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끝=새로운 시작 】
“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요.”
나는 손지혁 차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 이사님은 충원 인원 뽑는 시간, 인수인계하는 시간 고려해서 오늘 말씀하신 건데. 대표님께서는 우리 셋이 한 번에 나간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화가 나신 거지.”
김 대표도 장 이사의 퇴사는 항상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한 회사에 오래 다니다 보면 경력이 쌓이고 자신의 거래처가 많이 생기면서 퇴사를 하고 자신의 회사를 차리는 게 일반적인 루트일 테니까.
그런 점에서 장 이사도 퇴사 후 회사를 차리는 것이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김 대표도 장 이사와의 이별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터.
하지만 손 차장과 내가 함께 나갈 거라는 예상은 전혀 못 했던 모양이다.
장 이사는 그래도 남은 회사를 생각해 미리 우리 세 명의 충원 인원. 그리고 그 새로 올 직원들의 인수인계 기간까지 생각해 퇴사를 이야기했지만 김 대표의 입장에서 보면 화가 났을 수도 있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은…….”
“어. 아까 장 이사님이 대표님이랑 이야기하고 나와서 나랑 짧게 얘기했었거든. 근데 대표님이 그럼 뭐 하러 한 달이나 나오냐. 당장 정리하고 나가라, 라는 식으로 말했었나 봐.”
“홧김에 그러신 거겠죠?”
손 차장은 담배 연기를 크게 내뿜으며 말을 이어갔다.
“글쎄다. 그러다가 벌써 2차전이야. 나랑 짧게 이야기하고, 곧바로 다시 대표실 들어가셨거든.”
나 역시 그의 이야기를 듣고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셋이 한 번에 퇴사를 하는 게 쉬울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예상한 것보다 어렵네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장 이사님이 지금 거래처 가지고 나갈 거 조율하고 계실 거야. 어쨌든 거래처만 확보해서 나가면 되는 거니까. 어떻게 이야기가 끝나는지 기다려 봐야지.”
“네. 그럼 제 거래처 중에서는 어떤 병원들로 조율하시는 겁니까?”
가지고 나갈 병원을 조율한다는 것.
현재 장 이사와 손 차장, 그리고 내가 맡고 있는 각자의 담당 병원 중 우리가 새로 차릴 회사에 들고 나가게 해줄 수 있는 거래처를 말한다.
단순히 지금 내 담당 병원이라고 해서 내가 옮기는 회사에 따라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병원은 WG 메디컬의 민지훈과 거래를 하고 있던 것이지, 내가 옮기는 회사의 민지훈과 거래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
즉, 그저 나 하나만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 병원들을 장 이사가 김 대표와 조율 후 가지고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정해진다.
김 대표 입장에서는 나가는 직원들 뭐가 예쁘다고 거래처까지 쥐여주냐, 라고 생각해 단 한 개의 병원도 못 들고 나가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메디컬 업계 쪽은 조금 다르다.
‘그래, 나가서 회사 차린다고 하는데 그동안의 정을 봐서 몇 개 정도는 가지고 나가서 한번 해봐라.’라는 식으로 거래처를 들고 나가게 해주는 곳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가지고 나가도 될 거래처를 조율하는 것.
“민 대리 담당 병원 중에서는 개수가 많지 않아서 아마 다 얘기하시기는 할 거야. 대표님이 알아서 자르시겠지만.”
“그럼 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그는 내 질문에 눈썹을 들썩이며 말하라는 듯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이 병원 가지고 나가지 못하게 하는데, 병원에서는 제가 옮기는 거래처와… 그러니까 저와 일하고 싶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는 내 질문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해야지.”
“네?”
“민 대리랑 일하는 거지. 대표가 어쩔 수 있겠어? WG 메디컬에서 보면 그냥 다른 거래처에 병원 빼앗기는 셈인 거지.”
“아……. 그렇겠네요.”
“근데 그럴 확률이 적은 거지.”
손 차장은 어깨를 들었다 내려놓으며 이야기했다.
“왜요?”
“WG 메디컬에서 민 대리 담당 병원을 못 들고 나가게 했다고 해봐. 그럼 민 대리는 옮긴 회사에서 그 병원을 다시 가져오려고 영업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겠죠?”
“그럼 WG 메디컬에서는 그걸 가만히 두고 보겠어? 자기들도 이제 남이 된 민 대리가 병원을 못 빼앗아가게 거래처 관리를 하겠지.”
“단가를 낮추면서까지 그렇게 관리를 하는 건가요?”
“글쎄다. 어떤 방법으로든 거래처를 못 빼앗아가게 하겠지. 지금 우리가 기존에 병원 관리를 하듯이 말이야.”
“그렇겠네요.”
손 차장은 마지막 담배 한 모금을 길게 빨아들이고는 대답했다.
“대신 그렇게 해서 민 대리가 병원을 빼앗아 간다? 그럼 WG 메디컬에서는 할 말 없는 거지. 그냥 자기들이 다른 메디컬 회사에 거래처를 빼앗긴 것일 테니까. 빼앗아 오는 것 또한 그저 민 대리의 능력인 거야.”
그는 담배를 밟아 꺼트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오늘 김 대표가 병원 꼴랑 한두 개만 쥐여주고 내보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우리가 다시 영업하면 되니까. 뭐 그게 영업 사원의 일이지.”
“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입에 남은 담배 연기를 끝까지 내뱉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내려가자. 이사님 이야기 끝나셨겠다.”
“넵.”
사무실에 내려오면 대표실에서 장 이사와 김 대표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새어 나올 줄 알았다.
그만큼 언성이 높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하지만 대표실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
오늘 당장 마지막 출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 앉아 대표실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뿐.
그리고 머지않아 대표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대표실 문에서는 장 이사가 홀로 나왔고, 나는 바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장 이사의 표정은 화가 나지도, 기분이 좋은 표정도 아니었다.
찝찝한 표정의 그.
대체 무슨 이야기가 오갔던 거지?
그는 아무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대로 이사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장 이사실에서 다시금 나와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때 울리는 전화기.
장 이사의 문자였다.
[건너편 카페로 와.]
문자를 받은 후 나는 주변을 살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시에 손 차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 장 이사의 문자를 받은 듯, 밖으로 나가기 위해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었다.
손 차장은 눈이 마주친 나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나가라는 듯한 표정을 보였고, 나는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 * *
카페에 도착하니 안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장 이사.
나는 그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사님!”
“어. 민 대리 왔어? 손 차장은?”
그는 혼자 온 나를 보며 손 차장을 찾았다.
“곧 오실 겁니다. 제가 먼저 나온 거라서요.”
“응. 앉아.”
“예.”
“이야기는 손 차장 오면 하자고.”
장 이사의 표정을 읽어낼 수가 없었다.
곧이어 들어오는 손 차장.
“차장님, 여기요.”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서 자리에 앉았다.
“이사님.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리고 그는 바로 장 이사에게 물었다.
“우선 커피들 시켜.”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 이사가 건네는 카드를 받아 커피를 주문해, 가지고 돌아왔다.
“민 대리 왔으니까 이야기 시작할게.”
“넵.”
그는 가지고 온 다이어리를 펼쳐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와 손 차장 역시 가지고 있는 다이어리를 꺼내 펜으로 그의 말을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대표님한테 내 거래처 4개, 손 차장 거래처 3개 그리고 민 대리 거래처 이야기했거든. 근데 우선 내 거랑 손 차장 거는 오케이 하셨어.”
“정말요? 총 일곱 군데를요?”
손 차장은 장 이사의 말에 재차 되물었다.
“어. 전부다.”
“감사하긴 한데, 몇 개는 커트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손 차장은 김 대표가 거래처를 다 쥐여준 것이 이상하다는 듯 쓰읍 소리를 내며 이야기했다.
그러자 장 이사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러니까. 나도 의외였어. 어쨌든 우리한테는 당장 좋은 일이니까.”
나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제 거래처들은요?”
“그래. 민 대리 거래처는 전부 다 두고 가라고 하더라.”
장 이사는 내 말에 조심스럽게 답했고, 손 차장과 나는 그의 말에 눈썹을 들썩였다.
“하나도 없이요?”
“어. 그래도 걱정 마. 우선 나랑 손 차장 거래처 7개면 매출은 충분하니까. 당장은 매출 걱정 없을 거야.”
“그렇긴 하지만, 거래처를 다 두고 가려니까 조금 서운하기는 하네요.”
나는 고개를 떨군 채 답했다.
WG 메디컬을 다니며 내가 영업을 따온 것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영업 성공한 병원들은 모두 WG 메디컬의 담당 병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영업을 했던 거래처들이기에 두고 가려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저 회사 옮긴 후에 병원 인사 가는 거는 괜찮은 겁니까?”
나는 못내 아쉬운 마음에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손 차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답했다.
“그럼. 내가 아까 말했잖아. 원래 민 대리 거래처였으니, 인사차 병원 들리면서 가봐.”
그의 말에 동조하듯 장 이사도 나에게 조언을 던졌다.
“그래. 그동안 민 대리와의 관계를 진정으로 생각했던 원장님들은 민 대리를 따라서 거래처를 옮길 수도 있는 거야. 한번 시도는 해봐.”
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렇게 하면 따라와 주시는 원장님이 계실지 걱정이 되긴 하네요.”
“시도가 먹힐지는 장담 못 하지만, 믿어 봐야지. 그동안 영업했던 것들을.”
내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는 장 이사.
손 차장은 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 아까의 일이 여전히 신경 쓰이는지 재차 장 이사에게 물었다.
“근데 대표님이 어떻게 요청한 거래처 7개를 가지고 나가게 해주신 겁니까? 한두 개나 가지고 나가게 해주실 줄 알았더니 말이에요.”
“그러게. 요구하는 대로 큰 거래처를 다 가지고 나가도 된다기에, 지금 마음이 조금 찜찜하기는 해. 하지만 별수 있나.”
그들의 말을 듣고 나 역시 김 대표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기 위해 노력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김 대표의 입장에서 우리 셋은 아니꼬운 존재일 것이 분명하다.
월요일 아침부터, 하루아침에 아무 소리 소문도 없이 찾아와 세 명이나 동시에 퇴사를 한다는 게.
게다가 셋이 나가서 회사를 차린다는 것이 절대 달가울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네요. 김 대표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손 차장의 말에 장 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커트시킬 거 예상해서 일부러 거래처를 더 많이 이야기했던 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요구해도 될 뻔했지. 하하.”
“그런데 왜 제 거래처는 안 된다고 하신 걸까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한 가지.
매출이 큰 병원인 장 이사와 손 차장의 거래처. 그곳들은 모두 오케이를 했지만, 매출이 상대적으로 적은 내 병원들은 모두 커트를 했다라…….
“김 대표의 속을 누가 알겠냐.”
손 차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내 말에 답했다.
장 이사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
“네? 어떤…….”
그의 말에 손 차장은 허리를 숙여 장 이사 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우리 오늘 WG 메디컬 마지막 출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