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 영업하는 데 지역은 상관없지 】
손지혁 차장의 얼굴만 보아도 느낄 수 있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다는 것.
그를 바라보며 장홍석 사장이 물었다.
“어디 병원이랑 통화하는 건데?”
“북구 쪽에 있는 담당 병원인데요. 하…….”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장 사장은 그를 보채지 않고, 차분히 그가 진정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에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WG 메디컬에서 손을 쓴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장 사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무슨 말이야?”
“병원에 견적서를 새로 가져다줬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금액이 인하됐는데, 저희 쪽에서는 금액 조정이 없는지 물어보더라고요.”
그의 말에 장 사장도 그제야 한숨을 내보였다.
WG 메디컬에서 장 사장과 손 차장에게 거래처를 흔쾌히 내어 주더니 이런 식으로 결국 뒤통수를 치려는 모양.
순순히 원하는 거래처를 가져가도 된다는 말을 내뱉은 지가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바로 단가를 하향 조정해서 견적서를 넣은 것.
이런 제스처야 말로 뒤통수치는 것을 넘어 싸우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신생 회사인 우리 광주 메디컬.
이제 막 시작한 회사에서는 거래처 확보를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게 역시 자금이다.
매출을 올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병원에 납품하는 금액의 단가가 크면 클수록 매출은 오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작도 하기 전에 WG 메디컬에서 단가를 낮춰버리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병원에 동일한 금액, 혹은 더 낮은 금액으로 들어가야 하는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렇기에 WG 메디컬에서는 자신들이 거래처를 다시 빼앗아 가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우리의 단가를 이런 식으로 낮추게 하기 위한 것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의도로 한 것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 회사를 초장부터 엿 먹이려고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손 차장은 그럼 병원 얼른 들어가서 견적서 단가 파악하고 와.”
장 사장은 눈에 불을 켜고 손 차장에게 말했다. 그러자 손 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럼 저희 단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금액도 금액인데, 지금은 거래처 확보가 중요하니까. 어떻게든 WG 메디컬보다 1원이라도 싸게 넣어야지.”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WG 메디컬의 김 대표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 김 대표님 너무하시네요.”
그러자 장 사장은 입을 다문 채 코로 숨을 내뱉은 뒤에야 내게 대답했다.
“우리가 세 명이나 같이 나온다고 했을 때, 순순히 거래처까지 쥐여주는 것 보고 어느 정도 예상은 했어. 괜찮아. 우리가 김 대표 의도대로만 안 흘러가면 되는 거니까.”
그의 말에 손 차장과 나는 의지를 굳히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손 차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이야기했다.
“그럼 저는 오늘 담당 병원 서둘러서 다 돌아보고 오겠습니다. 짧게 만나더라도 오늘 안에 다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고, 특이 사항 있으면 바로 전화 줘.”
“다녀오세요, 차장님.”
나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사무실에 남은 나와 장 사장.
회의 테이블에서 흩어져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로 돌아간 장 사장이 분주하게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민 대리.”
그의 부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네, 사장님.”
“나도 오늘 담당 병원들 다 돌고 와야 할 것 같거든. 민 대리는 사무실에서 계획 세우고, 다녀오면 보고 해 줘.”
“예. 저도 오늘 병원 좀 돌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는 나에게 사무실에 남으라는 지시를 했지만, 이렇게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보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WG 메디컬에서 다른 직원들이 아닌, 굳이 나를 데려온 이유는 내 영업력이기 때문인 것을 알기에.
나는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영업을 해야 했다.
그는 내 결심에 찬 얼굴을 바라보고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 다른 질문이었다.
“괜찮겠어?”
“예?”
나는 그의 질문에 무슨 의도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되물었다.
“아마 민 대리 담당 병원에 가면 쉽지 않을 거야. WG 메디컬에서 우리에게 주었던 병원들에도 손을 써놨는데, 민 대리 담당 병원에는 이미 뭔가를 해도 했을 거야.”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었다.
부딪쳐 보아야 했다.
다시 신입 시절로 돌아간 셈 치자, 라는 생각으로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영업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짐을 모두 챙겨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내 어깨를 두드리며 답했다.
“열심히 해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데요.”
그는 내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녀와서 보고해 줘. 나는 먼저 병원 나가볼게.”
“예. 다녀오십시오.”
장 사장도 영업을 위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모두가 나간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리고 서둘러 거래처 목록을 정리했다.
과연 나, 민지훈 하나만을 믿고 따라올 수 있는 거래처가 있을까?
WG 메디컬에서 바뀐 담당자가 내 기존 담당 병원에 올 것이다.
손 차장의 거래처처럼 단가를 인하할지, 어떤 수를 쓰든지 간에 내가 다시 병원을 빼앗아 가지 못하게 할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에서 병원을 다시 빼앗아 와야 한다.
내 거래처 중 어느 병원부터 돌아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큰 병원은 매출 역시 타 병원에 비해 높다. 그렇기에 그 병원들은 WG 메디컬에서 제일 먼저 손을 썼을 터.
지금은 매출을 떠나 병원을 확보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기에, 나는 내가 담당하고 있던 병원 여덟 군데 중, 작은 병원들부터 돌아보기로 했다.
WG 메디컬에는 현재 남은 인원도 몇 없었고, 내 모든 거래처를 돌기에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의지를 다진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사무실 문을 열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고 병원으로 향했다.
* * *
“미안하네, 민 대리.”
여덟 군데의 담당 병원 중 벌써 똑같은 이야기를 3번이나 반복해 듣는 중이다.
바로 ‘미안하다’는 말.
WG 메디컬에서 담당을 하고 있기에, 이렇게 하루아침에 거래처를 바꿀 수 없다는 말.
뭐가 다들 그렇게 어쩔 수 없는 것인지.
WG 메디컬이라는 배경을 안고 있었기에 ‘민지훈’ 자체가 아닌,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로 영업에 성공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WG 메디컬이 아닌, 나 자체만을 믿고 물건을 납품받던 병원이 얼마나 될까, 라는 걱정을 안 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접 몸소 느끼게 되니 씁쓸한 것 또한 사실이다.
“괜찮습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병원 원장에게 대답했다.
그는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미안해하고 있었다.
“WG 메디컬에서 오래 물건을 받고 있어서 미안해. 다음에 내가 거래처 새로 알아보게 되면 연락할게.”
“예.”
나는 그에게 대답을 한 뒤 원장실에서 나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민 대리.”
나를 붙잡는 병원 원장.
나는 그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나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병원 원장은 무슨 할 말이 있는지 입을 움찔거리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WG 메디컬에서는 이제 리베이트도 해준다고 하는데, 민 대리도 광주 메디컬에서 뒷돈 얼마나 챙겨줄 수 있는지 물어볼까?]
그가 고민하며 내게 물을까 말까 하던 질문.
바로 리베이트, 뒷돈이었다.
한창 인터넷 기사와 TV에서 떠들어 대던 리베이트.
잠잠해지기 시작하자마자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올랐다.
WG 메디컬 김 대표 역시 이 병원을 잡기 위해 리베이트를 해준다고 한 모양.
김 대표가 겉과 속이 다르다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전날 나와 퇴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다음에 술 한잔하자는 이야기를 내뱉으며 좋게 마무리를 하고 나서, 바로 이렇게 뒤에서는 리베이트로 원장을 매수해 놨을 줄이야.
결국 이번에도 김 대표는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가져갔다.
항상 하던 식이지.
지금 당장은 그 돈으로 인해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영업은 돈이 아닌,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먼저 마음을 얻느냐, 얼마만큼의 마음을 선점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돈이면 해결이든 사람의 마음을 따내는 일이든,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마인드가 틀렸다는 것을 내가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꼭 증명해 보이고 싶어졌다.
돈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말이다.
“네?”
“아, 아니야.”
평소라면 싱겁게 끝난 질문의 답에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물었겠지만, 이미 그가 어떤 것을 물어볼 것인지 알아버린 나는 그에게 되묻지 않았다.
병원 원장 역시 나에게 리베이트에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럼 저는 들어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물건 저한테 발주 주실 일 있으시면, 연락 주십시오.”
나는 원장에게 명함을 건넨 후에 병원을 빠져나왔다.
* * *
기존에 담당하던 8개의 병원을 하루 안에 돌아보는 것은 시간적으로 부족했다.
벌써 5개의 병원을 다녀왔지만, 결과는 모두 같았다.
거절을 할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고 간 것이지만, 마음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는 좌절에 빠지지 않았다.
또 다른 플랜을 세워나가면 되기에.
나 스스로에게도 증명해보고 싶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 * *
어김없이 돌아온 출근 시간.
사무실에 들어오니 나를 제외한 장 사장과 손 차장은 순조롭게만 보였다.
그들은 WG 메디컬에서 단가를 가지고 빼앗아 가려고 했던 거래처를 되찾아 왔다.
물론 단가 하향 조정을 통해 리스크를 떠안기는 했지만, 그래도 거래처를 확보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었다.
“민 대리는 어제 병원들 다녀왔어?”
장 사장은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질문을 하는 장 사장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먼저 나서서 거래처 영업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을 통해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거래처 전부를 돌지는 못했지만, 이미 WG 메디컬에서 다녀간 것 같았습니다.”
손 차장은 내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했다.
“그래. 이미 우리한테 줬던 병원들도 손써둔 판에, 민 대리 거래처를 그냥 둘리가 없지. 고생했어.”
“이미 WG 메디컬에서 관리 시작한 병원은 굳이 건들지 마. 괜히 민 대리만 시간 낭비되는 거야. 알잖아, 김 대표 어떤 사람인지.”
손 차장은 장 사장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장 사장은 책상을 손으로 살짝 내려치며 주목을 시키고 입을 열었다.
“다들 오늘 계획 이야기해 주고, 얼른 또 일하러 출발해 보자.”
“…하겠습니다. 그리고 담당 병원들 오늘 확정 잡고, 수술 스케줄들 파악하러 다녀오겠습니다.”
손 차장은 자신의 할 일을 브리핑했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은 다음 직원인 나에게로 옮겨졌다.
나는 장 사장과 손 차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저는 오늘 전라남도 완도 좀 다녀오겠습니다.”
뜬금없는 지역에 그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완도?”
손 차장은 눈썹을 들썩이며 내게 되물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확신에 찬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