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박수진 주임은 고개를 사선으로 꺾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연애요. 맨날 일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이제 과장도 달았는데 연애… 해도 되는 거 아닌가?”
그녀의 말에 나는 아이스크림을 입에서 내려놓았다.
내가 그녀에게 차갑게 말을 한 이후, 난 그녀가 나에게 마음을 접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떤 의도로 물어보는 것인지 내게 다시 연애 이야기를 꺼내는 그녀.
박 주임을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떨어낸 후 입을 열었다.
“제가 아직 연애할 준비가 안 됐어요.”
그녀는 내 말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말했다.
“대체 연애하는데 무슨 준비가 필요해요.”
“제가 지금 누군가를 만나면 일에 신경 쓰는 만큼, 그 사람에게 신경 써줄 수 있는 시간이 없어요.”
“나는 괜찮은데…….”
박 주임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예?”
“아, 아니에요. 그래서 연애를 안 하시는 거예요?”
“네. 연애하면서 그걸 핑계랍시고, 외롭게 두고 싶지도 않고요. 제가 준비됐을 때, 그 사람에게 온전히 마음을 쓸 수 있을 때 연애 시작하고 싶어요.”
박 주임은 내 말에 허공을 바라보고 한참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언제인데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이 업계에서 꼭대기에 가까워지면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요?”
나는 그녀에게 대답한 뒤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이제 갈까요, 우리?”
나는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네, 이제 가요.”
박 주임과 자리를 정리한 뒤, 주차되어 있는 차 쪽으로 걸어갔다.
나란히 서서 앞만 바라보며 걸어가던 그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여자 친구가 있다거나,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 또는 남자를 좋아한다, 뭐 이런 없는 이유를 만들고 핑계 삼아 주지 않아서 고마워요.”
그녀는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깨지 않았는지, 여전히 붉은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민 과장님이 충분히 하고 싶은 일들 할 만큼 다 한 뒤에 연애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게요.”
박 주임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뱉은 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고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앞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역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그녀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박 주임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내 물음에 그녀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나보다 한 걸음 더 앞에서 걷고 있던 그녀는 뒤를 돌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제가 이래서 민 대리님, 아니 과장님 좋아하기 시작했었거든요.”
직진밖에 모르는 듯한 그녀.
나는 그녀의 돌직구에 당황해 입을 벌린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박 주임은 내 표정을 보고 환하게 웃더니, 내 손에 무언가를 재빨리 쥐여 주었다.
나는 고개를 떨구고 내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내게 건넨 것은 숙취 해소제.
“제 거 사면서 과장님 것도 샀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는 술이 너무 올라와서 따로 갈래요.”
그녀는 바로 옆 도로에 손을 뻗으며 택시를 불러 세웠다.
“주임님, 제가 내려드릴게요. 취한 것 같은데, 위험해요.”
나는 도롯가로 가는 그녀의 팔을 붙잡았고, 그녀는 내 팔을 조심스레 빼내며 말했다.
“저 부끄러워서 그래요. 오늘 술김에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택시!”
그녀의 부름에 지나가던 택시가 멈춰 섰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차에 올라탔다.
박 주임이 떠난 자리.
나는 홀로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타고 간 택시를 바라보며, 숙취 해소제를 열어 벌컥벌컥 삼켰다.
* * *
주말이 지나고 어김없이 찾아온 월요일.
나는 사무실이 아닌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시내에 위치한 ‘곧은 정형외과’에 새로운 의사가 출근했기 때문이다.
타 지역에서 넘어온 원장의 출근 소식에 여러 메디컬에서 올 테지만, 나 또한 그 무리에서 빠질 수는 없는 일.
난 새로 나온 과장직의 명함과 원장에게 건넬 화분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곧은 정형외과는 시내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된 병원이다. 오래됐기에 입소문이 나 환자도 많았고, 최근에 리모델링까지 마친 후라 새로 유입되는 환자도 꽤 많은 곳.
건물이 크기에 병원 의사 수도 상당했다. 하지만 이곳은 내가 담당하고 있거나, 우리 광주 메디컬에서 담당하고 있는 병원은 아니다.
기존의 의사들은 이미 자신과 거래하는 메디컬 회사가 뚜렷했고, 그 벽을 뚫는 것은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온 의사를 먼저 영업하는 게 그 병원 거래를 터는 첫 단추인 셈.
척추 모양이 크게 세워져 있는 곧은 정형외과 외부.
그 모형을 뒤로하고 나는 입구로 들어갔다.
역시나 이미 많은 메디컬에서 다녀갔는지, 한 군데의 진료실 앞에는 화분이 가득했다.
나는 그 화분들이 잔뜩 있는 진료실 앞에서 새로 출근한 의사를 만나기 위해 의자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내가 왔다는 것을 간호사에게 이미 알린 지 벌써 40분이 흐른 시간.
진료실에는 아무도 들락날락하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그 진료실 안으로 들어오라는 호출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병원을 상대로 하는 영업사원에게 기다림은 선택이 아닌 필수지만, 그래도 익숙해지지 않는 이 시간이다.
오늘 역시 기다림에 지쳐갈 때쯤, 나는 드디어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광주 메디컬 민지훈 과장이라고 합니다.”
나는 문을 열고 허리를 숙여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네.”
밝은 얼굴로 다가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짧은 단 한마디.
나는 그의 차가움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원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명함을 내밀었고, 그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내 명함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내가 들고 있는 화분을 바라보더니 턱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진료실 한쪽 바닥에는 화분들이 나열되어 있었고, 그 옆에 두라는 듯한 제스처였다.
“네, 여기에 놔두겠습니다.”
그의 눈짓에 나는 화분들 가운데 그나마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 내 화분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여기 앉아요.”
“네.”
그는 앞에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이야기했고, 나는 그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았다.
정윤성 원장.
나이는 나보다 대여섯 살은 많아 보였다.
30대 중후반의 느낌.
앉아 있기에 키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대략 170 중반으로 보였다.
인상이 험상궂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나를 경계하는 것인지 시종일관 굳은 표정,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와 거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오늘 하루 많은 메디컬 직원이 왔다 갔기에 피곤했을 테지만, 그것을 떠나 정 원장은 그저 나에게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나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이야기를 한 뒤, 그가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바로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경계심과 어색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깨는 데에는 일과 관련된 대화도 중요하지만, 공통 관심사에 대한 대화가 큰 역할을 한다.
나는 그에게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 일상 대화를 펼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원장님. 오늘 곧은 정형외과로…….”
하지만 정 원장은 내 말을 툭 잘라버렸다.
“미안한데 내가 오늘 너무 많은 메디컬 직원을 봐서요. 카탈로그 가져온 거 있으면 주고 가요.”
딱딱한 말투와 차가운 눈빛.
그는 지쳐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 대한 경계심과 더불어 모르는 직원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모든 병원에서 처음 보는 메디컬 직원을 반겨주지는 않는다. 어쩌면 대다수 병원이 지금 정 원장과 마찬가지로 반감을 보이는 곳이 대부분.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내가 분위기를 쇄신시켜보겠다고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오히려 그에게 더더욱 반감을 살 뿐이다.
나는 그의 말대로 준비해 온 카탈로그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는 내가 건넨 카탈로그를 받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여러 차례 보았다.
이 진료실에서 내가 오늘은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확실해졌고, 나는 들어온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진료실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진료실 밖으로 나왔다.
기다린 시간은 40분이 넘었고, 그를 만난 시간은 10분이 채 되지 않아 허탈했지만, 그걸로 슬퍼할 수는 없다.
냉혹한 현실이지만 이것을 헤쳐 나가 따내는 것이 영업이기 때문에.
* * *
다음 날.
나는 곧은 정형외과에 눈도장을 찍으러 가기 전, 사무실로 먼저 출근을 했다.
정 원장에게 어제 주었던 자료와는 또 다른 자료를 줘야 나에게 관심을 줄 것이기에 자료를 챙기러 온 것이다.
오늘 또 간다고 해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리란 확신은 없지만, 게다가 오늘 역시 10분밖에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또다시 가야 한다.
어제는 정 원장의 첫 출근 날이라 수많은 메디컬 직원이 왔다 갔을 것이고, 그 많은 사람 중에 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이틀 연속 그리고 삼 일 연속으로 간다면 그는 기억하기 싫어도 나를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
나를 알리는 데에는 나를 익숙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안녕하십니까.”
사무실에 들어오자 손지혁 차장과 박수진 주임이 자리해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아침 인사를 한 뒤, 자리로 돌아가 재빨리 자료를 챙기기 시작했다.
“민 과장.”
손 차장은 내게로 저벅저벅 걸어와 말을 걸었다.
“네, 차장님.”
“아침부터 뭐가 그렇게 바빠?”
“저 어제 새로운 거래처 영업 갔었는데, 오늘 한 번 더 가보려고요. 그래서 자료 좀 챙기고 있습니다.”
그는 내 말에 씨익 웃으며 물었다.
“이틀 연속 가는 거 보니까, 잘돼가나 보네?”
그의 질문에 나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어제 처음 갔는데, 최근에 보기 드문 차가움이었습니다. 저 어제 한참을 기다리다가 10분도 못 만나고 나왔어요. 말투도 엄청나게 까칠하시고, 이따가 가면 어제보다는 길게 만나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손 차장은 내 말에 창밖을 바라보더니, 조언을 던져주었다.
“제일 기본이잖아. 날씨 이야기 좀 해. 오늘이 딱이네, 날씨가 우중충해서 날씨 이야기 나누면 되겠어.”
“아니요. 완전히 말을 못 하게 잘라버리시더라고요. 사적인 대화의 시작도 못 나오게요.”
“그래? 엄청 딱딱하신 원장이네. 어디 병원이야?”
나는 챙기던 자료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그에게 답했다.
“곧은 정형외과요. 정윤성 원장님이라고…….”
“어? 곧은 정형외과였어? 그래, 거기 뭐 젊은 원장님 오신다고 하던데.”
손 차장은 이미 곧은 정형외과에 대해 알고 있는 듯했다.
“예. 30대 중후반 되시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 그 원장님이 학연, 지연, 혈연을 엄청 따진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민 과장한테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걸 수도 있어.”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역시, 영업에 학연, 지연, 혈연이 빠질 수는 없네요.”
손 차장은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근데… 그분은 그게 좀 강하다고 들었어. 나도 내 담당 병원 원장님한테 전해 들은 거라서.”
“하……. 그럼 저는 모두 속하는 게 없으니까, 다른 공통점이라도 얼른 찾아봐야겠네요.”
“그래. 그러니까…….”
손 차장은 내게 조언을 해주며 고개를 돌려 시계를 바라보았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나 원장님이랑 약속 있어서 먼저 갈게.”
“네, 저도 바로 나가려고요. 차장님, 다녀오세요.”
“그래, 고생해.”
손 차장이 먼저 사무실을 급하게 빠져나갔고, 나 역시 그를 따라 사무실을 나와 곧은 정형외과로 향했다.
병원에 가는 길, 나는 곧은 정형외과 사이트에 접속했다.
그리고 정윤성 원장의 약력에 대해 서둘러 확인했다.
그와의 접점, 혹은 내가 지인을 통해서라도 관심을 끌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약력은 정 원장이 어디 의대를 졸업했는지부터 시작해 그동안 거쳐 왔던 병원들에 대해서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 내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