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없는 번호라고 나오는데, 아무래도 번호를 바꾼 것 같습니다.”
재차 묻는 장홍석 사장에게 한태준이 설명했다.
어젯밤, 나와 백태석이 헤어진 시간은 그렇게 늦은 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지금 이 시간까지를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다.
그 짧은 시간 내 생각을 마치고, 전화번호를 바꿔버리다니…….
나는 장 사장과 한태준의 대화를 들은 후 곧바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시선은 내 손에 들려 있는 종이 한 장으로 옮겼고, 나는 그 종이를 서둘러 펼쳐 보았다.
종이에는 빼곡하게 손글씨가 적혀 있었다.
내용을 읽기 위해 왼쪽 상단 첫 글씨를 읽으려는 데…….
“와. 백태석 이놈이 스파이였다고?”
손지혁 차장이 옆에서 기가 찬다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손 차장은 내용을 읽으며 혼잣말을 내뱉었고, 그 소리에 장 사장과 나머지 직원들은 손 차장의 자리로 달려갔다.
“뭔데? 무슨 일이야?”
“스파이라니요? 무슨 일인 겁니까, 차장님?”
남은 내용을 모두 읽은 손 차장은 종이를 구겨 접고, 장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장님, 책상 위에 올려진 편지도 볼 수 있을까요?”
그의 말에 장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장 사장의 자리로 걸어갔다. 그리고 무슨 일이냐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는 한태준.
손 차장은 한태준을 쳐다보며 답했다.
“백태석 어디에 있을지 한번 알아봐. 상황은 이따가 설명해 줄게.”
“네, 알겠습니다.”
한태준은 고개를 잘게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내 자리에 앉아 다시 종이를 살펴보았다.
그 내용에는 백태석이 나에게 전날 이야기했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왜 스파이 짓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로 인해 WG 메디컬과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에 대해.
그 일에 대해 한참 서술한 뒤에야 자신의 마음과 사과가 적혀 있었다.
백태석 자신을 믿어준 나에게 먹칠을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크다는 이야기가 길게 서술되어 있었다.
나는 백태석이 얼마나 회사에 다니고 싶어 했는지를 알기에, 그가 이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상황 설명 후, 진심을 담아 사과를 한다면 회사에서는 그를 용서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혀 있을 것이기에 회사 생활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태석이 회사에 다녀야 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하고 다녀야 했을 터.
회사 사람들에게 배신자 이미지를 천천히 씻어내는 것 또한 그가 감내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태석은 이 일의 결론을 ‘회피’로 지어버렸다.
더불어 편지 내용에는 자신이 면목이 없어 얼굴을 보고 사과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있었고, 다시는 메디컬 바닥에 발을 들이지 못하겠다는 말이 덧붙어 있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됐다.
그렇다고 해서 내부 정보를 WG 메디컬에 돈 주고 팔았다는 것이 용인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미리 방지해 2차 입찰까지 WG 메디컬에 넘어가지는 않았기에, 그 점을 염두에 둔다면 회사에서는 백태석을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백태석이 회피를 선택하지 않았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 사장과 손 차장은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며 둘이서 이야기를 길게 나눴다.
“민 대리.”
장 사장은 나에게 다가와 내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나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들어 장 사장을 바라보았고, 그는 검지와 중지를 붙여 담배를 피우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민 대리도 편하게 피워.”
회사 앞으로 나와 장 사장은 담배를 입에 물며 내게 말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고개를 돌려 불을 붙였다.
장 사장은 연기를 내뿜으며 입을 열었다.
“하. 진짜 민 대리 말대로 스파이가 있을 줄은 몰랐어.”
지난번에 내가 이야기 해주었던 말.
그는 스파이가 있었을 거라는 내 말을 끝까지 믿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겠지. 그는 백태석의 편지를 모두 읽고 나서도 믿고 싶지 않은 듯한 얼굴이었다.
“저도 몰랐습니다.”
“태석이 같은 성격이 그런 짓을 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 김 대표 그 새끼는 최준성도 돈으로 그 꼴을 만들더니……. 진짜 제 버릇 못 고칠 거야, 평생.”
WG 메디컬의 김윤중 대표는 돈을 이용해 최준성 과장이 혼자 잡혀가게 놔둔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자신이 돈과 모든 인맥을 동원해 최 과장을 금방 빼내겠다고 했다지만, 최 과장은 여전히 아무 소식이 없다.
김 대표는 그저 모든 것을 돈으로만 바라보는 스타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 사장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네. 아마 그분은 망하더라도 돈으로 망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 인과응보가 딱 맞는 말이야.”
장 사장은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를 한 모금 피웠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민 대리.”
그의 부름에 나는 황급히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고 그를 바라보았다.
“예, 사장님.”
“민 대리 아니었으면 2차 입찰도 WG 메디컬에 고스란히 빼앗길 뻔했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속마음을 통해 알았다고 할 수 없는 일.
나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알았긴요. WG 메디컬에서 너무 티가 나게 200원 낮게 입찰한 것 보고 그냥 찍은 거죠. 일종의 감이라고 할까요? 하하.”
내 말에 장 사장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감 좋네, 우리 민 대리.”
“이게 다 사장님께 배운 건데요, 뭘. 그냥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일은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해서 사장님께 제안 드렸던 거고요.”
그는 내 말에 담배 연기를 후 불어 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저는 제안만 드렸을 뿐이지, 결정은 사장님께서 해주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중요했던 2차 입찰을 저희가 따냈다는 게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하. 민 대리, 겸손하기까지 하네.”
나는 그의 말에 뒷목을 긁적이며 답했다.
“아닙니다.”
“아무튼, 정말 대단해. 그리고 고맙고. 민 대리 아니었으면 눈뜨고 코 베일 뻔했어.”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와 장 사장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담배를 물었다.
그렇게 말없이 담배를 피우다가 나는 장 사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장님, 그럼 이제 태석이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는 내 말에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 없이 답했다.
“태석이? 글쎄다. 이런 식으로 떠나버리면 내가 뭘 해줄 수가 있나 싶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차라리 나에게, 아니면 지훈이 너한테라도 도움을 요청했으면 우리가 미리 도울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장 사장 역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그도 백태석을 도울 마음이 없지는 않았던 것.
“게다가 이번 일도 그래. 태석이는 아직 어리잖아. 판단을 스스로 하기에, 그리고 유혹을 그저 모른 체하기에 어려. 이실직고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충분히 눈감아 주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을…….”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백태석은 사회 초년생. 나이 자체도 대학을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인 20대였다.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백태석에게 WG 메디컬의 제안은 달콤한 유혹이었을 테지. 백태석이 뿌리칠 수 없었던.
끝에 내가 진심으로 조언을 했지만, 떠나버린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그 선택을 내가 달려가 붙잡으며 무를 수는 없었다. 그 또한 그의 선택이었을 테니.
“그리고 태석이가 번호까지 바꾸고 떠난 마당에 어쩌겠냐.”
“예, 그렇죠.”
“떠나간 놈 붙잡을 시간이 없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기에도 바쁜 세상이니까.”
장 사장은 한마디를 내뱉으며 담배를 밟아 꺼트렸다. 그리고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들어가자.”
“네.”
그의 말을 따라 나 역시 담배를 끄고 장 사장을 따라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다.
출근하자마자 시끌벅적했던 사무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안정을 찾았고, 모두 바쁜 일상을 이어 갔다.
병원으로 하나둘 빠져나가고 이곳에는 나와 장 사장, 그리고 박수진 주임만이 남아 있었다.
서류 정리를 하던 그때.
장 사장은 무슨 전화이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으로 휴대전화를 꼭 붙잡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의 모습과 목소리에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예? 정말요? 네, 원장님. 알고 있습니다.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하셔야죠. 네. 제가 곧 찾아뵙겠습니다. 네, 오후에 바로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휴대전화를 붙잡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무슨 전화이기에 저렇게 기뻐하는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순간 장 사장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환한 얼굴로 내게 손짓했다.
“민 대리, 잠깐 회의 테이블로 좀 와 봐.”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흠칫 놀랐지만, 그의 부름이 더 급했다.
나는 곧바로 다이어리와 펜을 챙겨 발길을 옮겼다.
내가 짐을 챙기는 사이, 그가 먼저 회의실 의자에 앉아 있었고 여전히 흥분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장 사장.
“민 대리. 얼른 앉아 봐.”
“네. 사장님 무슨 좋은 일 있으신 겁니까?”
“하하. 아직.”
아직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있기는 있는 모양.
“민 대리. JC 병원 알지?”
“JC 병원이요? 그 큰 새 건물에 있는 병원 말씀하시는 거 맞죠? 일 년쯤 전에 새로 지은 건물에요.”
“어, 맞아.”
“네. 들어는 봤습니다. 소문이 무성한 곳 아닙니까?”
JC 병원.
광주에 들어온 지,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병원이다.
1년 정도가 된 병원이지만, 건물을 워낙 크게 지어 놨기에 아직도 그 근처를 지나면 한 번씩 눈길이 가는 곳이다.
하지만 그 병원은 얼마 안 된 것치고 굉장히 여러 가지 소문에 둘러싸여 있다.
더불어 아무 메디컬 회사에서도 영업을 가지 않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
이유는 절대 뚫리지 않는 단단한 벽이 있기 때문이다.
한군데의 메디컬 회사가 꽉 잡고 있다는 소문, 아니 팩트가 있었다.
여러 메디컬 회사에서 갔지만 단번에 입구 컷을 당했다고 한다.
또 다른 소문 중에는 일반 환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 병원이라는 것이 있었다.
대체 병원에서 일반 환자를 받지 않으면 그게 무슨 병원이냐고 할 수 있지만, 그 JC 병원은 그랬다.
일반 아픈 환자들이 오는 병원이 아닌, 돈이 많은 재벌과 VIP만을 상대하는 병원이라 환자가 많지 않아도 돈이 차고 넘치는 병원이라는 소문.
그 소문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는가.
실제로 그 병원은 예약 진료를 받았고, 주변에 일반 환자가 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병원이 있는 건물 이름 자체가 JC 빌딩이다. JC 병원의 소유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빌딩이 높고 넓은데도 병원은 두 층만 쓰고 있다.
환자 수가 많다면 건물 전체를 JC 병원으로 사용했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환자의 수가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그 병원이 소문이 많긴 하지.”
“그런 소문들은 정말입니까?”
“어떤 소문?”
“재벌이나 유명인들이 아니면 진찰이든 수술이든 못 받는다는 거요.”
나는 장 사장에게 물었고, 장 사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음, 뭐……. 대부분 맞지.”
나는 질문을 바꿔 그에게 다시 물었다.
“JC 병원의 원장님이 원래 부자이신 거예요?”
“아니. 다 병원 일 하면서 번 돈으로 부자 된 거지.”
“항상 환자도 얼마 없는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장 사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답했다.
“왜겠어. 민 대리도 방금 소문 진짜냐고 물어봤잖아. 환자들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