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어? 박 주임 시간 안 돼?”
박수진 주임이 손을 들자, 손지혁 차장이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저는 꼭 간다고요. 민 과장님 승진했는데, 빠질 수 없죠. 하핫.”
“뭐야. 나는 또 못 온다는 줄 알았잖아. 민 과장도 되는 거지? 민 과장 승진 회식인데, 당연히 와야지. 다들 제사, 결혼식, 장례식까지는 빼준다. 나머지는 안 돼.”
손 차장은 웃으며 말했고, 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답했다.
“당연하죠. 저 축하해 주신다는데, 제가 빠질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태준이는?”
한태준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책상을 바라보며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는…….”
회식에 참여 못 할 것처럼 입을 열자, 손 차장은 빠르게 그의 입을 막았다.
“에이, 다들 애인 없잖아. 불금에 집 가서 혼자 맥주 마시지 말고 회식 가자!”
손 차장은 한태준을 보며 말했지만, 옆에서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답하는 박 주임.
“하, 차장님. 남자 친구 없는 거 확인 사살시켜 주시네요. 저는 꼭 참석해야 했었네요.”
“아니, 나는 진짜 이해가 안 된다니까? 우리 박 주임이 남자 친구가 없는 게 우리나라 미스테리한 일 중 하나야.”
손 차장의 너스레에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피식 터트렸다.
“제 말이요.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다들 눈이 어떻게 된 거지. 그나저나, 태준이는 일 있는 건가? 태준이 드디어 애인 생겼냐?”
모두가 손 차장의 말에 한태준을 바라보았고, 그는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저 요즘 잘 돼 가는 분……. 아뇨, 근데 오늘은 민 대리님, 아니 민 과장님 승진하셨는데 당연히 가야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태준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니야. 거기 가 봐. 태준이 드디어 여자 생겼는데 금요일에 잡아둘 수 없지. 하하. 안 그렇습니까, 차장님?”
손 차장은 내 말에 동조하며 한태준에게 이야기했다.
“그래, 다음에 또 회식하면 되는 거니까. 우리 태준이 연애가 먼저지.”
한태준은 손사래를 치며 나와 손 차장을 번갈아 쳐다보며 외쳤다.
“아닙니다. 저한테는 민 과장님이 먼저입니다!”
장 사장은 흐뭇한 표정으로 있다가 한쪽에서 입을 열었다.
“그래, 태준이도 갈 수 있으면 가자. 오늘 내가 크게 한턱 쏜다.”
그의 말에 한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고, 자신의 턱을 툭 치며 재롱을 피우듯 답했다.
“예. 사장님이 한턱 쏘신다는데, 제가 안 갈 턱이 있겠습니까!”
“하하. 태준이 개그 좀 봐라.”
한태준은 장 사장의 말에 활짝 웃어 보였다.
“민 과장님, 바로 가시죠. 저는 민 과장님이 일 순위입니다!”
“짜식. 아직 여자 친구 아니라고, 내가 먼저라고 하는 것 좀 보게?”
“하하. 티 났습니까, 과장님?”
“그래, 너무 티 난다.”
“자자. 그럼 얼른 저녁 먹으러 가자고!”
장 사장은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넵!”
우리는 모두 힘찬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 *
“자, 민 과장이 한마디 하면 되겠다. 잔들 들어볼까?”
장 사장의 이야기에 다들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나는 내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과장이 됐다고 기뻐하기보다는 자리에 맞게, 더 열심히 더 많은 일을 하라는 뜻으로 알고 지금보다 열심히, 아니 잘하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최대한 부족함이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 앞에 앉은 이들은 내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럼 광주 메디컬 하면 위하여를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광주 메디컬을!”
나는 마지막 외침과 함께 들고 있던 술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장 사장을 비롯한 모든 직원은 내 술잔 쪽으로 팔을 뻗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위하여!”
그렇게 첫 잔이 들어간 뒤로 우리는 끊임없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승진은 나만이 한 것이지만, 모두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축하주, 승진주 등 핑계를 만들며 우리는 한 잔 한 잔에 의미 부여를 하고 마셨다.
술병이 테이블 아래로 쭉 깔리고, 자리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며 처음에 앉은 자리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리고 지금 내 옆에는 장 사장만이 앉아 있다.
“민 대리, 아니지. 얼른 입에 붙어야 할 텐데. 민 과장 한 잔 받게.”
“네, 사장님.”
나는 그가 건네는 술을 양손으로 받아 냈다. 그리고 곧이어 그가 들고 있던 술병을 받아 장 사장의 빈 잔에 따랐다.
“사장님. 다시 한번 더 감사드립니다.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미 민 과장은 열심히 하고 있었어. 충분히 잘하고 있지. 그리고…….”
그는 말을 하다 말고 술잔을 들어 내 잔에 부딪혔다.
술을 한 번에 삼켜낸 장 사장.
그는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조금 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민 과장.”
“예.”
“며칠 전에 JC 병원에서 내가 소리쳤던 거 있잖아.”
JC 병원에 데모를 갔던 날.
장 사장은 접촉 사고로 인해 늦게 도착했고, 그 때문에 내가 데모를 했었다.
나의 데모 시현은 장 사장이 지시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나에게 했던 부탁은 단 하나. 장 사장이 도착할 때까지 내가 JC 병원의 임 원장을 붙잡아 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길어진 장 사장의 도착 시간 때문에 나는 결국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
아니, 못한 것이지.
그래서 나는 내 결정대로 데모를 했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결과가 좋았으나, 장 사장 입장에서는 JC 병원에 도착했을 당시 자신이 지시한 사항이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기에 나에게 화를 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이야기하기 전, 과정에 대해 장 사장에게 사과를 했었다.
장 사장이 그렇다고 크게 화를 냈던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처음으로 화를 냈던 것이 못내 마음에 남았던 모양.
“그때는 내가 사고도 나고 조금 예민했었어.”
장 사장은 미안한 얼굴로 내게 말했고 나는 그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당연히 사장님이 도착하셨을 때 임 원장님이 떠나신 후였으니까요. 사장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처음에 막 들어갔을 때에는 임 원장이 없어서, 당장 민 과장한테 화가 나더라고. 데모도 내가 해야 했는데, 사고 때문에 일이 틀어지다 보니 화부터 났던 거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적으로는 민 과장 결정 덕에 JC 병원 성공했으니, 고마운 마음도 있지만 미안한 마음도 있어.”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고, 그런 그에게 나는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일 알려주신다고 데려가 주신 덕에 그렇게 된 거 아니겠습니까. 제가 좋은 경험도 하고, 운이 좋았던 덕에 성사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사장님께 배우며 데모 연습을 많이 했으니 그런 결과가 있었던 거죠.”
그는 내 말에 아무런 답 없이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들었다.
“아무튼, 내가 민 과장한테 거는 기대가 커. 앞으로 우리 열심히 해보자고. 잘 부탁해, 민 과장.”
“열심히 하겠습니다!”
장 사장이 자리를 비우고, 나는 고개를 돌려 옆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옆 테이블에는 손 차장, 한태준 그리고 박 주임이 연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오늘의 가장 큰 화제 중 하나인 JC 병원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JC 병원이 VIP들만 예약 잡아서 수술하면 한 달에 수술이 몇 건 없는 거 아닙니까?”
한태준은 코를 찡긋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손 차장.
“그렇지. VIP들이니까 그렇게 많지 않아. 대신 한 번 수술하면 그 비용이 어마어마한 거지. 봐라, 일반 병원에서도 VIP 입원실 하루 비용이 얼만데. 거기는 온 병실이 다 VIP실이잖냐.”
“와. JC 병원은 진짜 돈 많이 벌겠네요. 그럼 저희도 이제 매출 빵빵해지는 거예요?”
박 주임은 금액 이야기에 놀랐는지, 커진 눈으로 손 차장을 보며 물었다.
“아니. 박 주임도 알다시피 우리는 급여가로 물건이 나가잖아. 우리 매출이 JC 병원 덕에 그렇게 커지지는 않을 거야.”
“어? 그러네요. 우리는 급여가가 정해져 있으니까. 뭐야, 그럼 JC 병원만 혼자 돈 엄청 벌고 우리는 뭐 없는 거예요?”
박 주임은 고개를 획 돌려 나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나는 그녀의 눈빛에 놀라 침을 한번 꿀꺽 삼켜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JC 병원 덕에 저희 매출이 배로 뛰지는 않겠죠. 일반 병원 영업한 거랑 같다고 보면 돼요. 근데 JC 병원은 다른 병원의 영업이 완전히 막혀 있어요. 우리랑만 일을 한다는 거죠.”
내 말에 한태준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며 덧붙였다.
“맞아요. JC 병원은 한 군데 업체랑만 일하는 거로 유명하다던데. 그래서 다른 메디컬은 병원 들어가자마자 입구컷이래요.”
“응. 다른 병원은 우리가 영업해도 타 메디컬에서 영업을 왔다가 빼앗길 위험이 있어서 관리를 열심히 해야 하지만 JC 병원은 우리와 병원 사이에 큰일이 발생하지 않는 한 거래처를 빼앗기지 않지.”
나와 한태준의 말에 이해가 됐는지, 박 주임은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이해됐어요. 그래서 우리 회사가 광주에서 좀 유명해지겠네요? 그 큰 병원에 거래하는 메디컬 회사가 광주 메디컬이니까?”
손 차장은 그녀의 말에 손가락을 튕기며 답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JC 병원을 따낸 게 엄청난 일이야. 자, 그럼 그 기념으로 한잔할까?”
“네!”
우리는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어휴. 오늘 진짜 죽겠다.”
“그러게요. 내일 저희 쉬는 날이라고 너무 많이 마셨어요. 하.”
술집 앞으로 나온 우리는 다들 술기운이 올라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중 젊은 피인 한태준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은 뒤 입을 열었다.
“대리운전은 제가 부르겠습니다! 어? 사장님은요?”
손 차장은 헛구역질하며 답했다.
“하. 사장님 뒤에 나오실 거야. 나 대리운전 부르는 곳 있어서 내가 부를게. 나 먼저 차로 간다. 다음 주에 보자.”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손 차장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후, 들어가자. 태준이가 내 대리운전도 좀 불러줘라.”
장 사장은 뒤에서 걸어 나오며 한태준에게 외쳤다.
“예, 사장님. 바로 부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박 주임은 어떻게 가?”
“저는 택시 타려고요.”
“늦었는데 위험하게……. 민 대리가 가는 길에 내려줘. 둘이 같은 구에 살지 않아? 가는 길에 좀 내려줘.”
장 사장의 말에 박 주임은 놀라 나를 바라보았고, 장 사장은 나를 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박 주임이 나를 좋아하는 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장 사장이다.
그는 여전히 그녀와 내가 잘되는 것을 바라는지 일부러 엮어준 것 같았다.
“아… 네. 박 주임님, 괜찮으시면 가는 길에 내려드릴게요.”
나는 지난번 박 주임의 데이트 신청을 매몰차게 거절했었다.
그래서 그녀와 단둘이 있는 자리가 불편한 것은 나보다 오히려 그녀일 거란 생각이 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지 웃으며 내게 답했다.
“좋아요!”
나는 예상외의 대답에 고개를 얕게 끄덕여 보였다.
모두가 떠난 술집 앞.
나와 박 주임만 남은 그곳에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저희도 갈까요? 대리운전 바로 부를게요.”
“저… 과장님. 술도 많이 마셨는데, 앞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만 먹고 가면 안 돼요?”
“네?”
“아이스크림이요! 저기 바로 앞에 편의점 있는데…….”
그녀는 손을 쭉 뻗어 앞에 있는 편의점을 가리켰다.
“네… 그래요.”
그녀와 나는 각자 앞을 바라보며 편의점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은 날 마신 술, 그 양은 어마어마했다.
덕택에 그녀와 나는 평소보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걷고 있었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박 주임과 둘이 있는 공간, 이 자리가 어색했을 텐데 술기운에 그 느낌이 덜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고른 뒤 나는 카드를 꺼냈다.
그녀는 미리 준비를 해뒀는지 손에 들고 있던 자신의 카드를 꺼내 직원에게 재빨리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제가 살게요.”
“아니에요. 얼마 안 하는데, 이건 제가 살게요. 맨날 민 과장님이 사셨잖아요.”
카드를 쥐고 내밀고 있던 내 손을 밀어내고 자신의 카드를 직원의 손에 건넸다.
“아… 그럼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그녀는 술에 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박 주임과 편의점 바로 앞에 있는 파라솔 의자에 앉아 아이스크림 봉지를 뜯었다.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문 박 주임은 테이블 쪽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자신의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며 눈을 껌뻑거리며 물었다.
“과장님.”
“네?”
“음… 과장님 되신 거 축하드려요.”
그녀의 말에 나 역시 몸을 돌려 박 주임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러자 그녀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다음 말을 이어 갔다.
“근데요. 대체 연애는 언제 하실 거예요?”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