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당찬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내려가서요? 아직 뭐 없는데, 왜요?”
내 대답에 박 주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러내며 말했다.
“그럼 저랑 파전에 막걸리 먹어요!”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 그녀의 질문에 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웃어요! 대리님이 저번에 저 밥 사준다고 했었잖아요.”
그녀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괜히 희망 고문을 하는 게 될까 싶어, 미루고 있었던 그녀와의 식사 약속.
하지만 곧 퇴사를 하게 되면 그녀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에, 오늘은 꼭 그 약속을 지켜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려가서 파전에 막걸리 먹어요. 오늘 제가 살게요.”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왔는지, 아이처럼 신나 하는 그녀.
산 정상에 올라온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얼른 내려가요.”
“네? 벌써요?”
그녀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말했다.
“네, 내려가서 빨리 밥 먹어요.”
그렇게 우리는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산은 오르는 것보다 내려가는 것이 더 위험하기 때문에, 그녀와 나는 서로를 의지하고 잡아주며 산에서 내려갔다.
몇 시간을 내내 붙어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생각보다 금세 그녀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고된 등산을 하며 그녀는 단 한 순간도 힘든 내색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매번 챙겨주는 그녀.
‘박 주임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네.’
* * *
그녀가 평소 등산을 하고 내려와 자주 가는 곳이라는 식당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모! 우리 파전이랑 막걸리랑 사이다 주세요.”
박 주임은 늘 먹었던 것처럼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자연스레 주문했다.
그녀와 단둘이 먹는 첫 식사 자리.
몇 시간을 내내 몸을 부딪치며 등산을 했지만, 식당에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살짝 어색한 기운이 맴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전과 도토리묵 무침 그리고 막걸리까지 상위에 차려졌다.
그녀는 음식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짓고 내게 이야기했다.
“저 맨날 혼자 와서 막걸리는 못 먹었었거든요.”
박 주임은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럼 파전만 드신 거예요?”
그녀는 내 질문에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혼술은 어려워서……. 그래도 오늘 대리님이랑 와서 같이 먹으니까 됐어요. 하핫.”
나는 막걸리를 흔들어 양은으로 된 주전자에 따라 부었다. 그리고 사이다를 연이어 부은 뒤 휘휘 저어 그녀의 잔에 따라냈다.
그녀는 미소를 지은 채 내 잔을 받은 후, 나에게 따라주었다.
“자, 그럼 주임님이 그렇게 먹고 싶어 하시던 막걸리 한잔 할까요?”
“넹!”
내가 들고 있는 양은 막걸릿잔에 그녀의 잔을 부딪치며 건배를 했다.
등산 내내 먹은 거라고는 오이와 초코바, 그리고 커피.
막걸리를 꿀떡꿀떡 삼켜내니 빈속에 내려가는 느낌이 알싸하게 퍼졌다.
앞에 앉아 양손으로 막걸릿잔을 쥐고 마시고 있는 그녀.
“어때요? 맛있어요?”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입에 막걸리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박 주임은 큰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뜬금없는 그녀의 말에 나는 흠칫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
“네?”
“좋아한다고요. 막걸리.”
그녀는 당황한 내 얼굴을 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아… 막걸리요?”
나는 그녀의 빈 잔에 서둘러 막걸리를 한 잔 더 부어냈다.
“늘 등산하고 내려오면 이렇게 먹고 싶었는데, 매번 음료수에만 먹었더니 아쉬웠거든요.”
“그렇죠. 파전에는 역시 막걸리죠.”
나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답했다.
“그리고 뭐……. 대리님이랑 같이 먹으니까 더 좋고요…….”
그녀는 내 눈이 아닌 앞에 놓여있는 음식들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내뱉은 후, 황급히 내 시선을 피해 막걸리를 마셔댔다.
그렇게 막걸리와 안주들로 배를 채우며 박 주임과 수다를 떨다 보니, 언제 어색했냐는 듯 그녀와 편해졌다. 그리고 박 주임은 내게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대리님.”
“네?”
그녀는 침을 한번 꿀꺽 삼켜낸 뒤 말을 이어갔다.
“제가 예전에 대리님한테 고백한 거요. 제가 싫어서 대답 안 해주는 거예요? 아니면 정말 여자 친구 있으신 거예요?”
예전에 나에게 고백을 했던 박 주임.
나는 그녀에게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전했지만, 그녀는 내가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절한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주임님이 싫은 게 아니라, 정말 지금 제가 연애할 생각이 없…….”
“사내 연애라서 그런 거구나!”
술기운에 볼이 발그레해진 그녀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손을 허공에 내밀며 답했다.
“그런 게 아니라…….”
“치. 사내 연애라서 불편한 거 맞았네. 나중에 제가 회사 그만두게 되면 그때는 저 여자로도 봐줘요, 알겠죠?”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박 주임은 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 같았다. 구김도 큰 인생의 굴곡도 없었던 것 같아 보이는 그녀.
항상 자신감이 넘치고 자존감이 강한 스타일.
그런 그녀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가 그다지 불편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계속해서 나에게 고백을 하는 그녀에게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저는 늘 한결같을 거니까. 제가 변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마시고요. 자, 우리 짠해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내게 잔을 들어 보였다.
그런 그녀에게 나 역시 미소를 지으며 잔을 부딪쳤다.
* * *
박 주임과 헤어지고 집에 들어왔다가 마트에 가기 위해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집 앞에 있는 대형 마트.
카트를 끌고 매장 입구에 들어서는데, 저 멀리에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
눈에 힘을 준 채 바라보니 그는 홍찬성 대리였다.
이미 퇴사를 한 직원이고, 지금 마주쳐 인사를 한다고 해도 그 뒤에 할 말이 없기에 나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눈을 피하려고 하는 그때.
순간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가벼운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보고 반갑다는 듯이 다가왔다.
“민 대리!”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어. 민 대리도 잘 지냈어?”
그는 내 팔을 토닥이며 물었다.
“네. 저야 뭐 항상 똑같죠.”
“매일 보다가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니까 엄청 반갑네.”
홍 대리는 병원 간납 업체를 통해 뒷돈을 챙기다 걸렸던 직원이다.
퇴사를 당한 입장.
즉, 불미스러운 일로 회사에서 잘린 사람이라 나를 불편해할 줄 알았지만, 그는 오히려 당당히 웃으며 나를 반겼다.
“그러게요. 대리님은 뭐 하고 지내세요?”
그는 내 질문에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에이. 회사도 그만뒀는데 대리님은 무슨. 이제 그냥 동네 형이지.”
“그래도요. 하하.”
“나는 요즘 그냥 쉬고 있지. 주변에 메디컬 회사들에서 자기네로 좀 와서 일해 달라고 야단인데. 지금은 좀 쉬고 싶어서.”
눈동자를 굴리며 말하는 홍 대리.
거짓말이었다.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지 않아도 자기를 방어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좁디좁은 메디컬 바닥에서 회사 뒷돈을 챙겨 먹다가 나간 그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을 터.
그를 스카우트할 메디컬 회사는 없을 것이다.
내가 회사의 대표였어도 회사의 돈을 몰래 챙겨갔었다는 직원을 어떻게 뽑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해도 그를 비웃거나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럼요. 대리님 경력도 있으시니까. 근데 조금 쉬어가시는 것도 나쁘지 않죠.”
내 말이 끝나자 홍 대리는 내게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에 최 과장님 잡혀갔다며?”
“아……. 네, 소식 들으셨어요?”
“어. 얼마 전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대체 누가 신고한 거래. 병원 사람들이 그랬겠지? 진짜 세상 무섭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 CCTV를 신고한 사람이 홍 대리인 것을.
손 차장에게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 하나 깜짝 않고 발뺌을 하는 홍 대리.
다른 의미로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뭐 불법적인 일이었으니까, 안타깝지만 최 과장님이 벌을 받는 건 당연하죠.”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했다.
“근데 김 대표님도 똑같은 사람 아니야?”
“네? 그게 무슨 말씀…….”
“내가 이번에 간납 업체 일 때문에 이렇게 됐지만, 김 대표 그 사람도 이 바닥에서 만만치 않게 더러운 놈이야.”
어떤 일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말에 동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지만, 결론적으로는 자신을 자른 회사이기에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생각은 들지만, 무턱대고 김 대표를 비방하는 말을 하는 홍 대리.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그 어떠한 대답도,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최 과장 사건도 그래. 최 과장이 혼자 그런 일을 했겠냐고. 다 김 대표가 지시한 거겠지. 그것뿐이겠어? 메디컬 바닥에 더러운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홍 대리를 바라보는 나는 단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것 같다는 생각.
속으로는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자신의 말에 동조하지 않자 머쓱했는지 금방 자리를 떠났다.
* * *
월요일 아침.
오전에 병원 원장의 호출로 인해 해당 병원으로 직출을 했다.
업무를 한 시간가량 본 뒤에야 나는 사무실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차가운 사무실의 공기.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이 들자마자 나를 다급히 부르는 사람.
바로 손지혁 차장이었다.
“지훈아. 잠깐 나 좀 보자.”
그는 얼마나 다급한 일인지 직책이 아닌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를 따라 옥상으로 걸어갔다.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담배부터 꺼내 무는 손 차장.
“차장님. 대체 무슨 일인 겁니까?”
상황을 모르는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지훈아, 우리 뭣 됐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인 뒤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네? 그게 무슨…….”
“아니다. 어쩌면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담배 한 모금을 크게 마셨다. 그리고 뽀얀 연기를 길게 내뿜은 뒤에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장 이사님. 지금 대표실에서 김 대표님이랑 이야기 중이셔.”
무슨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는지 듣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만을 보아도 알 수 있었다.
퇴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저희 퇴사 이야기요? 아직 저한테 날짜도 말씀 안 해주셨었잖아요.”
장 이사와 손 차장, 그들과 한배를 타기로 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날짜에 대해 듣지 못한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 퇴사하는 거 이야기 중이셔.”
“언제라고 말씀도 안 주시고요?”
“그러니까. 나도 이렇게 갑자기 장 이사님이 말씀하실 줄을 몰랐었어.”
“그럼 갑자기 왜…….”
손 차장은 물고 있던 담배를 꺼낸 뒤 나에게 이야기를 했다.
“이사님 생각은 퇴사 이야기를 한 뒤에 한 달 정도 인수인계하고 나갈 생각이셨나 봐.”
“그렇죠. 인수인계는 한 달 정도는 예상했죠.”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쉰 뒤, 나지막하게 말을 읊조렸다.
“잘하면 우리 오늘이 마지막 출근날이 되게 생겼다.”
그의 의미심장한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