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어머, 대박이… 맞죠?”
강아지와 함께 다가온 그녀는 바로 낮에 동물 병원에서 만났던 푸들 주인.
후추의 보호자이자 곧은 정형외과 정윤성 원장의 아내다.
그녀는 동물 병원에서 잠깐 보았던 나를 기억하고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네, 맞아요. 또 뵙네요.”
“그러게요. 근처 사시나 봐요.”
강아지들은 서로를 보며 꼬리 쳤고, 그녀와 나는 제자리에 서서 인사를 나눴다.
“예. 조금 걸어와야 하는데, 대박이가 여기를 좋아해서 이 공원까지 와요. 산책하러 나오셨나 봐요?”
그녀는 강아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후추도 여기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산책 이야기만 나오면 혼자 달려가서 목줄 물어온다니까요? 아! 그런데 오늘 대박이 예방 접종한 거 아니었어요?”
그녀는 대박이가 오늘 오전에 예방 접종을 했는데, 당일에 산책을 나온 게 걱정됐던 모양.
예방 접종을 한 이후에는 산책을 삼가는 게 좋기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오늘 대박이 검사만 받고 날짜 때문에 접종은 다음 주에 하기로 했어요. 어쩌면 다행으로 생각하고, 오늘 저랑 원 없이 산책하려고요. 하하.”
나는 그녀와 말이 끊길 새도 없이 강아지들의 건강 상태, 나이, 사료 등 이야기를 이어 갔다. 흡사 자식 자랑하는 부모님처럼 말이다.
그렇게 그녀와 제자리에 선 채로 이야기를 계속 나누다 보니 우리는 현재 상태를 깨달았다.
“어머, 근데 우리 이렇게 서서 이야기할 거면 앞에 벤치 가서 조금 앉아 있을까요?”
그녀는 이미 산책을 한바탕하고 온 것인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는 것이 힘들어 보였다.
나는 아직 산책을 시작도 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산책과 휴식의 순서가 뒤바뀌는 것은 크게 상관이 없었으니까.
그녀와 조금 걸어간 뒤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좋네요.”
자리에 앉은 그녀는 몸을 늘어뜨리고 벤치에 기대앉았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이 맺힌 그녀.
나는 그 모습을 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디 가세요?”
“여기 앞에 바로 자판기 있길래, 음료수 좀 뽑아올게요.”
나는 그대로 바로 앞에 있는 자판기에서 음료수 두 개를 뽑아 다시 벤치로 돌아왔다. 그리고 캔을 따서 그녀에게 건넸다.
“와, 감사해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건네는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 벌컥벌컥 마셨다.
나 역시 그녀의 옆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렇게 우리는 강아지 산책 중 가끔 일어나는 일처럼, 휴식을 취하며 서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몇 분 동안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했고, 강아지들도 우리의 주변에서 서로 핥고 꼬리를 흔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우리 앞으로 여자 두 명이 지나갔다.
대학교를 갓 졸업한 것 같은 20대 중반의 여자들 같았다.
짧은 원피스와 긴 생머리.
지나가는 여자들을 보며 내 옆에 앉은 정 원장의 아내가 혼잣말로 푸념을 하듯 입을 열었다.
“하…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예?”
그녀의 말을 얼핏 들었기에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아니요. 나도 저렇게 젊고 예뻤을 때가 있었는데… 싶어서요. 세월이 참 빨라요.”
“그렇죠. 세월이 나이 먹을수록 왜 이렇게 더 빨라지는지 모르겠어요.”
“그러게요.”
그녀는 지나가는 여자들을 아련하게 쳐다보며, 굉장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의 한마디를 던져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사… 아니, 후추 어머님은 아직 젊으시잖아요. 예쁘시고요. 저는 오전에 처음 뵙고 피부가 정말 좋으셔서 깜짝 놀랐는데요?”
나는 정 원장의 아내에게 ‘사모님’이라는 말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눌러내고 대답했다.
그녀는 내 말에 활짝 웃으며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정말요?”
“네. 피부가 하도 좋고 광이 나셔서 파리가 혹여라도 앉으면 낙상하겠는걸요?”
그녀는 내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도 잘하시네요. 하하. 아, 그런데 나이가 어려 보이시는데, 결혼은 하셨어요?”
“저요? 아니요. 아직 멀었습니다. 하핫.”
“어머. 정말? 그럼 여자 친구는요?”
나는 그녀의 질문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대체 세상에 모든 여자가 다 눈이 삐었나? 이해가 안 되네요.”
나는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농담에 동참했다.
“그러게요. 다들 몰라보나 봅니다. 하하.”
나는 그녀에게 같은 질문으로 되물어 보지 않았다. 결혼은 했는지, 남편 혹은 남자 친구가 있는지에 대한 질문 말이다.
이유는 당연했다. 그녀가 이미 곧은 정형외과 정윤성 원장의 아내인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 대답에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의 반응에 아래턱을 당겨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왜 저는 안 물어봐요?”
“네?”
“남자 친구요!”
그녀는 내가 자신의 남자 친구 여부에 대해 묻지 않는다고 뾰로통한 얼굴로 다그치듯 말했다.
나는 이미 그녀가 유부녀인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 원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말에 호응하듯 물었다.
“아……. 그랬네요. 남자 친구 있으세요?”
“아니요, 없어요.”
그녀의 대답이 끝나고 나는 다음 답을 기다렸다.
‘남자 친구는 없어요, 하지만 남편은 있어요.’와 같은 대답 말이다.
그런 말이 나오면 놀라는 척 웃음을 지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 뒤에 아무런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남편의 존재에 대해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남편은…….”
갑자기 그녀는 내 말을 툭 자르고 큰 목소리로 물었다.
“아! 혹시… 인별그램해요?”
“예? 인별그램이요? 제가 SNS는 잘 안 하는데…….”
“어머, 젊은 분이 그런 것도 안 해요?”
“안 그래도 하도 주변에서 뭐라고 해서 깔아만 뒀어요.”
그녀는 내 말에 서둘러 휴대전화를 꺼냈다. 그리고 인별그램에 접속해 자신의 계정을 보여 주었다.
“이것 봐요. 여기에 우리 후추 사진이 가득하긴 하지만, 저도 하거든요.”
“그러네요. 완전 후추 인별그램인데요?”
그녀는 정 원장이 내게 자신의 반려견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처럼 신이 난 얼굴로 게시물을 하나하나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렇죠? 자식이나 다름없죠. 너무 귀엽죠? 나중에 인별그램에 대박이 사진도 올려주세요. 가끔 가서 구경할게요.”
그녀는 내 손에 들려있는 휴대전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SNS에 관심이 하나도 없는 사람 중 하나였기에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에이, 저는 그런 거 올리고 그런 성격이 못 돼서요.”
“어디 보여줘요. 그럼 게시물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네, 하나도 없어요. 정말 친구들 눈팅용? 그마저도 사실 잘 안 하거든요.”
“설마……. 젊은 사람치고 너무 세상과 단절하면서 산다. 어디 보여줘 봐요.”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이 곁눈질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그녀의 재촉에 계정을 열어 ‘게시물 0’, 팔로워와 팔로잉 숫자를 보여 주었다.
“어? 정말 아무것도 없네?”
그녀는 내 인스타 계정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요. 아무것도 없어요. 하하.”
그녀는 여전히 내 화면을 보고 있었고, 나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끄는 버튼을 눌렀다.
“어?”
그새 잠이 든 그녀의 반려견, 후추.
“후추 잠들었는데요?”
나는 강아지를 바라보며 말했고,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그러게요. 산책 제일 좋아하는 녀석이 오늘 힘들었나 보네.”
“대박이는 이제 친구 자니까, 달리고 싶어서 안달이 났나 봐요. 그래, 대박아. 산책하러 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정말 반가웠습니다.”
“저도요. 얼른 들어가서 후추 씻겨야겠어요.”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대박이도 잘 가. 다음에 또 봬요.”
그녀가 일어나자 강아지는 금세 눈을 뜨고 꼬리를 흔들었다.
나 역시 강아지 산책을 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후, 나에게 인사를 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오늘 굳이 산책을 또 나오고 싶더라니.]
그때 들려오는 그녀의 속마음 소리.
아까 나에게는 오늘 첫 산책이라는 말을 은연중에 흘렸었는데, 또라니…….
왜 굳이 거짓말을 한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와 멀어져 갔다.
* * *
여수에서 눈 뜬 주말 아침.
내일이 벌써 월요일이라는 생각에 일요일 아침부터 나는 침대 위를 뒹굴뒹굴했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 아침에는 다시 일찍 눈을 떠야 하기 때문이지.
침대 위에서 빈둥대고 있던 그때.
톡 알람 소리가 울렸다.
[지훈아, 오늘 저녁에 시간 가능해? 정윤성 선배님이랑 저녁에 한잔할까 하는데, 너도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세연 정형외과 원장이자 친구인 한선우에게서 온 톡이었다.
주말인 오늘.
친구인 한선우와의 술자리는 평일이든 주말이든 환영이다.
하지만 곧은 정형외과의 정윤성 원장이 그 자리에 함께하게 된다면 그건 친목보다는 비즈니스에 가까운 자리가 된다.
그럼에도 내가 그 자리에 가야 하는 이유.
아쉬운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다.
아마 한선우가 그 자리에 나를 불러주는 것은 온전히 나를 위한 일일 것이다. 내가 정 원장에게 영업 중인 것을 알기 때문이지.
그래서 자신의 친목 모임인 정 원장과의 자리에 나를 부르는 것이 한선우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 나를 부르게 된다면 정 원장에게 부탁하는 말투로 이야기를 해야 했을 테니까.
나는 그 마음을 알기에 이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절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가 곧은 정형외과에 영업을 하려면 이보다 더 좋은 자리는 없기 때문이지.
누가 보면 주말까지 일하느냐,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일이 현재로서 가장 1순위인 나에게는 더더욱 반가운 약속이다.
평일이든, 주말이든 나에게는 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나는 한선우의 톡에 답장을 한 뒤 급히 몸을 침대에서 일으켰다. 그리고 서둘러 준비를 시작했다.
* * *
“지훈아, 여기!”
광주에 도착해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약속 시간에 맞춰 나왔는데, 이미 먼저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선우.
그는 술집 앞쪽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선우야.”
나는 그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며 손을 들었다.
“일찍 왔네?”
“그러니까. 나는 좀 일찍 온다고 왔는데, 너는 대체 언제 온 거야?”
한선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입을 열었다.
“아니. 평일에 이쪽 오려면 차 무지하게 막히잖아. 그래서 일찍 출발했더니, 오늘 주말이라 차가 안 막혀서 혼자 너무 일찍 도착했어. 하하.”
“야, 그럼 미리 연락하지. 나도 더 일찍 올걸!”
“됐어. 나도 사실 온 지 10분밖에 안 됐어.”
“뭐야, 인마. 하하. 아무튼, 오늘 나 자리에 불러줘서 고맙다.”
나는 한선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너 티켓 너무 가볍게 썼다고 나중에 환불해 달라고 할까 봐 내가 미리 얹어준 거다? 환불은 안 된다.”
“하하. 자식. 그래, 고맙다.”
내가 며칠 전 한선우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는데, 그게 바로 곧은 정형외과 정 원장의 취미를 알아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너무 약소한 부탁이라고 하더니, 결국은 그게 신경 쓰여 정 원장과의 자리를 빨리 잡아 나를 부른 모양.
나는 한선우에게 고마운 마음이 가득했지만, 고등학교 시절을 함께했던 사내놈들의 우정으로는 오글거리게 입 밖으로 고맙다는 말이 연신 나오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고맙다는 말을 내뱉었지만, 나는 멋쩍은 마음에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릴 뿐이었다.
한선우 역시 내 마음을 아는지 내게 툴툴거리는 말투로 답했다.
“고마우면 고맙다고 해. 계속 건드리지 말고.”
“아니, 내가 뭘 또 건드렸다고…….”
그는 내 말을 자르며 답했다.
“아니다. 말하지 마. 오글거려.”
그는 양어깨를 들고 소름이 끼친다는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의 행동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저 앞에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정 원장.
“어? 원장님!”
나는 정 원장을 보며 소리쳤다.
내 말에 한선우 역시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여깁니다!”
정 원장은 우리의 부름에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일요일은 병원이 휴진이기에 그는 편한 옷차림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트레이닝 바지에 검정 면 티셔츠. 그리고 편한 운동화 차림으로 온 정 원장. 병원에서 볼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내가 늦었나?”
“아닙니다. 저희도 방금 왔습니다.”
“민 과장은 밖에서 보니까 새롭네.”
“칭찬이신 거죠? 하하.”
나는 활짝 웃으며 장난스러운 말투로 답했다.
“그럼. 정장 입지 않고, 선우랑 같이 있으니까 영락없는 20대들 같다.”
그의 말에 한선우가 불쑥 나타나 외쳤다.
“맞습니다. 저희 아직 20대로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선배님도 오늘은 20대 같아 보이십니다. 20대 끝자락이요. 하하.”
“뭐야. 나는 끝자락이야? 그래도 앞에 숫자가 20대라니까 좋네. 들어가자.”
“넵.”
* * *
“우선 고기 3인분이랑 소주랑 맥주 좀 주세요.”
“에이, 오늘은 소주로 달리자.”
“어? 선배님 내일 휴진이십니까?”
정 원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오전만. 내일 오후부터 출근이야.”
“아이. 저희는 내일 아침 일찍부터 출근인데요, 선배님!”
한선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정 원장에게 앙탈을 부리듯이 답했다.
“너네는 젊잖냐. 원래 그 나이에는 먹고 2차 가면 다 술 깨잖아. 나도 어차피 오후에는 출근이야. 저희 소주로만 주세요. 민 과장도 괜찮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정 원장.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친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넵. 괜찮습니다.”
내일이 한 주를 시작하는 첫날, 월요일인데 소주를 마셔야 한다니…….
나에게도 부담스러운 주종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먹는 수밖에.
직원이 주문을 받고 뒤를 돌아 나가자, 한선우는 정 원장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오늘 소주로 달리고 저희 다 취하는 거 아닙니까?”
한선우가 말을 하자 정 원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하. 그래 보자!”
정 원장의 얼굴과 말투로 보아 그는 오늘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그가 기분이 좋다는 것은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나는 오늘 그와 친분을 다져야 하는 기회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