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무슨 일 있으십니까?”
나는 심각한 표정의 김 대표를 바라보며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김 대표는 내 눈을 쳐다보며 이야기했다.
“우리랑 관계는 이어가야 하니까, 3개월간 간납 업체로 들어갔던 돈 어느 정도는 우리 돌려주신다고 하네.”
“정말입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 정말 다행입니다, 대표님.”
“그러게. 병원장이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이라고 하더니. 아무튼, 나 지금 선아 정형외과 좀 다녀올게. 갔다 와서 이야기하자.”
“네. 대표님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래. 이번 일, 민 대리 덕이니까. 어떻게든 내가 톡톡히 보상은 해줄게.”
“아닙니다. 보상 바라고 한 일도 아닌데요.”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대답했다.
“내가 고마워서 그래. 회사 내에서 일어난 일, 내 발등 찍는 줄도 모르고 있었으니. 회사 입장에서 손실 막아준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한 거야, 민 대리. 고맙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허리를 숙였다.
“그래. 우선 나 먼저 나가볼게.”
“넵.”
대표가 나간 뒤 자리로 돌아왔다.
홍 대리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충격에 휩싸인 사무실.
언제 이야기가 퍼졌는지, 위 선임들은 나에게 한 명씩 지나가며 엄지를 치켜들어 주었다.
대가를 바라고 했던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로 인해 진흙 속 미꾸라지를 한 마리 잡았다고 생각하니 이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 편으로는 모두 믿고 있었던 한 직원의 구린 행동에 치가 떨리기도 했다.
지이잉.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휴대전화.
[발신인 : 모던 정형외과 김사랑 원장]
병원에서 오는 전화면 발주 전화나, 물건의 이상으로 오는 호출이기에 나는 급히 제자리에서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민 대리님. 통화 가능해?
“그럼요.”
- 오늘 저녁에 뭐 해?
“오늘 저녁이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 나랑 술 한잔 하자.
“둘이서 술이요?”
내 옆에 서 있던 직원들.
마지막 내 말에 병원이 아닌, 여자와의 통화라고만 생각하고 모두 음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통화를 이어갔다.
- 왜 오늘 약속 있어? 친구끼리 술 한잔 하자는데 뭐 그렇게까지 놀라.
“아… 약속은 없는데…….”
- 그럼 주소 문자로 보내줄게. 이따가 보자.
김사랑 원장과 단둘이 마시는 술자리.
지난번 모던 정형외과에서의 원장님들과 술자리가 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다른 원장님들은 1차 후 집으로 돌아갔고, 나와 그녀 단둘이서 2차를 가서 마셨던 적이 있지만, 이렇게 처음부터 둘이서만 먹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어색하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병원 원장과의 독대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여자 원장과의 독대는 처음이었기에 그동안의 술자리와는 다른 느낌이 들까 걱정스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 * *
퇴근 후, 그녀에게 약속 장소를 받은 뒤 술집으로 향했다.
오후에 김사랑 원장과 통화를 한 후부터는 어떤 주제의 이야기를 해야 할지 그것만 생각하고 왔다.
술집 앞에 멈춰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문을 열었다.
“민 대리님! 여기야.”
저 멀리에 이미 와서 앉아 있는 그녀.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원장님, 일찍 오셨네요?”
“아니. 나도 방금 도착했어.”
모던 정형외과 근처에 있는 작은 동네 술집.
사람도 몇 없고, 테이블 수 자체도 별로 없어서 조용한 분위기의 술집이다.
시간도 퇴근 시간인 6시밖에 되지 않아, 테이블도 우리를 빼고는 한 테이블에만 사람이 앉아 있었다.
“뭐 시키셨어요?”
“어. 저녁이니까 배 채울 거랑 소주 시켰지.”
그녀는 빈 테이블에 올라온 소주병을 나에게 흔들며 이야기를 했다.
평소 항상 밝던 그녀는 오늘 왜인지 모르게 웃고 있어도 슬픈 분위기가 가득해 보였다.
나는 그녀 손에 쥐어진 소주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빈 잔에 따라냈다.
“자. 한잔할까요, 원장님?”
“그래.”
그녀와 술잔을 부딪친 뒤 바로 입에 소주를 털어 마셨다.
김사랑 원장은 나와 함께 소주를 마신 뒤,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남사친 생겨서 같이 술 마시니까 좋다.”
“하하. 저도 처음 생기는 여사친이네요.”
“그럼 민 대리는 그동안 여사친 있었던 적이 없어?”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는 파였거든요.”
“진짜? 의외로 고지식한 면이 있네. 나보다 나이도 어리면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에이, 고지식하다니요. 그리고 나이도 한 살밖에 차이 안 나시면서.”
그녀와 시답잖은 이야기로 오디오를 쉴 틈 없이 채워 갔고, 걱정했던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만 더 주세요.”
그렇게 테이블에는 초록색 소주병이 3병이 올라와 있었다.
“원장님은 이제 광주 완전히 적응하셨나 보네요?”
“그래 보여?”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말을 이었다.
“네. 가끔 병원 가서 뵐 때마다 느꼈어요.”
그녀는 내 말에 소주잔을 바라보며 한숨만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나는 아닌 것 같아. 사실 요즘 좀 힘들어.”
그녀의 축 처진 어깨, 어딘가 슬퍼 보이던 얼굴.
바로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적응하는 게 많이 힘들어요?”
그녀는 내 말에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리고 소주를 한 잔 비워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방전이 다 되어버린 기분이랄까?”
“병원에서 무슨 일 있으셨던 거예요?”
“아니, 그런 건 없었는데. 내가 서울에서 나름 에이스였다고 했잖아. 기억나지?”
조금 전까지도 진지하던 표정의 그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하며 어깨를 으쓱해 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지었다.
“뭐야. 왜 웃어. 진짜야.”
“그럼요. 알죠, 원장님 에이스셨던 거.”
“근데 그때는 내가 밑에 직원이어서 그랬던 것 같아. 지금 광주 내려오면서 원장 달고 나니까, 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느낌?”
나는 그녀의 빈 잔에 소주를 채우며 이야기를 했다.
“어떻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려 병원에서 이렇게 어린 나이에 원장이라는 직책을 달고 계신데요.”
“정형외과에 여자 의사가 많이 없잖아. 나는 그래서 더 메리트가 있다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나이도 어리고 여자라는 것만으로 환자들이 무시하는 것 같더라고.”
그녀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 말을 이어갔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가 힘들 수도 있다는 느낌을 요즘 받기 시작했어.”
그녀는 나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병원에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에 내 모든 걸 쏟아부어서 노력을 해봤던 것 같아서, 이제는 그런 노력을 쏟을 만큼 열정도 없어진 것 같고.”
그녀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에게 소주잔을 들어 보였다.
짠.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고민을 하기도 전, 그녀는 허공을 바라보며 홀로 이야기를 했다.
“시작도 전에 슬럼프에 빠진 느낌이야. 내가 이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녀는 먼 타지인 광주에서의 생활도, 여자 의사로서의 생활도 벅찬 것 같아 보였다.
김 원장을 봐온 시간이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내 생각에 그녀는 충분히 잘해 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에게 주제넘지 않게, 그리고 진심으로 해줄 수 있는 말.
“제가 감히 한마디 드려도 될까요?”
그녀는 유리창 너머 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내 말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내 눈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감히라니, 뭐든지 해도 되지.”
“꽃이 언제 핀다고 생각하세요?”
그녀는 내 물음이 뜬금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갑자기? 꽃은 봄에 피지.”
“아니요. 꽃은 여름에도 가을에도, 그리고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어요.”
그녀는 내 말에 눈동자를 굴리며, 탄성을 자아냈다.
“아, 맞네. 여름에 철쭉, 가을에 코스모스. 겨울에는… 동백꽃도 있다!”
김 원장은 해맑게 웃으며 내게 이야기를 했다.
“그렇죠? 모든 꽃은 봄에만 피지 않아요. 그러니까 원장님도 만개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세요. 꽃을 피울 시기가 다 다를 뿐인 거죠.”
웃고 있던 그녀는 내 말에 입꼬리를 내리고 이내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피는 꽃이고, 늦게 피는 꽃이고 어쨌든 피어야 꽃인 건데. 원장님이 그동안 노력을 했으니, 김사랑의 인생에도 꽃이 피는 시기가 올 거예요. 너무 조급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포기하지도 말고요.”
그녀는 내 진심 어린 표정과 말투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듯했다.
몇 초간 정적이 흐른 뒤.
그녀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뭔가 굉장히 감동적인 말이다. 인생에 한 분야에서 꽃을 피운다는 거. 요즘 내가 많이 힘들었었나 봐. 술을 마셔서 그런가, 괜히 이러네.”
그녀는 옆에 놓인 휴지를 뽑아 고인 눈물을 훔쳐냈다.
나는 그런 그녀가 민망할까 싶어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금방 얼굴에 미소를 띠고 내게 말했다.
“민 대리는 외동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요.”
“여자 형제도 없는데, 여자 마음을 왜 잘 아는 거야, 대체.”
“선수 기질이 있었나요, 제가? 하하.”
그녀는 내 농담에 그제야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랑 오래오래 친구로 지내자.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남사친 있으니까, 너무 좋다.”
“저야 좋죠. 이렇게 예쁘고 멋있는 의사 여사친 생긴다고 하는데. 하핫.”
“됐어. 자, 얼른 짠해!”
김 원장은 그 마지막 술잔에 모든 걸 털어 마셔냈다.
* * *
“안녕하십니까.”
주말이 지나고 또다시 찾아온 월요일 아침.
항상 반복되는 월요일답게 직원들의 표정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현대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앓고 있는 병, 월요병. 사무실에는 그 모든 것이 똑같았다, 단 한 가지만 빼고.
바로 홍 대리의 부재.
대리 직책에 앉을 직원은 아직 없었기에, 홍 대리의 책상은 그저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
얼마 지나지 않아, 김 대표가 사무실에 출근했다.
그리고 그는 대표실로 들어가기 전 나를 불렀다.
“민 대리. 잠깐 대표실로 좀 들어와.”
“네, 대표님.”
그를 따라 들어간 대표실.
“문 닫고 이쪽으로 와보게.”
방금 사무실에 도착한 그는 아직 옷과 가방을 정리하기도 전이었다.
옷을 옷걸이에 걸며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대표.
“주말에는 잘 쉬고 왔어?”
“예. 집에서 푹 쉬고 왔습니다.”
주말이 지나고 나서 오가는 형식적인 멘트.
그는 정리가 끝난 뒤 책상 의자에 앉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이어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바스락거리며 꺼내기 시작했다.
“우선 이거 먼저 받지, 민 대리.”
그가 꺼낸 것은 다름 아닌 흰 봉투였다. 그리고 그 봉투에는 WG 메디컬 회사 로고가 찍혀 있었다.
“이게 무슨…….”
그는 내 말을 자르고 내 손을 덥썩 잡아 봉투를 쥐여주었다.
“우선 받고 이야기 들어.”
봉투에는 어떤 것이 들었는지 손으로 만져보았을 때 굉장히 두툼한 느낌이었다.
‘이게 뭐지? 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