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단호한 표정과 말투의 손지혁 차장.
나는 그에게 더 이상 거스를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단지 그의 말에 순응할 뿐이었다.
* * *
그렇게 세연 정형외과에 발길을 끊은 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나는 내 기억 속에서 한선우를 잊어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출근해 재고 창고로 향했다.
발주가 들어 온 물건들이 병원으로 가기 위해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는 내 담당 병원으로 갈 물건이 있는지 확인을 하기 시작했다.
광주 쪽 병원은 딜리버리를 하는 직원들이 평소에 누락 없이, 지체 없이 납품을 하고 있었기에, 광주 내 병원의 명세서는 남아 있지 않았고, 광주와 한참 떨어진 지역인 여수의 여천 정형외과의 물건과 명세서가 하나 놓여 있었다.
여수 지역이 담당인 최준성 과장은 평소 여수를 이틀에 한 번꼴로 갔지만, 오며 가며 내 담당 병원에 납품을 해 줄 리는 없었기에 여수의 명세서는 여천 정형외과 단 한 건만이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나는 물건과 명세서를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여천 정형외과에 도착해 물건을 납품하기 전, 박승철 원장의 진료실로 향했다.
하지만 진료실 문 앞에 붙어 있는 진료 알림 표.
분명 오늘은 박승철 원장의 진료 날임을 확인하고 왔는데, 알림 표는 ‘휴진’에 표시가 되어 있었다.
물건을 납품하러 온 것이기에 박 원장을 만나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지만 보통 병원에 오게 되면 물건만 내려놓고 가는 것이 아니라, 원장에게 얼굴을 비추는 이유가 따로 있다.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의 피드백과 더 중요한 이유는 딜리버리 직원이 아닌, 담당 직원인 내가 직접 왔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얼굴도장을 찍는 것이다.
그만큼 나는 이 병원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지.
그렇기에 광주에서 여수까지 오면서 나는 당연히 박 원장의 진료를 확인하고 왔음에도 휴진에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본 뒤, 곧장 간호사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대리님, 오셨어요?”
그녀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오늘 박승철 원장님 휴진 일 아니지 않나요?”
간호사는 내가 모르고 왔다는 것을 깨닫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원래 오늘 진료일이 맞으신데, 아침에 일이 있으시다고 다른 원장님이랑 스케줄 바꾸셨어요. 어떡해요, 모르고 오셨구나.”
“그러셨구나. 어쩔 수 없죠. 다른 원장님들 뵙고 가야겠네요. 감사해요.”
박 원장에게는 내가 다녀간다는 것을 메시지로 보내 표시했다.
그 후 물건을 납품하기 위해 차에서 물건을 챙겨 수술실로 발길을 옮겼다.
수술실 앞, 평소와는 다른 소란스러움에 나는 짐을 내려놓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레 걸어갔다.
수술실 바로 옆에 있는 응급실에서 나는 소리였고, 그 소리의 원인은 한 부부였다.
“지금 아파하는 거 안 보여요? 당장 수술해야 하는데 왜 미적거리는 건데!”
“아니, 지금 미루는 게 아니라요. 앞에 수술이 밀려서…….”
의료진에게 화를 내는 남자. 그 옆에는 다리가 아픈 듯 낑낑거리며 누워 있는 여자가 있었다.
내 시선은 큰소리를 내고 있는 남자에게서, 아파하고 있는 여자에게로 옮겨갔고 나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소리를 내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저 여성분은…….
그리고 나는 그 환자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내가 달려가 확인한 환자의 얼굴.
그녀는 바로 세연 정형외과의 새로 온 원장의 어머니. 그러니까 내 친구인 한선우의 어머니였다.
고등학교 시절 한선우의 집에 자주 드나들었기에 어머니의 얼굴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10년이 훨씬 지났지만, 한눈에 보아도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
환자가 친구의 어머니였기에, 나는 도울 수 있는 일은 없는지 뒷걸음을 쳐 먼발치에서 상황을 더 지켜보았다.
“지금 앞에 진행 중인 수술 마무리되면 바로 들어가실 거고, 진통제 놨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간호사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보호자는 아내를 가리키며 눈이 뒤집힌 채 역정을 냈다.
“우리도 응급 환자잖아요. 진통을 놨든 어쨌든 지금 아파하는 거 안 보여요? 안에 의사 두 명 들어가 있다면서 한 명이 나와서 수술하면 되잖아요.”
화를 내고 있는 남성은 내가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아마 한선우의 아버지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지금 이미 안에서는 수술이 진행 중이었고, 의사 선생님 한 분이 나오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그래요. 곧 끝나면…….”
“그러니까. 안에 수술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예요. 수술실 옆에 하나 더 비었다면서 다른 의사는 없어요? 당장 다른 의사 와서 수술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짧은 대화를 엿듣고 추측하건대, 지금 한선우의 어머니는 다리를 다쳤고,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수술을 해줄 의료진이 없어 보였다.
더군다나 수술실도 꽉 차 있지 않았기에 그것이 환자 보호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인 것 같았다.
나는 평소 자주 오는 병원이기에 옆에 친분이 있는 간호사를 조심스레 불렀다.
“선생님.”
“네, 대리님. 오셨어요?”
“혹시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녀는 내게 상황 설명을 늘어놓았고, 내가 추측하고 있는 것이 맞았다.
“근데 안에 원장님 두 분이 계신다면서요.”
“네. 안에 인공 관절 수술 중인데, 아까 끝났어야 하는 시간이거든요. 근데 뭐가 잘못된 건지, 긴급하게 다른 원장님도 호출받고 수술방으로 들어가셨고, 시간이 계속 지체되네요.”
“그럼 수술 끝나는 시간은 확실치가 않은 거네요.”
그녀는 내 말에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요.”
“그럼 그 뒤에 오늘 수술 잡힌 게 또 있을까요?”
“아니요. 오늘 잡혀 있는 OP는 저거 한 건이고, 끝나면 여기 환자분 바로 가능하신데, 시간을 말씀드리기가…….”
지이잉.
그때 울리는 주머니 속 휴대폰.
조금 전 박승철 원장에게 보냈던 메시지의 답장이었다.
[발신인 : 여천 정형외과 박승철 원장]
[그래. 나 오늘 일이 있어서 급히 휴진했거든. 일 다 보고 집 들어가는 길이야. 내일 병원 가면 물건 확인해 볼게.]
그의 메시지를 확인한 후, 나는 좋은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지금 당장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수술해 줄 의료진이 필요한 것이었기에 병원 간호사들은 휴진인 박승철 원장에게 연락하지 않고 있었고, 나는 친구의 어머님이 아픈 것을 지켜만 보고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선생님, 저기 환자분 어디가 다치신 거예요?”
“distal tibia 골절이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그녀에게 환자 상태를 확인 후 뒤를 돌아 응급실을 빠져나왔고, 그녀는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급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나는 박승철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원장님, 쉬시는데 죄송합니다. 통화 가능하십니까?”
- 어. 나 방금 집 들어와서 이제 한가해. 왜? 무슨 일 있어?
“원장님. 정말 죄송한데요.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 뭔데?
“저 지금 여천 정형외과에 있는데, 응급실에 환자가 수술을 못 하고 있어서요.”
- 왜? 오늘 원장님 두 분 계실 텐데?
“안에 인공 관절 수술 중인데, 뭐가 잘못됐는지, 김 원장님이랑 안 원장님 전부 수술 같이 들어가 계시고, 수술 시간이 계속 지체되고 있어서요.”
- 그래? 근데 왜 민 대리가 전화했어?
“원장님 오늘 휴진이시라 병원 쪽에서는 연락 못 드리고, 안에 수술 끝나는 거 기다리고 있는 상황인데. 지금 수술 대기 중인 환자가 제 지인이라서요.”
- 민 대리 지인?
“네. 혹시 가능하시면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 어디 수술이야?
“distal tibia 쪽 골절이고…….”
- 옆에 간호사 누구 있어? 아무나 바꿔줘 봐.
“아, 네!”
나는 그의 말에 급히 응급실 문을 열고 간호사에게 전화를 돌렸다.
전화를 건네받은 간호사는 박 원장과 긴급하게 통화를 시작했다.
“네. 네, 맞습니다. distal tibia 쪽이요. 네. 지금 수술실 비어 있어서 가능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전화를 끊은 후 나에게 휴대폰을 건넸고, 바로 뒤를 돌아 외쳤다.
“김 간호사. 박 원장님 오신다고 하니까, 안에 수술방 준비 시작하고, 마취 준비하세요.”
“네.”
그녀의 말에 주변에 있던 간호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환자 보호자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곧 원장님 오셔서 수술 들어갈 거니까, 수술 동의서랑 설명 들으시러 가실 게요.”
그러자 그는 누워 있는 한선우 어머니에게 다가가 조용히 이야기를 내뱉었다.
“선우 엄마. 이제 수술 들어갈 수 있대. 조금만 참아…….”
역시 그는 한선우의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화를 내던 그는 간호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박승철 원장은 금방 병원에 도착했고, 나와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수술실로 향했다.
그렇게 한선우 어머니의 수술은 시작됐고, 수술실 앞에는 한선우 아버지와 나, 둘만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항상 선우의 집에 놀러 갔을 때는 어머니만 봤었기 때문에 그는 나를 알 리가 없었고, 그리고 나 역시도 굳이 나서서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야 했고, 게다가 지금은 그럴 만한 타이밍도 아니었기에.
수술이 시작됐고, 나는 자리를 떠나도 됐지만 그러지 않았다.
한선우와의 관계는 멀어졌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것과 별개였다.
한선우만큼이나 오랫동안 봐 왔었고, 나의 어머니도 생각났기에 나는 자리를 지켰다.
박승철 원장의 실력을 알고 있어 수술의 결과는 큰 걱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수술이 잘 끝났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외상 수술이라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었기에 시간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1시간가량이 지나고 박 원장은 수술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나와 짧은 눈인사를 한 뒤, 그는 한선우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보호자 분. 환자분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나는 박 원장의 이야기를 옆에서 듣고,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술실에서 있었던 수술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한 뒤, 한선우 아버지는 옆에 있는 간호사를 따라 회복실로 향했다.
나는 그와는 반대로 박승철 원장의 진료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장님. 감사합니다.”
나는 박 원장을 만나자마자 허리를 깊게 접어 인사했다.
“아니야. 어차피 인공 관절 수술 시간 더 지체됐었으면 병원에서 연락이 왔을 거야.”
“그래도 제 부탁에 이렇게 빨리 와주시고,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그리고 민 대리 지인분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안 오겠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대답했다.
“간만에 휴진이셨을 텐데, 죄송하고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거듭 감사 인사를 올렸다.
“괜찮아. 그리고 수술은 잘 끝났고, 아마 조금 있으면 깨어나실 거야. 이따가 회복실로 같이 갈까?”
“아닙니다. 저 바로 광주 올라가 봐야 해서요.”
환자가 지인인데 회복실도 안 가고 올라가야 한다는 내 말에 박 원장은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근데 무슨 지인인데 이렇게 부탁을 한 거야? 회복실도 안 가보고.”
“오래된 친구 어머니요.”
“아… 나한테 급하게 부탁할 만했네.”
그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원장님도 이제 바로 들어가시나요?”
“어. 환자분 회복실만 가서 상태 확인하고, 집 들어가야지. 내가 확인 잘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올라가.”
“네. 감사합니다, 원장님.”
* * *
수술이 끝날 때까지 여수에 있다가 사무실로 복귀를 하니 광주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퇴근 시간이 지난 후였다.
사무실로 돌아와 업무 정리를 마치고, 퇴근 준비를 하는 그때.
지이잉.
세차게 울리는 진동 소리.
[발신인 : 한선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