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음덕양보 】
김사랑 원장은 짧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숙여 가방에 손을 넣었다.
“원장님, 뭐 찾아요?”
“잠깐만…….”
그녀는 내게 대답을 하다 말고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찾았다!”
그녀는 가방에서 종이 두 장을 꺼내어 내게 흔들며 웃어 보였다.
“이게 뭐예요?”
“티켓이지. 영화 티켓.”
활짝 웃으며 답하는 그녀.
영화관 앞에서 만나자더니, 영화관 근처 술집이 아닌 정말 영화를 보기 위해 부른 모양이다.
“네? 갑자기 영화요?”
김 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여자와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게 언제였더라, 라는 생각에 잠겼다.
병원 원장과 술을 마시러 나온 것인데, 단둘이 보는 영화라니. 게다가 이미 표까지 끊은 그녀에게 거절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미 들떠 있어 보였다.
그녀는 내 얼굴을 보고는 미소를 지워낸 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영화 싫어해?”
“아니… 그건 아닌데, 갑자기 단둘이 영화를 보자고 하셔서요.”
“나 영화 진짜 좋아하거든. 서울에 있을 때 너무 바빠도 시간 꼭 내서 영화 보러 다녔었는데…….”
그녀는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근데 광주 오니까, 민 대리님도 알다시피 내가 여기에 친구가 없잖아. 나 혼자서 영화 본 적이 없어서……. 나 혼자 뭐 돌아다니는 걸 잘못해서… 민 대리님이랑 같이 보려고 했지.”
김 원장의 한껏 기죽은 목소리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같이 봐요!”
그녀는 내 대답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고, 그제야 다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이지?”
“네. 저도 영화 좋아해요.”
여기까지 온 마당에 거절해서 무엇하겠는가.
모던 정형외과에 늦게 영업을 갔던 것이 그녀에게도 미안했기에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예!”
김 원장은 함께 영화를 보자는 내 말에 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미소를 짓고, 함께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와, 영화관 진짜 오랜만에 와요.”
나는 실제로 오랜만에 오는 영화관이기에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진짜 오랜만에 오나 보네. 무슨 시골 사람이 영화관 처음 온 것처럼 구경해. 하핫.”
그녀는 나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근데 우리 무슨 영화 보는 거예요? 요즘 어떤 영화들 나오는지도 모르는데.”
김 원장은 내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웃음으로 무마했다.
“재밌는 거 예매해 뒀어. 보면 알아.”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스크린에 떠 있는 영화들을 눈으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 팔을 끌어당기며 이야기했다.
“저기! 팝콘 사러 가자. 빨리.”
“아… 네!”
김 원장과 양손에 팝콘과 나초, 콜라를 하나씩 들고 영화관으로 입장했다.
무슨 영화인지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이 남녀, 커플로 온 것 같았다.
“원장님. 무슨 영화…….”
“시작한다!”
* * *
“원장님. 저희 함께 지내 온 시간이 벌써 몇 년입니까.”
WG 메디컬의 최권호 부장은 앞에 앉은 모던 정형외과의 이동석 원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 부장. 그건 알지만…….”
그는 최 부장에게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고, 최 부장은 쉴새 없이 대답했다.
“제가 견적서도 새로 넣어 드렸지 않습니까. 아시잖아요. 저희도 본사에서 계속해서 단가 많이 올랐던 거. 저희는 그거 올리지 않고 넣어 드렸습니다. 그리고 원장님과 저는 예전부터 함께 봐온 세월이 얼마입니까.”
이 원장은 최 부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저희가 이번에 단가도 낮춰서 다시 견적도 넣어 드렸는데, 갑자기 광주 메디컬이랑 일을 하시겠다고 하면… 저희는 어떻게 합니까.”
최 부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이 원장에게 말했다.
“부탁드립니다, 원장님.”
이 원장은 그의 이야기에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답했다.
“최 부장.”
“예, 원장님.”
이 원장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민지훈 대리가 원래 내 담당이지 않은가.”
최 부장은 그의 말에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나는 짧든 길든 그동안 민지훈 대리와 일을 했던 걸세. 물론 WG 메디컬에서 민 대리가 일을 했지만, 나는 민 대리만을 보면서 일했어. 최 부장이 그동안 우리 병원에 온 횟수는 손으로도 꼽을 수 있지 않은가.”
그의 말에 최 부장의 입은 얼어붙고 말았다.
“광주 메디컬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내 마음도 좀 이해해 주게.”
최 부장은 그의 말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고 허리를 90도 넘게 폴더로 접어 그에게 외쳤다.
“원장님, 도와주십시오. 저희 대표님과도 친분이 오래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다른 몇 분의 원장님께서는 아직 WG 메디컬과 거래하고 계시고요.”
최 부장이 김 대표를 언급하자,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
“저희 대표님께서 지시해 주신 건데…….”
최 부장은 가방 속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게 무슨…….”
그가 내민 종이에는 한가득 빼곡하게 글씨가 적혀 있었다.
회사에서 납품하고 있는 소모품, 수술 기구들 명칭과 금액이 나열되어 있는 표. 그리고 그 금액 옆에는 작은 글씨로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견적서입니다.”
“견적이라면 지난번에 보내 줬던 자료 아닌가?”
이 원장은 서류를 눈으로 빠르게 살폈다.
“단가도 그때와 일치하는데 뭐가 다르…….”
그의 말을 자른 채 대답하는 최 부장.
“이 품목들 사용하시면 옆에 적힌 숫자 금액만큼 리베이트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최 부장의 말에 이 원장은 종이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훑으며 보는 그.
최 부장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표님께서 원장님과의 오랜 인연을 이어가야 하지 않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원장님과 긴 세월을 이렇게 헛되이 보내버리기는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이 원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뒤 입을 열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리베이트라니, 큰일 날 소리지.”
“업계에서 안 받으시는 원장님 없으십니다. 민 대리가 WG 메디컬에 있을 때도 챙겨드리지 못한 부분이지 않습니까. 대리 직책이니…….”
최 부장은 이 원장이 볼 새라 살짝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며 말을 이어 갔다.
“저희 역시도 그 당시에 민 대리에게 일임했던 병원이라 이제 와 챙겨드리게 되는 걸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최 부장은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대화의 불씨에 불을 지폈다.
“광주 메디컬은 이제 시작한 신생 회사입니다. 앞으로도 신제품 물건 받는 데 점점 더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WG 메디컬로 다시 돌아오심이…….”
최 부장을 바라보던 이 원장은 입술을 움찔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람 잘못 찾아온 거 같네, 최 부장.”
그의 단호한 대답에 힘을 주고 있던 최 부장의 눈빛은 풀려버렸다.
“예?”
“내가 김 대표와 최 부장을 오래 봐 왔는데, 내가 사람들을 잘못 봤었네.”
“아… 원장님 그게 아니라…….”
“이만 일어나주면 좋겠는데. 나 다음 환자 진료 봐야 해서 말이야.”
이 원장의 화가 올라오는 듯한 표정에 최 부장은 당황스러운 얼굴이 역력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 하러 올 거면 다시는 안 왔으면 한다고 김 대표에게 꼭 전하게. 주말까지 출근해서 나에게 이런 이야기 하러 온 거라니……. 하.”
이 원장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자 자리에서 나가라는 듯한 눈짓을 최 부장에게 보였다.
최 부장은 그의 제스처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진료실을 빠져나갔다.
진료실에서 나와 병원 정문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최 부장.
이 원장과 나눴던 대화 때문인지 넋이 나간 채로 허공을 바라보며 걸어가고 있는 그.
맞은 편에서 한 손에는 수첩, 나머지 한 손에는 볼펜을 들고 끄적이며 걸어오는 남성.
“아!”
앞을 보지 않고 오던 둘은 어깨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수첩과 볼펜을 들고 있던 남성이 최 부장에게 먼저 사과의 말을 건넸다.
넋이 나가 있던 최 부장은 정신을 번뜩 차리고 그에게 고개를 끄덕임으로 사과의 인사를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최 부장은 그의 얼굴을 바라본 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어? 어디서 봤는데?”
최 부장과 부딪친 후 병원 로비로 들어온 남성.
그는 볼펜으로 수첩에 글씨를 계속 끄적이며 원무과 간호사들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노트에는 커다랗게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정형외과 비리 사건.]
[정형외과 리베이트.]
[대리 수술 조사.]
그는 간호사들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광주 일보에서 나온 박진행 기자라고 합…….”
박 기자의 인사에 앉아 있던 간호사들이 눈을 마주치던 그때, 병원 전화가 울리며 대화는 끊어졌다.
“어? 몇 호? 알겠어. 지금 바로 올라가.”
간호사의 다급한 전화로 인해 그녀는 옆 간호사에게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김 쌤. 지금 입원실 환자 난동 피운다고 해서 저 지금 올라가요!”
“이번에는 또 몇 야, 하. 환자들 난동이 이렇게 자주……. 얼른 다녀오세요.”
전화를 받은 간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급하게 엘리베이터로 달려갔다.
박 기자는 황급히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를 타는 그녀를 조심스레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입을 열며 수첩에 글씨를 써 내려갔다.
“요즘 병원에 난동 부리는 환자가 많네? 이걸로 취재 좀 시작해 볼까?”
* * *
한편 그 시간, 영화관.
“하. 원장님…….”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 그녀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하. 민 대리님, 진짜 무서운 거 못 보는구나?”
그녀는 영화관 출입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내 얼굴을 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무서운 영화를 못 보는 게 아니라, 싫어해서 안 보는 거예요.”
“정말 웃겨. 앞으로도 나 민 대리님이랑 영화 보러 올래.”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내 팔을 툭 치며 말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영화 티켓 두 장을 지갑 안 지폐 자리에 고이 끼워 넣으며 말을 이어 갔다.
“다음에 또 보고 싶은 거 생기면 같이 오자! 내가 보고 싶은 영화 다음 달에 개봉한대. 알겠지?”
“그때 봐서요. 무슨 영화인지 먼저 알려주세요.”
공포 영화를 보고 나온 나는 그제야 얼굴을 펴내며, 어깨를 돌려 스트레칭을 했다.
“그래. 하핫. 하도 소리 질렀더니 목 아프다. 이제 우리 목이나 축이러 갈까?”
그녀는 오른손으로 술잔을 잡아 마시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좋아요, 가죠.”
영화관 근처에 있는 맥주 가게.
어느 술집을 갈까 지나가던 중, 새로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손님이 가득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여기 이제 막 오픈해서 그런지 분위기 진짜 좋다.”
그녀는 자리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며 미소를 활짝 지었다.
“그러게요. 안주도 꽤 괜찮은데요? 어떤 거 드실래요?”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판을 그녀가 보이게 밀어주며 말했다.
맥주가 먼저 테이블에 세팅되었고, 나는 그녀와 술잔을 부딪쳤다.
그녀는 목이 탔는지 맥주를 쉬지 않고 몇 모금을 연달아 마셔댔다.
탁.
맥주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는 김 원장.
“크. 좋다. 오늘 민 대리님 덕분에 즐거웠어.”
“저도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영화 보고, 좋았어요.”
“나 혼자 하는 거 잘못하는데, 민 대리님이랑 이제 취미 생활도 같이하면 좋겠다. 그렇지?”
그녀는 양손을 턱에 괴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
“왜, 같이 하자. 민 대리님도 광주에 친구들 없다고 했잖…….”
김 원장이 나에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하던 그때.
빠른 걸음으로 우리 테이블에 다가오는 발소리.
그 소리의 주인공은 달려와 우리 테이블에 양손을 ‘탁’하고 내려놓으며 외쳤다.
몸과 고개는 나를 향한 채.
“민 대리님!”
큰 목소리에 나와 김사랑 원장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