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세연 정형외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반복하던 그.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업체 선정을 끝내고 연락을 한 게 맞나? 라는 생각에 기쁘면서도 의아한 느낌을 가지고 병원으로 향했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터라, 나는 커피를 두 잔 챙겨 진료실로 들어갔다.
똑똑.
“아이고. 한 원장님. 저 왔습니다.”
나는 그에게 너스레를 떨며 안으로 들어갔다.
“민 대리님 오셨습니까. 하하.”
“밥은 먹었어?”
“그럼. 너도 밥 먹고 온 거야?”
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건넸다.
“자, 커피 한잔 해.”
“고마워. 잘 마실게.”
나는 그의 앞에 앉은 후, 일상 이야기로 대화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어때? 세연 정형외과 출근하는 건 적응하고 있어?”
“어. 아직 얼마 안 돼서 계속 적응하려고 하는 중이지.”
“근데 오늘은 무슨 일로…….”
나에게 문자까지 남기며, 병원으로 오라고 했던 한선우.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그에게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는지를 물었다.
“아, 그게. 지훈아.”
“응.”
“우리 수술방 선생님들이랑 해서 회식 좀 쏴주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하는 한선우.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당당하게 나에게 회식을 요구하는 그의 말투와 태도.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뜻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어?”
내 표정을 보고도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재차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 수술실 선생님들이랑 회식할 거거든. 회사 카드로 한번 긁어달라고.”
다른 병원의 써전들도 이와 같은 부탁을 종종 하고는 한다.
자신의 병원 회식에 메디컬 법인카드를 당연하다는 듯이 긁어달라고 하는 부탁. 하지만 그런 부탁도 이미 거래를 하고 있는 병원에서나 하는 것이지, 이렇게 거래를 트기도 전에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특히나 일반 써전도 아닌, 친구에게서.
한선우는 내 표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한 번 더 물었다.
“왜, 안 되나?”
나는 그에게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 법인카드라서. 한번 확인해 볼게.”
“그리고 나 이번에 여기로 처음 왔잖아. 내 방에만 커피 머신이 없더라고. 다른 원장님들 방에는 있던데, 혹시 그것도 해 줄 수 있나?”
나는 그의 말에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실소를 터트렸다.
이게 손지혁 차장이 말했던 ‘갑질’인 건가.
친구 사이에서 갑과 을이 나뉘게 되면, 힘든 건 예사고 자존심이 상한다더니, 그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 휴대폰을 흔들어 보였다.
지이잉.
그가 나에게 톡을 보낸 모양.
나는 이를 악물고 그가 나에게 보낸 톡을 그 자리에서 클릭했다.
“이게 무슨…….”
나에게 보낸 톡은 방금 말했던 상품의 링크였다.
그가 말한 커피 머신.
나는 아무 말 없이 스크롤을 내려 그 커피 머신의 금액을 확인했다.
무려 100만 원이 훨씬 넘는 금액.
나는 휴대폰을 보고 있었고, 그는 그런 나에게 비아냥대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너 메디컬 회사에서 영업 비용 같은 거 나오지? 그걸로 병원에 이런 거 해 줄 수 있나 해서.”
진정한 갑질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선우가 나에게 이런 갑질을 하는 이유를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와 나는 학교 다니던 시절 누구보다 가까웠고, 흔한 다툼 한번 없이 지내왔기에 이러는 그의 태도가 전혀 납득 되지 않았다.
사적인 것에서 메디컬 직원을 이용한다는 이야기는 다른 직원들을 통해 건너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3년을 넘게 회사를 다니며, 내가 직접 겪는 것은 처음이었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써전. 한선우가 내 친구라고 해서 쉽게 영업을 할 마음은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점차 수위가 강해지는 그의 갑질에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한선우가 몸을 담고 있는 세연 정형외과. 이 병원은 내 담당 병원이 아닌, 손지혁 차장의 담당 병원이다. 그렇기에 내가 큰소리를 치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다시금 삼켜내고, 그에게 대답했다.
“내가 지금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회사에 이야기해 보고, 연락 줄게.”
그는 내 대답을 듣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민 대리님 능력 한번 믿어볼게.”
나는 한선우와의 대화를 끝으로 진료실 문을 열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사무실로 복귀를 하는 차 안.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대체 왜 한선우가 나에게 이런 갑질을 하는 것인지에 대해.
단순히 의사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메디컬 직원에게 이런 갑질을 한다?
그건 말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가 아닌 다른 메디컬 직원들에게도 이런 식의 갑질은 한다면 친구로서 따끔한 조언 한마디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힘든 재수 생활과 치열한 의대에서의 경쟁으로 내 친구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이라면, 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변해 가는 친구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기에.
혹은 나에게 무슨 복수심에 타올라 이러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내 기억 속에는 없었다.
* * *
“다녀왔습니다.”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열자마자 나를 다급히 부르는 손지혁 차장.
“민 대리. 나 좀 보자.”
“네.”
나는 들고 있던 짐을 내려둘 틈도 없이 손 차장의 부름에 옥상으로 그를 따라 올라갔다.
그의 표정은 꽤 굳어 있었고, 아무 말 없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나에게 담배를 건네는 손 차장.
“감사합니다.”
그가 건넨 담배를 받아 들고 입에 물은 뒤, 불을 붙였다.
손 차장은 아무런 이야기 없이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뽀얀 담배 연기가 눈앞을 메우고, 그 연기가 공중에 흩어질 때.
그가 입을 열었다.
“민 대리.”
“네, 차장님.”
“세연 정형외과 한선우 원장 만나봤어?”
“예. 방금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친구 맞지?”
나는 물고 있던 담배를 손에 꺼내고, 손 차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는 손 차장에게 그리고 아직 아무에게도 한선우가 친구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었기에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그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가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세연 정형외과. 내 담당 병원이잖아. 갔다가 알게 됐지.”
“아…….”
그리고 그는 내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친구한테 영업하기 힘들지?”
그는 오늘 내가 있었던 일을 알고 있는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것인지, 의미심장한 말투의 손 차장.
“괜찮습니다.”
“내가 괜한 부탁을 한 것 같아. 그냥 세연 정형외과에서 손 떼.”
나는 아직 영업이라고 할 만한 영업은 시작도 안 해봤기에, 그의 말에 알았다고 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해 보겠습니다.”
그는 깊은숨을 내 쉬더니,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갔더니 무슨 이야기 하디?”
“그게…….”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어떻게 손 차장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 순간, 손 차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
“갑질하지? 물건 이야기는 없고, 무리한 요구만 해대지 않든?”
“그걸 차장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는 마치 나와 동행을 한 것 마냥, 모두 알고 있었다.
나는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그는 담배를 한 모금 다시 마시고 뱉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대답 대신 담배만을 피우던 손 차장.
담배가 거의 다 태워지고, 그는 바닥에 던져 발로 밟아 불을 끄며 입을 열었다.
“학교 다닐 때 친했던 친구 맞아?”
“네. 어릴 적 친한 친구였는데, 시간이 많이 흐른 탓인지, 원래 그런 친구였던 건지. 제가 알던 것과 좀 많이 달라졌더라고요.”
“사실, 나 세연 정형외과에 오 원장님 만나러 갔다가 한선우 원장 통화하는 거 듣게 됐거든.”
나 역시 담배를 밟아 꺼트린 후, 그의 말을 경청했다.
“무슨 통화였습니까?”
“그 친구가 어릴 적에 민 대리한테 자격지심을 느낀 게 많았나 보더라고.”
“네? 그게 무슨…….”
“아까 누구랑 통화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휴게실에서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통화 내용을 듣게 됐는데, 듣다 보니까 너한테 열등감을 좀 갖고 있는 것 같더라. 그래서 일부러 갑질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
쓰읍.
나는 미간에 힘을 준 채, 귀는 열어 두고 생각을 되짚기 시작했다.
“떵떵거리다가 영업은 끝내 안 받을 것 같던데. 학창 시절 내내 스스로 민 대리보다 아래라고 느끼고 살았나 보더라고.”
자격지심.
자신이 생각하기에 남에 비해 부족하다고 느끼고, 상대를 질투하게 되는 것.
그리고 나는 한선우의 학창 시절에 대해 다시 생각의 회로를 돌려보았다.
그는 그 시절 나에게 자격지심을 느낄 일이라고는 성적 하나뿐이었던 것 같다. 항상 내 밑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한선우를 이기기 위해 기를 쓰고 발악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나, 항상 성적이 나의 1~2등 밑이었던 친구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의 관계는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기에 서로의 집도 서슴없이 다녔던 사이였다.
우리 집에도, 그리고 한선우의 집에도 자주 오가며, 어머니들끼리도 왕래가 잦았다.
그런 친구가 나에게 그 시절 질투를 하고, 자격지심을 느끼고 살았다는 말에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기에.
“근데 그런 민 대리가 지금 자신보다 아래. 을의 입장으로 오니까, 복수 아닌 복수를 하고 싶은 것 같더라. 참, 사람 우습지.”
“그러게요. 뭔가 굉장히 씁쓸하네요.”
“나이가 너무 어려서 내가 영업 가기가 그래서 민 대리한테 부탁했던 건데, 내가 괜히 마음이 좀 그렇더라고.”
“아닙니다. 차장님이 알고 그러셨던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한선우 원장은 이제 막 온 거라, 매출이 상당히 적을 거야. 그러니까 이쯤 하고 앞으로는 가지 마.”
나는 그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을 해야…….”
손 차장은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가로챘다.
“어허. 가지 말라면 가지 마. 그건 공과 사를 구분할 문제가 아니야. 어차피 민 대리한테 물건 받을 일이 없어. 시간 낭비야.”
“오늘 가서 저도 느끼던 바이긴 한데. 친구 녀석이 10대 시절을 저한테 그런 마음을 느끼면서 살았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드네요.”
손 차장은 내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사람한테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
“그래도…….”
한선우가 그 당시 긴 시절을 그렇게 느끼고 살았다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 친구가 그렇게 느꼈다면 느낀 것인데.
물론 내가 사과할 일도, 그렇다고 친구가 지금 나에게 갑질을 하는 것도 내가 가서 따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시절 소중했던 추억과 지난 일을 그런 괴로움 속에 살았는데 그 원인이 나였다는 것이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세연 정형외과는 알아서 할 테니까, 자료 나한테 넘겨.”
“그래도, 제가 마무리는 하겠습니다.”
“아니. 상사로서 하는 명령이야. 이제 세연 정형외과에서 손 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