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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영업사원이 되었다-88화 (88/339)

88화

【 영원한 ‘갑’도, 영원한 ‘을’도 없다 】

한선우.

많이 들어 본 이름에 나는 멈칫했다.

손지혁 차장은 내 표정을 본 뒤 나에게 물었다.

“이름은 제 고등학교 동창이랑 같은데, 그냥 이름만 똑같은 거겠죠. 하하.”

그런데 그때 뒤에서 불쑥 그림자 하나가 다가왔다.

나와 손 차장의 사이로 훅 들어오는 그림자는 바로 최권호 부장이었다.

“근데 민 대리 친구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최 부장은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들었는지, 옆으로 다가오며 나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그 친구가 그럴 리가 없는 친군데…….”

“그래도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졸업하고 연락이 안 되는 친구인데, 의사가 됐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어서요. 아마 아닐 겁니다. 하하.”

“한번 알아봐. 친구였으면 좋겠네. 근데 민 대리는 그 친구랑 친했었고?”

최 부장은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고등학교 때에는 친했는데, 사회 나오면서 자연스레 멀어졌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의사면 영업하는 건 엄청 수월하겠는데? 친했으니까. 뭐 누가 됐든, 영업 잘해 봐.”

“넵.”

최 부장은 그 말을 끝으로 발길을 떼 냈다. 그리고 손 차장은 그가 가고 난 후 나에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설마 진짜 민 대리 친구는 아니겠지?”

그 써전이 내 친구라면 최 부장처럼 기뻐할 줄 알았지만, 손 차장은 달랐다.

“아마 아닐 겁니다.”

“병원 가서 혹시나 민 대리 친구면, 그냥 돌아와.”

“어떤 것 때문에…….”

“아무리 친했던 친구였어도, 현재가 아닌 과거라면 힘들 거야.”

그는 깊은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친구한테 영업하는 게 가장 어려운 법이야. 학교 다닐 때, 그 시절 동급생 느낌이 아니니까. 사회에 나와서 이런 관계로 만나게 되면 갑과 을이 분명하게 정해져.”

“갑과 을이라…….”

“응. 친구한테 을의 입장으로 들어간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아. 자존심이 상하는 일도 생길 테고, 일 적으로만 놓고 봐도 그래.”

걱정스러워하는 그의 표정에 나는 문제 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제 동창일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혹여나 동창이어도 괜찮습니다. 어릴 적에 나쁜 관계도 아니었고, 게다가 이게 제 일인걸요. 한번 해 보겠습니다.”

“그래. 세연 정형외과 아직 매출도 적고, 그리고 내가 담당하고 있는 써전들 있으니까, 실패해도 괜찮거든? 부담가지지 말고 다녀와 봐.”

“네. 걱정 마십시오.”

* * *

전날 자료를 챙겨 퇴근한 덕분에 세연 정형외과로 직출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연락했지만, 아무도 한선우에 관한 이야기는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굉장히 가까웠던 친구, 한선우. 하지만 졸업 이후 증발한 것마냥 한순간에 연락을 끊었던 친구이다.

나에게서만 연락이 끊긴 줄 알았는데, 주변 친구들 모두 한선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졸업과 동시에 휴대폰 번호를 바꿔버린 한선우에 대해 어느 대학을 갔는지, 무엇을 하고 어디서 지내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연 정형외과 로비에 들어와 나는 생각에 잠겼다.

여기에 있는 한선우 원장이 내가 아는 한선우였으면 하는 생각과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공존했다.

내 고민을 고이 접어 마음속에 담아둔 채, 나는 한선우 원장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내 노크에 진료실 안이 아닌, 옆에서 소리를 내며 다급히 다가오는 한 사람.

그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저기…….”

“네?”

진료실 문 앞에 서 있는 나를 황급히 붙잡는 사람. 바로 외래 간호사였다.

“지금 안에 들어가시면 안 돼서요.”

“아… 안에 누구 계실까요?”

“어… 우선 명함 주시면 원장님께 전달해 드리고 말씀드릴게요.”

나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네. 여기요.”

그녀는 명함을 받아들고, 손으로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잠깐 앉아 계시면 곧 말씀드릴게요.”

나는 진료실 문이 보이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디컬 직원이 여러 명 왔었는지, 화분이 진료실 앞까지 여러 개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혹시나 안에 다른 메디컬 직원이 영업 중일까 걱정되는 마음에 뚫어지게 문만 바라보고 앉아 있기를 30여 분.

정말 오랜 기다림 끝에 아까 명함을 받아갔던 간호사가 나에게 다가왔다.

“한 원장님이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굳어 있던 자세를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진료실 문 앞에 섰다. 하지만 문을 열고 그 누구도 나오지 않았고, 나는 간호사를 보며 물었다.

“안에 아무도 안 나오시는 거예요?”

“아… 네, 그냥 들어가시면 돼요.”

진료 시간도 아니었고, 다른 메디컬 직원도 없었는데, 굳이 나를 30분 넘게 앞에 세워둔 이유가 뭐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에 있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안녕하십니까. WG 메디컬 민지훈 대리라고 합니다.”

나는 문을 열자마자 인사를 하며 들어갔다.

내 시선 끝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는 한선우 원장. 그는 책상을 바라보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민지훈……? 민지훈 맞지?”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한선우 원장.

그는 정말 내 친구 한선우가 맞았다.

고등학교 졸업을 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지만, 얼굴은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마주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오는 세월을 그대로 맞아,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는 정도.

동등한 관계인 친구에게 을이라는 입장이 되어 영업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반가운 마음뿐이었다.

그 걱정스러운 마음이 모두 사라질 정도로 학창 시절에 우리는 가까운 관계였으니 말이다.

“뭐야. 진짜 한선우잖아?”

“이게 얼마 만이냐.”

“그러게. 대학 가더니 매정하게 연락 끊은 놈. 대체 어디서 뭐 하고 살다가 이제야 이렇게 나타난 거야?”

그와 나는 악수를 하듯 손을 붙잡으며 반가운 마음을 표출했다.

“이렇게 의사 되려고 연락 끊고 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자.”

“그래.”

나는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착석했다.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난 나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병원은 항상 나에게 긴장을 하게 만들고, 일 적으로 다가오는 곳이었기에 일터에서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

“얼른 이야기해 봐. 어떻게 된 거야?”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나 알다시피 수능 망쳤었거든. 그래서 재수했지.”

“정말? 그렇다고 그렇게 모든 애들이랑 다 연락을 끊은 거야? 심지어 나한테도.”

“독하게 마음먹었었거든. 의사가 되고 싶었고, 그러려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지.”

나는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선우는 그 당시에 의대를 갈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 역시 성적이 꽤 높았던 편은 아니었지만, 한선우는 늘 내 밑이었기 때문이다.

내 바로 밑에 등수이거나 바로 아래 등급.

그가 의사가 되기 위해 재수를 했다고 생각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마음고생이 대단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성적에서 의대를 가기까지가 얼마나 험난했을지가 눈앞에 그려졌기 때문.

“고생 많았겠네. 근데 어떻게 이 나이에…….”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했다.

“어떻게 이 나이에 의사가 됐냐고? 나 군대 면제받았잖냐.”

한선우가 군 면제를 받았다면 이 나이에 의사가 되는 것이 가능한 일.

그는 군 면제를 떠나, 그때 악착같이 공부를 하던 시절이 떠오르는지 허공을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도 결론적으로는 이렇게 의사가 된 거잖냐. 멋있다, 선우야.”

“하하. 그렇지. 근데 너는 언제부터 이쪽 업계에 있었던 거야?”

“나는 메디컬 쪽에 온 지 3년 정도 됐어.”

“그래? 내가 고등학교 때 애들이랑 연락이 모두 끊기니까, 다들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럼, 그동안 잘 지낸 거지?”

그는 내 물음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지. 나가서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 우리 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나섰다.

세연 정형외과 앞에 있는 카페.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선우는 카페 카운터 앞에서 자신이 마실 커피를 외쳤다.

“그래. 저희 아이스 아메리카노 2잔 주세요.”

그리고 바로 자연스레 뒤로 돌아 빈자리를 찾는 한선우.

그는 자신이 당연히 ‘갑’이라는 걸 아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였기에, 별다른 이야기나 행동 없이 서둘러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계산했다.

“잘 마실게, 지훈아.”

“그래.”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추억 여행을 시작하는 나와 한선우.

“그때 애들이랑 진짜 재밌었는데. 다들 잘 지내나?”

“그럼. 나는 종종 애들 만나지. 명절에 여수 갈 때마다 모이기도 하고. 부모님은? 아직 여수에 계시지?”

“어. 내가 공부하고 바빠서 여수에 안 간 지 꽤 됐긴 한데, 부모님은 여전히 그 집에 계시지.”

“다음에 여수에서 애들이랑 다 같이 한번 모이자. 우리 종종 모이면 선우 네 얘기도 하거든.”

그는 카페 소파에 등을 기대어 앉아 이야기를 했다.

“내 얘기? 나 잘 살아 있냐고?”

“그럼. 자그마치 10년이 훌쩍 넘었다. 너랑 연락 끊긴 지가. 다들 선우는 어디서 뭐 하냐고 소식 아는 사람 없는지, 그런 이야기하지.”

“나 진짜 고생했지. 하루아침에 모든 세상과 단절하고, 고시원 들어가서 공부한 것만 생각하면. 지금 그 시절로 돌아가라고 하면 못 할 거 같아.”

“그러게. 상상도 안 된다. 정말 고생 많았겠다, 선우야.”

그는 눈을 꽉 감은 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1년 재수하는 동안 한선우는 이 세상에서 죽었다, 라고 생각하고 그냥 365일 24시간 공부만 했던 것 같아.”

“대단하다. 그래도 지금 잘됐으니, 내가 다 기쁘네. 앞으로 광주에서 의사 생활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보상받는 삶 살아.”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에게 대답했다.

“그래야지. 보상받는 삶…….”

그와 나는 그 뒤로 한참을 추억 팔이, 추억 여행에 잠긴 채 이야기를 쏟아냈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후 만난 친구라,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함축해 대화를 나누기에도 부족했다.

영업 이야기를 해야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불과 30분 전, 진료실 문을 열고 한선우를 만날 때는 그 모든 걱정이 사라졌었지만 역시 공과 사는 달랐다.

갑이 된 한선우.

그 앞에 을의 입장으로 온 나.

추억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일 이야기의 포문을 여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오늘은 안면을 텄으니, 다음에 다시 찾아와 영업적 이야기를 해야겠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때 나에게 질문을 하는 한선우.

“지훈아.”

“어, 선우야.”

“근데 너 오늘 나한테 영업하려고 온 거 아니야?”

영업의 물꼬를 터준 그의 한마디가 반갑고, 고맙게 느껴졌다.

“그렇긴 한데…….”

“뭐 보여줄 거 들고 왔을 거 아니야. 줘 봐.”

그는 내 옆에 있는 내 가방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랜만에 만나는데, 영업 이야기하려니까 좀 그러네. 오늘은 얼굴 봤으니까, 다음에 내가 병원으로 찾아갈게.”

그는 내 거절에 미소를 지으며 능청스럽게 대답을 이어갔다.

“에이, 그래도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오늘 안 그래도 메디컬 업체에서 엄청나게 많이 왔었어.”

“그런 것 같더라. 너 온다고 광주에 소문이 자자하게 났지.”

“하하, 그래? 아무튼 다들 자료 하나씩 주고 가더라. 나도 이렇게 영업 받는 건 이제 처음이라, 잘 몰라. 이왕이면 친구한테서 받으면 좋지.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 아니겠냐.”

그는 내 가방을 여전히 바라보며, 어서 달라는 듯한 손짓을 보였다.

나는 그의 성화에 끝내 자료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가져온 자료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거고. 여기 뒤에는 견적서야. 보고 샘플 필요하면, 그 품목들로 추려서 가져올게.”

“그래. 나도 자료 봐보고 연락 줄게.”

나는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맙다, 선우야.”

“친구끼리 고맙긴. 오늘 반가웠다.”

“어. 또 연락하자. 조만간 병원 다시 올게.”

“그래.”

* * *

바로 다음 날 오후 1시쯤.

한선우에게서 전화가 왔다. 급한 일이니, 자신의 병원으로 서둘러 와달라는 연락이었다.

‘벌써 물건을 발주하려는 건가?’

나는 추가 자료를 챙겨 사무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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