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김 대표의 실체를 알아버린 오늘.
WG 메디컬에 남아야 할지, 장 이사와 손 차장을 따라나서야 할지 고민하던 마음이 점점 정리되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자마자 마음이 기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고민 끝에 나는 결심했다.
그들과 같은 배에 올라타기로.
이유는 마음에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선택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될 거라는 것을.
* * *
사무실의 짧은 시곗바늘이 6에 다가왔고, 직원들은 퇴근 준비를 시작했다.
퇴근 준비를 마친 뒤 나는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손지혁 차장의 자리로 다가갔다.
“차장님.”
“어. 민 대리 퇴근하게?”
그는 컴퓨터 작업을 하다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예. 혹시 퇴근 언제 하십니까?”
“왜? 무슨 일 있어?”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는 내가 할 말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가자. 나도 다했어. 앞에서 기다려.”
“넵.”
그는 곧장 컴퓨터에 열린 파일들을 끄기 시작했고, 그를 뒤로 한 채 나는 먼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잠시 뒤 나온 손 차장과 근처 카페로 향했다.
“내가 저녁 약속이 있어서, 조금 있다가 가야 해. 저녁은 다음에 사줄게.”
“괜찮습니다. 제가 갑자기 말씀드린 건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커피를 주문해 받은 후 테이블로 향했다.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나는 그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차장님.”
“응.”
“저 어제 말씀하셨던 거 생각해 봤습니다.”
그는 입에 대고 있던 머그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눈썹을 들썩였다.
나는 그런 그의 눈을 바라보며 이어 이야기했다.
“차장님과 함께 가고 싶습니다.”
고민에 대한 대답을 내놓으면 손 차장은 굉장히 기뻐하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내 답을 듣고도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내게 물었다.
“왜?”
“네?”
그의 예상치 못한 반문에 나는 그에게 되물었다.
“내 제안에 함께해 주겠다는 건 고맙지, 당연히. 하지만 나는 네 앞날에 도움이 되는 선택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어제 그렇게 이야기해서 급하게 내린 결론이라면 더 고민해 봐도 돼.”
자신의 제안을 바로 받았다는 것에 그저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입장에서 생각을 해주는 손 차장에게 다시 한번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저도 많이 생각해 봤고, 이제 저도 제 생각 먼저 할 줄 아는 놈입니다. 하하.”
그는 내 농담 섞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네. 민지훈 다 컸네. 하핫. 그래서 왜 오고 싶은 건데?”
나는 그의 질문에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차장님과 이사님을 따라나서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 커리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 역량을 펼치기에도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고요.”
그는 내 말을 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그래. 나도 WG 메디컬에서 오래 근무했지. 그래서 처음에 장 이사님이 이런 제안을 할 때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고.”
“그러네요. 차장님은 저보다 훨씬 오래 여기 다니셨으니까요.”
“응. 오래 몸담았던 회사였는데, 이번 기회에 대표님에 대해서 다시 보기도 했고. 알잖아, 이 바닥에서 언제까지 밑에 직원으로만 있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거.”
다른 업계보다 메디컬 쪽은 한 회사에서 오래 근무하는 직원이 드문 편이다.
경력이 쌓이는 만큼 자신의 담당 병원, 담당 의사들이 늘어나고, 자신이 그 한곳에 머물기 아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바로 돈 때문이다.
직장인으로 월급을 받는 것보다 자신이 퇴사 후 회사를 차려 영업해 돈을 버는 게 몇 배는 많기에.
물론 그렇게 회사를 차려 망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지만, 그 누가 자신이 망할 거라 예상하고 나가겠는가.
자리를 잡은 뒤 승승장구하고 있는 회사들의 사장을 보면, 한 명도 빠짐없이 메디컬 회사에서 나와 자신의 회사를 차린 것이다.
음식점이나 타 업종에 비해 기존의 경험과 경력이 없다면 애초에 회사를 차리기가 힘든 업계인 곳, 그곳이 바로 메디컬이다.
“그리고 몰랐지. 우리 대표님이 큰 인물이 될 그릇은 아니라는걸.”
손 차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혼잣말을 하듯 읊조렸다.
예전에는 그런 말을 믿지 못했다. 사람에게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는 말. 그저 남을 낮게 얕잡아 보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살아갈수록 그릇의 크기가 크고 작다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특히나 사업적인 면에서 가장 그 말이 와닿았다.
한 치 앞만 보고 행동하는 사람.
당장 눈앞에 놓인 이익 때문에 저 멀리 놓인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
그만큼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을 보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직원들을 챙길 수가 없다.
그리고 이번 최 과장의 대리 수술 사건으로 나 역시도 김 대표에 대해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릇이 작은 사람의 밑에서 있게 된다면 나 역시도 성장할 가능성이 적다는 것.
아무리 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쨌든 현재로서는 펼칠 공간이 이 회사이다.
그릇이 작은 상사 밑에 있다는 것은 내 역량을 펼칠 공간이 그만큼 작다는 뜻이다.
손 차장과 나는 아무 말 없이 커피를 마셨다.
각자의 생각에 잠긴 채.
그리고 그가 숨을 크게 한 번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열심히 해보자. 나가서 망하면 큰일인 거 알지?”
“그럼요. 열심히… 아니. 잘해 보겠습니다.”
“하하. 그래.”
그는 내게 머그잔을 들고 술잔을 부딪치듯 내 머그잔에 가져다 댔다.
나는 손 차장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차장님. 그럼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선 장 이사님은 최대한 일찍 시작하려고 하셔. 몇 달 전부터 혼자 계획을 세우시던 터라 사무실은 이미 계약해 두셨다고 하더라고.”
“아……. 꽤 일찍 준비를 시작하셨나 보네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이사님은 집에 보살펴야 할 처자식이 있잖아. 철저하게 준비하셨겠지.”
“그럼 거래처는 어떻게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거예요?”
손 차장은 내 말에 의자를 당겨 내 쪽으로 바짝 붙은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우선 지금 여기서 거래하고 있는 병원들을 가지고 나갈 거야. 무작정 가지고 가는 건 아니고, 확실한 병원들만 선정해서 이사님이 대표님과 조율을 하는 거지.”
“제 거래처도요?”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손으로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 민 대리 담당 병원을 못 가지고 오더라도, 이사님과 내 거래처가 있으니까.”
“저도 병원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당찬 얼굴로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했다.
“민 대리 직책에 가지고 올 수 있는 거래처는 아마 없을 거야.”
나는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민 대리를 무시하는 건 아니야. 대리라는 직책에 따라올 수 있는 병원이 없는 게 당연해. 나 역시도 내가 생각하는 만큼 병원이 따라오지 않는 곳이 많을 테니까.”
“그래도 지금 믿고 저희랑 일하는 병원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그건 민지훈이랑 일한다기보다, WG 메디컬의 민 대리랑 일하는 거라고 생각할 거야. 그게 소속의 힘인 거고.”
“제가 WG 메디컬 소속이니까 믿고 일했겠네요.”
그는 고개를 얕게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저 민 대리만을 믿고 일을 하는 원장들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게 정말 소수일 거라는 거지. 그건 나한테도, 그리고 장 이사님한테도 적용되는 말이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동자를 굴려 생각에 잠겼다.
내가 과연 WG 메디컬에서 나간다고 하면 오로지 나, 민지훈만을 믿고 업체를 옮겨줄 원장님은 병원은 몇 군데나 될까?
당연히 나를 따라 옮길 거라 생각했지만, 민지훈 내가 아닌 WG 메디컬 대리 민지훈을 믿고 발주를 하고, 물건을 받는 병원이었겠구나, 라고 생각하니 막상 확신이 딱 드는 병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내 거래처를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명의 병원, 모던 정형외과, 여천 정형외과…….
수많은 담당 병원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느 하나도 100퍼센트 장담할 수 없었다.
이렇게 고민한다고 한들 지금 결론이 날 수 없었다.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그러니까 병원 가지고 나오는 거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거나 부담 갖지 않아도 돼. 그래서 우리 셋이 함께 가는 거고.”
걱정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보고 손 차장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나온다고 정해 놓은들 이사님이랑 대표님이랑 퇴사 이야기하면서 거래처 조율할 때, 안 된다고 할 가능성이 클 거거든. 우리도 예상만 해두는 거야.”
“아……. 대표님이 못 가지고 나가게 하실 수도 있겠네요?”
그는 아랫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대표님도 장 이사님이 퇴사하고 회사를 차린다고 해도 놀라시지는 않을 거야. 다들 그 정도 경력과 능력이 쌓이면 그렇게들 하니까.”
쉴새 없이 말한 탓에 그는 목이 말랐는지, 커피를 몇 모금이나 마셔댔다. 그리고 재차 입을 열었다.
“이때 대표님의 그릇 크기가 나오는 거지. 직원들을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말이야. 오래 봐온 세월이 있으니까, 나가서 열심히 한번 해봐라. 라는 의미로 거래처를 쥐여주는 게 대부분이거든.”
하지만 나는 여기서 의문점이 생겼다.
과연 김 대표가 거래처를 나가는 우리에게 쥐여 줄까?
예전 같았으면 항상 직원들을 챙기는 대표, 아량이 넓은 대표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최 과장 일로 인해 그를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래처 이사님이랑 내가 한 군데씩만 가지고 나와도 초반에는 충분할 거야.”
맞는 말이다. 내 거래처 병원 중 큰 병원 한 군데만 보아도 한 달의 매출은 기본으로 억 단위를 넘는다.
물론 여기서 매입가가 빠지기는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 보아도 내 월급의 몇 배는 남는 셈.
그런데 장 이사의 큰 거래처 병원의 매출은 내 거래처에 비해 월등히 높은 매출을 가지고 있다.
“장 이사님 생각은 그래. 돈만 보고 나오시는 분은 아니시거든. 우리가 적은 인원으로 시작하니까, 최대한 각자 급여도 맞춰서 주실 거고. 돈 적인 부분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네. 열정페이여도 초반에는 열심히 다녀야죠. 하하. 저도 돈 때문에 차장님과 이사님 따라나서는 건 아니니까요.”
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손 차장에게 웃으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내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열정페이… 나는 안 돼. 그럴 일 없을 거야. 없어야지!”
“우선 저도 거래처 확실한 곳이 있는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차장님, 약속 있다고 하셨는데 제가 너무 오래 이야기한 거 아닙니까?”
나는 손목시계를 보고 놀라 그에게 물었다.
“아니야. 아직 시간 남았어, 괜찮아.”
나는 그의 말에 입을 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퇴사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기에, 그는 새로운 주제를 던졌다.
“그나저나 최 과장 혼자 덮어써서 어쩌냐, 불쌍한 놈.”
최 과장의 이야기에 나는 어깨를 올렸다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CCTV 확보됐다는 거. 병원 간호사가 제보한 거겠죠?”
손 차장은 내 말에 그렇다는 듯 눈을 한번 천천히 깜빡이며 눈썹을 들썩였다. 그리고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마신 뒤, 몸을 내 얼굴 쪽으로 기울인 채 뜻밖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내 귓속에 내뱉는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