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태준이 너는 실수를 한 거야.”
한태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말에 기분이 나빠 표정이 일그러지는 게 아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
“어떤… 실수인 겁니까? 제품 소개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론과 이론의 충돌.”
“네? 그게 무슨…….”
한태준은 내 대답에 말끝을 흐렸다.
“태준이 네가 설명하던 거에서 원장님이 몇 차례 질문을 던졌었어. 기억나니?”
“예, 맞습니다. 각도에 대해서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넌 뭐라고 대답했지?”
그는 눈동자를 빠르게 굴려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는 듯했다.
“다른 기구와 혼동하여 잘못 생각하시는 것 같아서 제가 다시 설명해 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맞아.”
“그게 잘못된 겁니까?”
“아니. 잘못된 건 바로잡아 줘야 하는 게 맞지. 하지만 그때 태준이 네 말투. 그리고 그때 그 말로 인해 원장님의 표정을 읽었어야 해.”
한태준은 여전히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보였고, 나는 차분히 이야기를 펼쳐놓기 시작했다.
“원장님이 각도 이야기를 물었을 때, 넌 ‘아닙니다’, ‘아니죠.’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했어.”
한태준은 내 말에 기억이 난다는 듯 머리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게 대화를 시작한다면, 이론과 이론이 충돌하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방금 만나고 온 병원의 원장님은 의사 경력이 꽤 오래된 것 같아 보이셨지?”
“네. 머리도 희고, 나이도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이론, 경험이 엄청나신 분이라는 뜻이지.”
나는 턱을 들며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네가 원장님의 말끝마다 ‘아니요’를 외친다면, 원장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쁘실 수밖에 없어. 자신의 지식이 모두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이었을 테니까.”
“아… 그래서 아까 표정이 그러셨던 거구나.”
한태준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물었다.
“하지만 어쨌든 원장님이 틀린 말씀을 하신 건데, 어떻게 말씀드려야 되는 겁니까?”
“그럴 때는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말을 시작해야 해. 영업할 때 실수하는 게 논리적으로 설득하려고 한다는 거야.”
“저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말도 맞지. 틀린 지식을 제대로, 올바르게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하지만 의사는 우리보다 깊은 지식과 경험이 깔려 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그들에게 지식으로 우리가 틀렸다고 말을 한다면 기분 좋아할 사람은 없겠지?”
그는 내 말에 조용히 노트와 펜을 꺼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해. 내가 인정하면, 그도 나를 인정해 주는 거지.”
“그럼…….”
“그럼 어떻게 말을 해야 하냐고?”
“예.”
그는 자신의 대답과 동시에 펜을 노트에 가져다 댔다.
“‘이런 거는 원장님이 저보다 잘 아시잖습니까.’라는 말로 시작하면 상대방을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말로 들리겠지?”
한태준은 내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펜대를 굴리고 있었다.
내게는 정수리만을 보여준 채로.
“차가운 논리, 정확한 이론으로 설득하는 것보다는 따뜻한 이해와 인정이 영업에서는 더 잘 먹힐 때가 있는 거야.”
“이해와 인정…….”
한태준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내 말을 되뇌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한 수 배웠습니다, 과장님.”
나는 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영업할 때, 아부하라는 게 아니야. 그를 인정하고, 나도 그에게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게 베이스로 깔려야 해.”
“네! 인정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태준은 노트를 접고, 포부를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를 바라보며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 병원으로 이동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 * *
한태준을 데리고 다닌다고 해도, 오전 내내 그에게 교육만을 할 수는 없기에 내 담당 병원으로 향했다.
“더본 정형외과… 여기는 원래 손 차장님이 관리하시던 거래처 맞죠?”
한태준은 운전대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병원을 빼꼼 바라보며 내게 물었다.
“응. 광주 메디컬 오면서부터 내가 관리하고 있어.”
더본 정형외과.
엄청나게 큰 병원은 아니지만, 광주 지역구 내에서는 환자가 꽤 많은 곳이다.
WG 메디컬에 있을 당시, 손지혁 차장이 힘들게 영업했던 병원이지.
정형외과 전문 병원인 이곳은 의사만 해도 총 4명의 의사가 있다.
즉, 한 곳의 메디컬 업체와만 거래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 메디컬 회사와만 거래를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의사별로 성향이 다르기도 하지만, 보통은 품목별로 업체를 선정하고는 한다.
손 차장이 영업하던 그때, 우리는 이곳에 소모품과 수술 재료 일부만을 납품하기로 했었다.
손 차장이 힘들게 영업하고 끌고 오던 이곳은, 광주 메디컬로 나오면서 그가 가지고 나오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 병원도 들고 오지 못한 나에게 몇 개의 담당 병원 관리를 넘겼고, 그중 한 개의 병원이 바로 더본 정형외과다.
“여기 환자 꽤 많은 거로 알고 있는데, 맞죠?”
한태준은 더본 정형외과에 차를 주차하며 내게 물었다.
병원이 들어온 지 몇 년이 되어서야 터를 잡은 더본 정형외과는 의사마다 단골이라고 불릴 만한 환자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
최근에는 환자들이 입소문을 통해 병원이 아닌, 의사 이름을 찾고 오는 경우가 꽤 많다.
그래서 더본 정형외과 역시 의사를 지정해 진료를 받는 환자가 많은 편.
이런 경우, 의사 자신이 병원 매출을 전폭적으로 올려주기 때문에 자기 몸값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의사는 이미 자신의 네임밸류를 충분히 올렸기 때문에, 개인 병원을 차리기 위해 나가버리기 마련이다.
어차피 환자들은 병원 이름이 아닌, 의사를 지정해 오기 때문이다.
여기 더본 정형외과에도 그런 의사가 있었다.
광주 내에서 입소문이 난 의사.
그래서 더본 정형외과에 오면 한 곳의 진료실 앞에만 대기 환자들이 수두룩했다.
병원에서 접수할 때, 의사를 지정하지 않으면 알아서 진찰을 받을 부위를 잘 보는 의사를 지정해 주고는 한다.
혹은 현재 진료가 밀려 있지 않은 의사에게 지정해 주는 것이지.
하지만 다들 어떻게 알고 왔는지, 한 명의 의사에게만 환자가 몰빵되어 있던 이곳.
덕분에 더본 정형외과는 항상 환자가 많아, 매출이 많은 병원이었다.
“많았었지.”
“많았었다니요? 이제는 아니라는 건가요? 여기 그래도 저희 납품 꽤 하는 거 아니었어요?”
주차를 마치고, 시동 버튼을 끄는 한태준.
나는 그에 맞춰 내릴 준비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지. 여기는 환자가 많았던 이유가 분명했었거든.”
한태준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원장님 한 분이 이쪽에서 유명하셨어. 근데 그분이 결국 개인 병원 차린다고 나가셨거든.”
그는 내 말에 헉 소리를 내며 동공이 커졌다.
“그럼 더본 정형외과 매출 확 떨어지겠네요?”
나는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떨어졌지. 지금도 계속 매출이 빠지고 있고.”
한태준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근데 제가 그 의사였어도 나갔을 거 같아요. 병원에서 혼자만 유명했으면, 차라리 나가서 병원 차려서 혼자 돈 벌면 되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나갔겠지?”
“그럼 오늘 더본 정형외과는 왜 오신 거예요?”
“그래도 여기가 우리 담당 병원이니까. 게다가 지금 병원에 환자 발길이 뚝 끊겨서, 자금 회수가 안 되고 있거든.”
나는 한태준에게 말을 내뱉은 후, 몸을 돌려 차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려 병원 쪽으로 발길을 옮기자, 뒤에서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묻는 한태준.
“과장님, 여기는 결제 텀이 몇 개월인데요?”
“여기 3개월. 근데 지난달에 입금이 안 됐어.”
“헉. 진짜 병원에 매출이 많이 빠졌나 보네요.”
“응. 봐, 지금 주차장에 차 없는 거. 근데 병원 상황은 알겠지만, 우리도 이야기는 한번 해야 하니까…….”
한태준은 한 손에 노트를 꼭 쥔 채 내 뒤로 바짝 붙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갔다.
그는 항상 물건을 납품하고, 혹은 기존에 거래 중인 병원에 새 품목을 소개해 영업하는 일만 해왔었다. 그래서 그 외의 모든 일이 신기하고 기대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원장님은 뵐 수 없다는 거죠?”
“네. 오늘은 힘드실 것 같아요…….”
간호사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을 흐렸다.
“그럼 저 오늘은 총무과장님만 뵙고 갈게요.”
“아……. 네, 알겠습니다. 총무과 어딘지 아시죠?”
“네, 제가 올라가서 찾아뵐게요. 감사합니다.”
수금 때문에 찾아오는 메디컬 직원이 많았는지, 연신 곤란한 표정과 힘든 기색이 역력한 간호사.
입구에 앉은 간호사와 짧은 이야기를 나눈 뒤, 우리는 곧장 총무과로 향했다.
총무과에는 처음 가보는 한태준.
그는 엘리베이터에서 연신 헛기침을 하며,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가 지금 좀 힘든 상황이지 않습니까.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수금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곧장 내게 기계적인 답변을 하는 총무과장.
그 역시 간호사와 마찬가지로 많은 메디컬 업체 직원을 만난 듯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최대한 이해해드리고 싶습니다. 다만, 결제 텀 조정을 하시는 건지 아니면 언제쯤 입금이 되는지는 저희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병원의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지만, 어쨌든 물건을 팔고 돈을 받아야 하는 회사 차원에서는 마냥 기다려 줄 수만은 없는 것이다.
특히나 내가 사장이 아닌, 직원일 때는 더더욱.
위에서는 돈을 받아와라, 병원에서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 이 서로의 상황을 전달하고 조율하는 입장은 나이기에.
어느 정도 선은 내가 확실시해야 한다.
“이번 달에는 입금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확답은 아니라서…….”
“네, 상황 알고 있는데도 자꾸 이런 일로 말씀드리게 돼서 죄송합니다. 이번 달에는 두 달 치 입금이 안 되더라도, 일부라도 입금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총무과장님.”
“예, 그래 보겠습니다.”
영혼 없이 툭툭 말을 내뱉는 총무과장.
아무래도 이번 달에도 입금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답을 하는 듯한 느낌.
하지만 여기서 내가 돈을 받기 위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거래는 계속되어야 하고, 더불어 여기서 언성을 높인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
나는 마무리하고 그에게 인사를 한 뒤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 *
오후 5시.
신입 사원들의 환영회 회식 자리.
평소보다 일찍 일을 마무리하고 모두 예약된 식당으로 발길을 옮겼다.
회식 자리로는 제일 무난한 회사 앞 고깃집.
‘광주 메디컬’로 예약된 룸.
테이블 두 개에는 음식들이 세팅되어 있었고, 우리는 차례로 자리를 채웠다.
내 앞에는 박수진 주임이 자리했고, 그 옆에는 신입 사원 중 한 명인 주우진이 자리했다.
그리고 바로 붙어 있는 옆 테이블에는 나머지 직원이 자리했다.
사실상 7명이 전부인 우리는 지금 앉은 자리에 큰 의미는 없었다.
테이블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회식의 특성상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자리가 뒤바뀌기 때문이지.
“우리 젊고 잘생긴 신입 직원들이 둘이나 입사했는데, 앞으로 회사 분위기가 확 밝아지겠어?”
장홍석 사장은 잔을 들며 말했다.
그의 말에 우리 모두 웃음을 지으며, 그를 따라 잔을 들어 올렸다.
역시나, 회식의 첫 잔답게 매뉴얼처럼 나오는 건배사.
“광주 메디컬을!”
장 사장의 선창에 우리 모두 합창하듯 큰 목소리로 외치며 잔을 부딪쳤다.
“위하여!”
한 번에 쭉 소맥을 들이켰다.
사회생활이 처음인 권성훈과 주우진도 첫 잔만큼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털어냈다.
환영회인 만큼, 그 뒤로도 권성훈과 주우진의 잘 부탁드린다는 건배사가 이어졌다.
그 뒤에도 손 차장의 환영 인사가 곁들인 건배사로 고기가 익기도 전에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시작부터 달아오른 분위기.
“성훈이랑 우진이는 주량이 어떻게 되나?”
손 차장은 신입 사원들을 향해 물었다.
“저는 한 병 정도 마십니다.”
덩치도 좋고, 키도 큰 권성훈이 먼저 빠르게 답을 했다.
“저는 잘 마시는 건 모르겠고, 좋아합니다. 최대한 정신 차리고 마셔서 오늘 대리운전 다 부르고 마지막에 들어가겠습니다!”
술이라고는 입에도 잘 대지 못할 것처럼 순수하게 생긴 주우진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렇게 안주와 술을 정신없이 흡입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때.
우리 테이블에서는 일에 대한 주제가 ‘연애’ 쪽으로 넘어갔다.
“박 주임님은 연애 안 하세요?”
술을 잘 마신다고 큰소리를 치던 주우진.
그는 금세 얼굴에 홍조를 띠고 박수진 주임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박 주임은 그의 질문에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자신의 앞접시 음식을 뒤적였다.
“연애요? 뭐…….”
미적지근한 반응의 그녀.
박 주임의 대답에 주우진은 앉은 자리 그대로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임님.”
그의 부름에 박 주임은 턱을 당겨 곁눈질로 주우진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네?”
“그럼… 남자 친구 있으세요?”
맞은 편에 앉은 그들의 대화 소리를 듣지 않으려야 듣지 않을 수 없는 자리.
나는 대화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애써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으며 테이블 위로 시선을 두었다.
그 순간, 박 주임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입을 열었다.
“민지훈 과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