브나 블로그로 홍보를 해보시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블로그는 이미 우리 병원에서 작업 맡겨둔 곳이 있어. 업데이트는 주기적으로 하는 것 같더라고.”
“예, 그렇지 않아도 저도 확인을 해봤습니다. 병원에 대한 기사, 병원에 구비된 기구들이 올라오더라고요.”
그는 내 말에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사실 잘 보지 않아서 몰랐네.”
“원장님. 병원이라는 곳은 어쨌든 아픈 환자들이 찾아와 치료받고 회복하는 곳이잖습니까. 그래서 제 생각에는 치료를 받은 분들, 수술 완쾌한 분들의 인터뷰 등을 받아 너튜브나 블로그에 올려 홍보하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자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입을 오므렸다.
“오! 그것도 괜찮네.”
“예. 환자가 수술받은 후 쾌차했다는 것만큼 병원을 위한 확실한 홍보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내 말에 앞에 놓인 노트에 ‘인터뷰 SNS’라고 짧게 적었다.
나는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그리고 원장님.”
“응?”
“더본 정형외과가 더본 제약 기업 병원인 걸 모르는 분들이 주변에 많더라고요.”
“그래?”
“예. 더본 제약 기업에서 병원 쪽 사업하는 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나 봐요. 저희야 이쪽 업계에 있으니 당연히 아는 사실이지만, 고객층은 일반 환자분들이시니까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본 제약 기업의 회사 이미지가 좋잖습니까. 그 점을 잘 홍보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민 과장이 준비를 많이 해왔네.”
“하하, 아닙니다. 병원이 잘돼야 저희도 잘되고, 상부상조 아닙니까.”
“그래. 아무튼, 오늘 정말 고맙네.”
“좋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장님.”
나는 그에게 직접 적으로 더본 제약 기업에서 지원을 해준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대화를 통해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정도만 해도 오늘 이곳에 온 수확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슬슬 그와의 자리를 마무리 지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쁘실 텐데, 제가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조만간 또 뵈러 오겠습니다. 혹시 더 좋은 생각이 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원장님.”
그는 앉은 자리 그대로 내게 고개를 빠르게 끄덕여 보였다.
“그래. 조심히 가, 민 과장.”
“넵.”
나는 자리에 서서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뒤를 돌아 진료실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섰다.
조심스레 문을 닫으려는 그때.
“저… 민 과장!”
나를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
* * *
“여기 물건이 너무 많은 거 아니야?”
WG 메디컬 최권호 부장은 창고에서 쌓여 있는 물건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그의 말에 서둘러 다가오는 재고부 직원.
“아… 그게…….”
재고부 직원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를 한번 쓰윽 훑어본 최 부장은 다시 고개를 돌려 쌓여 있는 재고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쌓여 있는 소모품을 차근차근 보던 최 과장이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잔뜩 화가 난 그의 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재고부 직원.
최권호 부장이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품의 유효 기간이었다.
유효 기간의 날짜가 임박해져 오는 제품.
“저번에도 한번 보고 올렸던 적이 있긴 합니다만, 저희 매출이 빠지기 시작한 후로 재고가 쌓여서요. 날짜가 1년이 채 안 남아서 본사에서 교환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하. 또 다른 제품은?”
“소모품 몇 가지 좀 그런 게 있고……. 저번에 대표님께서는 병원에 물건 나가기만 하면 금방 소진 가능하다고 하셔서, 교환 못 해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재고부 직원은 자신의 말을 끝으로 다른 물건을 들고 최 부장에게 다가갔다.
“그것보다 부장님, 잠깐 이것 좀 보시죠.”
최 부장은 몸을 돌려 재고부 직원이 꺼내 온 것을 살펴보았다.
“이것도 날짜 얼마 안 남았네? 어? 이건 내일이 마감이잖아?”
“네. 이 소모품은 내일이 마감이고요. 인공 관절 임플란트는 유효 기간 날짜가 임박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도 대표님 알고 계시는 거지?”
“예. 제품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1년, 1년 반 남았을 때는 본사에서 교환이 불가해서 저희가 다 소진하거나 아니면 폐기 처분해야 합니다.”
“하……. 폐기 처분. 근데 날짜가 이래서 어차피 다 폐기 처분으로 가야겠는데. 금액이 다 얼마냐?”
최 부장의 한숨에 옆에 있던 재고부 직원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유효 기간 전에 빨리 판매해서 환자에게 사용하면 문제없긴 합니다만, 재고 개수가 많이 남아서… 그건 불가능하겠죠?”
“그렇지. 이걸 지금 병원에 판다고 해도 환자한테 소진할 수가…….”
“최 부장, 우리 나가야 한다니까 여기서 뭐 해?”
그들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는 그때, 창고로 들어오는 김윤중 대표.
김 대표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최 부장을 불렀다.
“어? 대표님! 그게…….”
창고에 들어온 김 대표를 향해 최 부장은 상황 설명을 시작했다.
“…해서 여기에 올려둔 제품들은 당장 판매를 하거나, 폐기 처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 대표는 아무 말 없이 한숨을 내쉬며 그 물건들을 바라보았다.
“다른 방법은?”
“어차피 폐기 처분해서 돈이 안 남는다면, 차라리 병원에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도…….”
최 부장의 말이 끝나기 전에 김 대표가 재고부 직원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잠깐 자리 좀 비켜줄래? 나 최 부장이랑 이야기 좀.”
“네, 대표님.”
재고부 직원이 창고를 나가자 김 대표는 최 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 부장.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긴 하잖아.”
“네?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한번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
김 대표는 앞에 쌓인 물건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