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 한 계단 】
JC 병원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주차장 근처에 서 있던 장 사장 앞으로 차를 끌고 갔다.
“사장님. 기구 다 챙겼습니다.”
장 사장은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그 담배를 던진 후 내게 말했다.
“나, 차는 거기서 바로 수리 보내서 택시 타고 왔어. 사무실로 들어갈 거지?”
“네, 타십시오.”
나는 잠긴 문을 열었다.
조수석에 몸을 싣는 장 사장.
그는 조금 전 JC 병원 회의실에서 빠져나갈 때까지만 해도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표정은 평온 그 자체였다. 아니, 오히려 기쁨에 더 가까워 보였다.
나는 출발 전, 차에 올라탄 장 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장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내 질문에 그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답했다.
“그럼! 가벼운 접촉 사고였어. 잘잘못 따지느라 조금 걸렸는데, 그놈이 뒤에서 박은 거라 바로 보험 부르고 차 넘긴 후에 택시 타고 왔어. 몸은 안 다쳤어.”
“안 다치셔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사장님.”
“그래.”
그는 안전벨트를 채웠고, 나는 곧바로 기어 변경 후 액셀을 밟았다.
차가 JC 병원을 떠난 지 100m도 되지 않았을 시점, 장 사장이 내게 물었다.
“민 대리. 왜 말 안 했어?”
“예?”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원장님이랑 통화했어. 민 대리, 데모 엄청나게 잘했다며?”
내 차는 도로에 오르기 전, 아직 JC 병원 근처였다.
나는 그의 말에 서둘러 발을 브레이크로 옮겨 꽉 밟아냈다.
차가 멈추고, 관성의 법칙에 따라 우리 모두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민 대리, 뭐야? 왜 그래?”
“사장님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 왜 그러냐고.”
“아니요. 그전에요!”
그는 턱을 몸쪽으로 당기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예? 그 전에 원장님과 통화하셨다고 하셨잖아요.”
“어. 민 대리 데모 잘했다고…….”
나는 재차 말하는 장 사장의 말에 그 자리에서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와! 정말입니까? 원장님이 그러신 겁니까?”
“그래. 민 대리 어떻게 데모한 거야? 하하, 고생했다. 아까 왜 잘했다고 이야기를 안 했어.”
장 사장은 내게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나는 너스레를 떨며 답했다.
“아까 제가 데모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에이, 굉장히 잘했었다고 말했어야지. 하하. 아무튼, 오늘 고생 많았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오늘 덕분에 데모 잘 마쳐서 다행이야. 결과가 잘 나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오늘 애썼다.”
장 사장의 말에 종일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그제야 녹아내렸다.
* * *
며칠 뒤.
내가 데모했던 수술 기구는 VIP 환자에게 사용하기 위해 JC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 수술 기구가 JC 병원 임 원장에게 마음에 들었던 모양.
장 사장과 나는 기구를 넣은 후 그 어느 때의 영업 성공보다 기뻐했다.
이번 골반 수술로 인해 앞으로 JC 병원의 기구는 모두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한 군데 메디컬과만 거래를 하고, 타 메디컬은 영업 시도조차 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JC 병원.
그렇기에 광주 내에서 우리 광주 메디컬의 위상은 더 오를 것이 분명했다.
기쁨을 만끽하며 하루를 보내고, 퇴근을 몇 시간 앞둔 시각.
나는 사무실로 복귀했다.
이유는 오늘 오후 회의가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맞춰 회의실로 들어갔고 이미 안에는 장 사장을 제외한 전 직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녀오셨습니까?”
한태준은 회의실로 들어가는 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그에게 손을 뻗어 화답한 뒤, 나 역시 손 차장에게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차장님.”
“어. 왔어, 민 대리?”
그 뒤로 곧이어 장 사장이 들어왔고, 회의가 시작됐다.
“자, 다 모였으면 바로 이야기할게.”
“넵.”
장 사장은 책상머리 부분에 자리 잡고 앉아 우리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에서 JC 병원에 납품하기로 했어.”
장 사장의 한마디가 끝이 나자 한태준이 소리쳤다.
“와. 저희도 이제 그 삐까뻔쩍한 그 건물, VIP 병원에 납품 시작하는 거예요?”
그가 소리치자 옆에 앉아 있던 박수진 주임이 놀라며 물었다.
“어? 저도 알아요! 거기 큰 길가에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건물 말하는 거죠? 지어진 지 한 1년 됐었나?”
“어, 맞아.”
장 사장은 뿌듯한 얼굴로 그들에게 답했고, 한태준과 박 주임이 놀라는 모습을 보며 목을 풀고 말을 이어 갔다.
“흠흠. 그래서 오늘 제일 먼저 할 이야기는 말이야.”
그의 이야기에 모든 직원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장 사장의 입만을 바라보며 집중했다.
“그 JC 병원에 물건을 납품하게 된 게 민 대리 덕분이야. 다들 박수 한 번씩 줘.”
“와, 진짜요? 헐, 대리님!”
한태준은 장 사장의 말을 듣고 놀란 얼굴로 손뼉을 연신 쳐댔다.
박 주임과 손 차장 역시 나를 바라보며 손뼉을 부딪치며 환호해 주었다.
나는 장 사장의 말과 그들의 태도에 당황해 두 손을 뻗어 손사래 쳤다.
JC 병원은 내가 먼저 잡아 온 병원도, 그리고 나 혼자 해낸 병원도 아니었기에 내가 칭찬을 받는다는 게 민망했기 때문이다.
“사장님. 제가 한 게 아니라, 사장님께 배우며 한 일인데요.”
나는 장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고, 그 역시 몸을 틀어 나를 보며 대답했다.
“민 대리가 잘 서포트 해준 덕분에 이뤄낸 거지. 어제 임 원장님 뵙고 왔는데, 민 대리 칭찬 엄청나게 많이 하시더라. 잘했어.”
그의 계속되는 칭찬에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서포트는 제가 한 게 아니죠. 저는 그저 사장님이 기회를 주셔서 교육 현장에 따라가 열심히 배우기만 하고 온 건데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니까 고맙네.”
회의실 분위기는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정도로 칭찬이 오고 갔다.
손 차장은 대화를 끊어내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오늘 주간 회의에 중요하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그는 장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투에서는 이미 장 사장이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장 사장은 그의 말에 손가락을 튕기며, 우리 모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 오늘 특별하게 전할 이야기가 있어서 갑자기 회의하자고 했어.”
우리는 다시 한번 장 사장에게 집중했고, 장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 주임을 향해 외쳤다.
“박 주임. 내가 준비해 달라고 한 것 좀 지금 가져다줄래?”
“네. 책상에 두고 와서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잠깐의 사이 한태준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내게 쌍 엄지를 들며 웃고 있었다.
한태준에게 미소로 화답한 뒤 다시 들어오는 박 주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슨 일인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싱긋 웃으며 손으로는 장 사장에게 작은 상자 하나를 건넸다.
“사장님, 말씀하셨던 거 여기 있습니다.”
“그래. 고마워.”
장 사장은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자신의 앞에 내려놓고, 나에게 말했다.
“민 대리.”
“네, 사장님.”
“잠깐 일어나 볼래?”
회의 중 갑자기 일어나라는 장 사장.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살펴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자리에서 우뚝 선 채로 장 사장을 바라보자, 그는 한 손으로 박 주임이 가져온 작은 상자를 집어 들고 내게 건넸다.
“민 대리. 그동안 애 많이 썼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 더 열심히 해달라는 무언의 압박!”
“예? 이게 뭡니까?”
“선물이야. 얼른 받아 봐. 팔 떨어진다.”
장 사장은 상자를 떨어트릴 듯한 시늉을 했고, 나는 재빨리 두 손을 뻗어 그 상자를 받아냈다.
“…감사합니다!”
안에 어떤 것이 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선물이라는 말에 나는 재빨리 감사 인사를 외쳤다.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자, 주변에서는 다들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얼른 열어봐요, 대리님.”
박 주임은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내게 말했고, 나는 서서히 그 상자를 열기 시작했다.
굳게 닫혀 있는 상자를 열자, 안에는 더 작은 상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종이가 켜켜이 담겨 있었다.
그 더 작은 플라스틱 같은 투명 상자를 열어 종이를 한 장 빼내 눈앞으로 가져왔다.
종이는 바로 명함.
그렇지 않아도 내가 명함이 떨어져 간다는 사실을 이야기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재인쇄를 해주셨지? 하는 생각에 의아한 표정으로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장 사장이 이렇게까지 세심한 사람이었나?
나는 장 사장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곧바로 시선을 내려 내가 들고 있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눈으로 내 명함을 가리키며 눈을 껌뻑거렸다.
나에게 무언가 알려주는 듯한 눈빛.
장 사장의 시선을 따라 나도 곧이어 내 명함을 다시 바라보았고, 그걸 자세히 본 나는 눈을 의심했다.
명함에 쓰여 있는 이름 옆자리에는 직함이 존재한다.
내 명함에 ‘대리’라고 기재가 되어 있어야 할 곳에 ‘과장’이라는 글씨가 아주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과장 민지훈]
승진!
승진이었다.
나는 내가 승진한다면 아무 느낌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보통 승진을 한다면 소리를 지르고 기뻐하기 바쁘지만, 예전에 대리라는 직책을 달았을 때 그러지 못했으니까.
그때는 주변을 둘러보아도 칭찬의 눈빛보다는 시기 질투의 눈빛이 훨씬 많았다.
WG 메디컬은 그 당시 직원 수도 여럿이었던 회사였고, 그렇기에 모든 직책이 빽빽이 존재했었다.
더불어 각 직책당 인원이 최소 두 명 이상은 되었던 회사였던 터라, 누가 먼저 능력을 쌓아 승진하느냐가 눈에 빤히 보였다.
그래서 연차에 맞지 않게 승진하게 된 나는 그 당시 기뻐만 할 수는 없었다.
보통 인턴에서 사원이 되는 것은 능력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
인턴은 수습 기간이 끝나고, 특별하게 큰 잘못을 하지 않는 한 그대로 사원이 된다.
하지만 사원에서 대리까지 올라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나는 운이 좋게도 금방 내 능력을 보여줄 일도 많이 생겼고, 그래서 내 능력을 좋게 평가받아 WG 메디컬에 있을 당시, 초고속 승진을 했었던 거지.
그래서 내 승진을 아니꼽게 여겼던 시선을 한몸에 받은 후에는 ‘승진’이라는 것에 대한 감흥이 크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 과장이라는 명함을 확인하는 순간 내 온몸에는 전율이 느껴졌다.
몸에 있는 털이 전부 쭈뼛쭈뼛 서는 기분.
이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보통 승진을 할 때면 당사자에게 미리 언질을 주는 편이다.
JC 병원 데모 전, 나 역시 손 차장에게 그 영업이 잘된다면 승진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빨리 다가올 줄은 전혀 몰랐었다.
어쩌면 우리 광주 메디컬의 인원수가 적기에 내 승진이 당겨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승진, ‘과장’ 아니겠는가.
명함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장 사장은 내게 소리쳤다.
“민 대리!”
그의 큰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아니, 이제 민 과장이지! 민 과장 뭐 해, 어서 민 과장님 명함 하나씩 전달해 주세요. 하하.”
나는 장 사장에게 허리를 접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믿고 과장 달아주신 만큼 더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그래. 우리 민 과장 실력이면 진작 과장직 달았어야지.”
“믿고 맡겨주신 만큼 업무로 보답하겠습니다.”
“하하. 그래. 민 과장, 고맙네.”
나는 속으로 환호를 지르고 기뻐했지만, WG 메디컬에서 대리를 달았던 그 순간을 여전히 잊을 수는 없었다.
그 당시의 표정 중 잊을 수 없는 몇몇 직원의 표정이 있다.
대표적으로는 최준성 과장이었지.
그때의 시선이 떠오른 나는 조심히, 그리고 빠르게 고개를 돌려 직원들의 표정을 스캔했다.
하지만 전 직원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손 차장은 말할 것도 없이, 거의 아빠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 차장은 이미 내 승진을 알고 있었을 테지만.
앞에 앉은 박 주임 역시 입이 귀에 걸릴 듯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한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손뼉을 쳤다.
나는 그들을 바라본 후에야 안도하는 마음으로 마음껏 기뻐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내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민 대리님! 아니지, 민 과장님! 얼른 명함 구경시켜 주세요.”
한태준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양손을 내밀고 명함을 받을 준비를 했다.
“어허. 차례 지켜야지. 나부터 줘야지, 민 과장. 어디 명함 좀 봐보자.”
손 차장은 농담이 섞인 말투로 내게 말했다.
회의실 가득, 훈훈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민 과장 오늘 승진했는데 맛있는 거 먹어야지, 안 그래?”
손 차장은 명함을 바라본 후 내게 말했고,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외쳤다.
“예! 제가 승진 턱 쏘겠습니다.”
내 말에 직원들은 모두 환호했고, 장 사장이 그 흐름을 끊고 외쳤다.
“안 돼. 오늘 민 과장 승진했으니까, 오늘은 내가 한턱 쏜다. 다음에 민 과장은 밑에 직원들 데리고 우리 윗물들 빼고 한턱 쏴. 오늘은 사장인 내가 기쁜 마음으로 살 거야.”
“넵.”
그의 말에 우리 모두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참, 오늘 불금인데 다들 시간 괜찮나? 빠지면 어쩔 수 없고. 입 하나라도 빠지면 나야 돈 굳고 좋지 뭐. 하하.”
장 사장의 말에 손 차장이 덧붙여 말했다.
“그래. 빠진다고 뭐라 할 사람 없으니까, 괜찮아. 편하게 이야기해.”
손 차장은 고개를 돌려 한 명씩 바라보았고, 그때 박 주임이 가장 먼저 손을 들었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