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안녕하십니까.”
나는 전날 이야기했던 대로 모던 정형외과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박승호 원장의 진료실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오전에 수술 진료가 잡혀 있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원장의 진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동석 원장.
내가 WG 메디컬에 있을 당시, 모던 정형외과를 담당으로 맡게 되면서 자연스레 나에게 물건을 발주하던 원장이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광주 메디컬에서 왔습니다.”
나는 미소를 장착한 채 이 원장의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민 대리님. 뭐야, 이제 회사 차려서 나갔다며?”
그는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네. 잘 지내셨죠?”
“응. 안 그래도 대체 언제 오나 하고 원장님들이랑 몇 번 이야기했었거든. 얼른 앉아.”
나는 그에게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원장님.”
“부탁은 무슨. 왜 이제 온 거야?”
그는 내 명함을 한 번 쓱 보고는 노트에 꽂아 두었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나는 이 원장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근데 오늘 안 원장님이랑 김 원장 다 자리에 없는데, 나랑 박 원장님만 만나고 가야겠다.”
“오늘 안국환 원장님이랑 김사랑 원장님 전부 휴진이십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안 원장님은 오늘 휴진이셨었고, 김 원장은 갑자기 오전에 휴진 내고 안 나왔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고.”
“아……. 그럼 연락 드리고 다음에 다시 와야죠. 하하.”
“그나저나 나 발주할 거 있는데, 박승호 원장님이랑 이야기해서 WG 메디컬 말고 민 대리한테 발주하려고 기다렸어.”
“감사합니다, 원장님.”
“재고 얼마 안 남아서, 이번 주에도 안 오면 그냥 WG 메디컬로 해야 하는 건가 하고 있었지.”
“제가 딱 맞게 왔네요. 하핫.”
그는 내 너스레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빨리 와서 발주 받아야지, 늦게 왔네. 발주 넣으면 물건은 금방 준비되는 거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요. 늦게 온 만큼 물건은 빨리 준비해서 넣어드리겠습니다.”
“알겠어. 목록 정리해서 이따가 전화 줄게.”
“넵.”
“박 원장님 수술 끝나셨나 보다! 어서 가봐. 지금 가면 뵐 수 있을 거야. 나랑 이야기는 다음에 자세히 하자.”
“예. 그럼 이따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원장님.”
* * *
“원장님. 출근 잘하셨습니까.”
“어, 민 대리 왔어?”
“예. 수술 중이시길래 이 원장님 먼저 만나고 왔습니다.”
그는 수술하느라 벗고 있던 의사 가운을 주섬주섬 걸치며 이야기를 했다.
“안국환 원장님 말이야.”
“예. 오늘 휴진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는 나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WG 메디컬 대표한테 전화가 왔었나 봐.”
어떤 통화 내용이었는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WG 메디컬 자신들과 거래를 이어 가야 한다, 광주 메디컬과 일하면 안 된다는 식의 통화 내용이었을 게 뻔하니까.
“자기네 회사랑 오래 일했으니까, 옮기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고 하더라고. 또 안 원장님이 김 대표랑 관계가 오래됐거든.”
“곤란하셨겠네요. 저한테 옮겨오시기가.”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괜찮습니다. 그럼 원장님과 이 원장님 그리고 김 원장님도 거래처 바꾸시기 곤란하신 거 아닙니까? 괜히 저 때문에…….”
그는 내게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니야. 우리는 민 대리를 따라가고, 안 원장님이랑 일부 원장님들은 WG 메디컬로 그대로 받으실 것 같아.”
내가 담당하고 있던 8개의 병원 중 겨우 단 한 군데인 모던 정형외과만이 나를 따라나서 주었다.
절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세 군데 정도는 나 하나만을 믿고 따라와 줄줄 알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만 본다면 모던 정형외과에서 3명의 원장님만 나를 따라 나와주어도 충분했다.
모던 정형외과의 매출이 워낙 높은 편이기에, 박 원장과 이 원장, 김 원장만의 매출만 보아도 작은 병원 한 개의 매출과 거의 비슷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단 한 개의 병원을 담당하더라도 그곳이 바로 광주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인 모던 정형외과이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믿고 따라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원장님, 믿고 맡겨 주신 만큼 실망하게 해드리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 * *
모던 정형외과라는 큰 산을 하나 넘은 뒤.
나는 지체할 틈 없이 서둘러 완도 정형외과로 넘어갔다. 모던 정형외과의 영업 성공에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환자가 항상 많은 완도 정형외과의 원장님을 보기 위해서는 진료 시간은 피해야 했다.
점심시간이 곧 끝나가고 있었기에, 나는 그 짧은 틈에 유재필 원장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도착했다.
병원에 들어서자 진료 시간이 시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로비에는 환자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다.
똑똑.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민지훈 대리님 맞으시죠?”
그는 나를 한 번 보았지만, 이름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야 만나는 원장님이 하루에 몇 없지만, 원장님 같은 경우에는 나를 비롯해 만나는 메디컬 직원도 많을 것이고, 환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이다.
딱딱하고 일밖에 모르는 것 같은 성격인데, 은근히 주변을 잘 살펴보는 면까지 있는 유 원장.
“제 이름 석 자를 다 기억하시네요. 감동입니다, 원장님. 하하.”
그는 내 너스레에도 큰 반응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장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럼요.”
“그럼 후식으로 커피 드시라고 사 왔습니다. 여기요.”
나는 그에게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빈손으로 와도 되는데, 고마워요.”
“넵. 그리고 벌써 두 번째 만남인데, 말씀 편하게 하세요, 원장님.”
그는 내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들며 입을 열었다.
“네. 조금 더 편해지면 그렇게 하죠. 여기 앉으세요.”
“예.”
나는 그가 가리키는 의자에 착석했다.
“그런데 원장님은 언제부터 완도에 계셨던 겁니까?”
“…몇 년 됐죠, 아마? 근데 그건 왜요?”
“알아보니까, 완도 정형외과에 예전에는 수술을 하시는 원장님이 안 계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유 원장님이 오시면서 수술도 하시고, 진료 보시는 것도 확실히 다르다고 하셔서요.”
“그런가요? 환자를 치료하는 게 의사의 숙명인데요, 뭐. 지방에서 수술 없이 진료만 하는 거 전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대답했다.
“그래서 이 실력이시면 광주에서도 충분히 수술 케이스 많이 집도하시면서 시골보다는 도시가 편하실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멀리 내려오셨나 궁금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환자들 보는데 도시고 시골이고 의미가 있나. 그냥 아픈 사람들 치료하는 게, 그게 의사가 하는 일이지.”
“대단하십니다.”
“대단은 뭐. 그리고 민 대리님.”
“네, 원장님.”
그는 내가 어제 전달했던 카탈로그 파일을 꺼내 내게 보이며 말했다.
“어제 줬던 파일 봤는데. 내일 오후에 proximal humerus 수술을 할 예정인데, 기구 이 제조사 거로 넣어줄 수 있나요?”
그는 손가락으로 카탈로그 한 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요. 내일 오전까지 넣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품보다는 뒷장에 있는 제품이 수술 과정이 더 간단해서 많이들 선호하시는데, 이 제품으로 넣어드려도 괜찮으실까요?”
같은 부위의 같은 수술이어도 제조사별로 기구가 다르고, 수술 도구가 굉장히 다르다. 수술 기구를 다루는 방법과 수술하는 과정. 그리고 수술 후의 치료 방법까지 모두 다르다.
보통 의사들이 선호하는 수술 기구가 대부분이 비슷한 편이다.
선호하는 수술 기구라 함은 당연히 수술이 간단하고 편리한 것.
어느 것이 환자에게 조금 더 나은지를 확인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의사가 편리한 것을 찾는 편이다. 그런데 유 원장이 고른 수술 기구는 다른 의사들이 평소 선호하는 제조사의 수술 기구가 아니었다.
유 원장이 요청한 기구는 수술 과정이 복잡하고, 힘든 기구였다. 하지만 이 기구를 사용하는 이유는 환자에게 더 적절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부위의 수술을 한다고 해도 환자마다 조금씩은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 환자의 상태에 따라 기구를 고른 것이지.
“음. 민 대리가 보여주는 뒷장의 제품도 사용해 봤는데, 그건 내일 환자의 상태로 하기에는 조금 부적합한 것 같은데.”
그는 손으로 안경을 한번 추켜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이 제품이 환자 상태에는 더 잘 맞아요. 그리고 수술이 의사 편하려고 하나, 환자의 상태 보고 가장 잘 맞는 기구로 수술하는 거죠.”
나는 그의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뒤로도 내가 다른 제조사의 제품들 카탈로그를 보일 때마다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단순히 카탈로그만을 보고는 장단점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유는 카탈로그는 말 그대로 자신들의 제품을 소개하는 파일인데, 그곳에 장점이 수두룩하지, 단점이 적혀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단점까지 파악했다는 것은 그 기구로 수술을 해봤거나, 혹은 제품에 대해 빠삭하게 알기 위해 공부를 했다는 뜻.
대체 이 모든 제품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지? 라는 생각에 유 원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일을 하며 유 원장과 같은 의사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신기하고 놀라운 것을 떠나, 대단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원장님은 이걸 대체 다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나는 눈과 입을 모두 열어둔 채로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의사 생활 오래 하다 보면 그렇지 뭐.”
“아니요. 저도 많은 의사 선생님들을 뵀지만, 원장님처럼 이렇게 모든 카탈로그의 제품을 아시는 분은 처음 뵀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는 계속되는 내 칭찬에 머쓱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였다.
“그럼 기구는 내일 오전까지 넣어줄 수 있다는 거지?”
나와 한참 대화를 나눈 유 원장은 자연스레 말을 놓기 시작했다.
“네. 그럼요.”
“기구 이상 없이 들어 오는지, 제품은 괜찮은지 사용해 봐야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대답했다.
“예. 내일 사용해 보시고, 괜찮다 싶으면 앞으로도 저희 광주 메디컬로 부탁드립니다. 하하.”
“그럴게. 오늘 커피 잘 마셨어.”
“넵. 그럼 오후 진료도 고생하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원장님.”
나는 진료실 문을 닫고 병원을 빠져나오면서 작은 목소리로 환호를 질렀다.
모던 정형외과는 기존의 담당 병원이었기에, 물론 기쁜 마음이 있었지만, 완도 정형외과는 내가 광주 메디컬로 이직 후 처음으로 따낸 병원이었기에 기쁨이 조금 남달랐다.
물론 매출은 모던 정형외과의 반 토막도 안 되겠지만.
원하는 대로 스타트가 잘 끊긴 것 같다는 생각에 뿌듯함이 극에 달했다.
나는 양손으로 주먹을 쥐고 허공에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
‘유재필 원장은 어디에 있던 사람일까?’
광주로 돌아오는 차 안.
사무실로 복귀를 하기 위해 돌아가고 있는 마음은 굉장히 들떠 있었다.
장 사장과 손 차장은 영업이 순탄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나만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살짝 위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계획을 이야기했고,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보고할 생각에 벌써 어깨가 올라갔다.
지이잉.
차 안에 울려 퍼지는 진동 소리.
한 번 울리고 꺼지는 것을 보니, 전화가 아닌 문자였다.
나는 신호가 걸리자마자 휴대전화를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문자는 모던 정형외과 박승호 원장의 문자였다.
[민 대리. 유재필 원장 누군지 알았어. 전화 좀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