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저… 조금 전에 올라왔다가 소리가 나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왔다가.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미안해요.”
나와 수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어버린 그녀는 바로 김사랑 원장이었다.
수간호사 선생님은 김 원장의 말에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 병원을 오래 비워서…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녀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 옥상을 빠져나갔다.
나와 김 원장, 단둘이 남게 된 옥상.
서로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녀에게 눈을 맞추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민 대리님. 의외다?”
그녀는 나를 보며 씨익 웃으며 이야기했다.
“어떤 게…….”
“그냥. 이렇게 자상한 사람이었구나, 싶어서.”
“네? 제가요?”
자상한 사람이라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어. 우리 수간호사 선생님한테 해주는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런 것 같던데? 다시 봤어, 민 대리님. 하하.”
“에이, 농담하지 마세요.”
“진짜야. 아무튼, 수간호사 선생님은 민 대리 덕분에 잘 해결되겠네. 내려가자.”
“넵.”
그녀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와 함께 이야기하며 옥상에서 내려왔다.
* * *
WG 메디컬 회사 근처에 자리해 있는 오래된 카페.
프렌차이즈 카페들이 몇 걸음마다 자리하고 있는 요즘, 보기 드문 오래된 전통 찻집이다.
굳이 이 카페로 한태준을 부른 이상일 차장.
WG 메디컬 사람들을 자칫 잘못하면 마주칠 새라 이 찻집으로 부른 것 같다.
드르륵.
한태준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입구 쪽에 바로 자리를 잡은 이상일 차장이 보였다.
그는 이 차장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했었다.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기가 어려웠기에, 전화를 통해 충분히 이야기했으나 이 차장은 말을 자른 채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고 통보했다.
한태준은 만나기가 꺼려져 핑계를 둘러대며 거절했지만, 막무가내로 회사 앞으로 찾아온 그를 당해 낼 방법이 없었기에.
한태준은 어쩔 수 없이 이 차장을 만나기 위해 이 자리로 온 것이다.
“차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태준 씨 왔어?”
인사를 한마디 주고받았지만, 벌써 느껴지는 어색한 분위기.
“뭐 마실래?”
이 차장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 전통차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저도 차장님과 같은 거 마시겠습니다.”
“사장님! 여기 한방차 한 잔 더 주세요.”
이 차장은 큰소리로 주문을 한 뒤, 자세를 고쳐 잡고 앉아 한태준에게 말을 건넸다.
“태준 씨. 우리 회사로 안 오겠다는 이유가 뭐야?”
“아까 전화로 말씀드렸지만…….”
한태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여는 이 차장.
“아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래. 봐. 태준 씨 직책에 이 연봉을 어떻게 받을 거야?”
“연봉을 올려주신다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요.”
“혹시 부족해서 그래? 야망이 크네, 태준 씨가.”
한태준은 이 차장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를 좋게 봐주셔서 그렇게 연봉도 올려주시고, 스카우트 제의해 주신 건 정말 감사드립니다.”
“근데 대체 왜 안 온다는 거야? 나 이 바닥 경력 알잖아. 충분히 광주에서 잘될 수 있는 회사야.”
“네, 알죠.”
이 차장은 그의 말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대체 왜 가을 메디컬에 안 온다는 거야? 누가 못 가게 해? 누군데.”
이 차장은 짧게라도 한때 한태준의 상사였기에, 그는 이 차장이 기분이 나쁘지 않게 돌려 핑계를 대며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그의 추궁과 억측에 한태준은 결심한 듯 보였다. 그리고 허리를 세우고 정자세로 앉아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WG 메디컬이 첫 회사입니다.”
“근데?”
“그래서 저는 모든 게 처음입니다. 회사도, 사회생활도, 그리고 상사도요.”
그는 한태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상사를 어떤 분을 만나느냐가 제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이니까, 모든 걸 그 상사에게 배우고, 그 배움이 평생 간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렇지. 그래서 이제 막 수습이 끝난 태준 씨한테는 내가 필요한 거야. 나만큼 오래 일한 직책이 태준 씨의 상사가 되는 거지. 그것도 직속 상사.”
한태준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이 차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저는 그 직속 상사가. 제가 일을 배우고 싶은 상사는 WG 메디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이 차장은 불쾌한 표정을 내비쳤다.
고개를 들어 좌우로 꺾으며 목을 풀더니, 한태준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누군데. 누구길래 내 밑으로 못 온다는 거야?”
“민지훈 대리님입니다. 저는, 제 인생의 첫 상사는 민 대리님이었으면 합니다.”
“민지훈?”
그는 한태준의 말에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 저한테 스카우트 제의해 주신 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답이 이렇게 돼서 죄송합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이야기해 줘.”
“오랫동안 고민해 보고 말씀드린 거라,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태준은 자신의 생각을 모두 쏟아내고 이야기했기에,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근무 시간이라, 회사에서 호출이 와서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는 소파 옆에 서서 허리를 접어 이 차장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곧장 계산대로 가 카드를 내밀었다.
“저기 테이블 2잔 계산해 주세요.”
그 모습을 본 이 차장이 외쳤다.
“놔둬. 내가 나갈 때 하게.”
“아닙니다. 제가 사겠습니다.”
한태준은 기어코 계산했다. 거절하러 왔기에 그에게 얻어먹으며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 * *
지이잉.
출근 후 자리에 앉자마자 울리는 휴대폰.
나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물건 목록 메일로 보냈으니까 챙겨서 오늘까지 넣어줘.]
모던 정형외과 박승호 원장의 문자였다.
나는 문자에 답을 한 뒤 메일을 열어 목록을 출력했다.
서둘러 물건을 챙긴 후 모던 정형외과로 향했다.
* * *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민 대리 물건 벌써 챙겨서 왔어?”
문자를 보낸 후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도착한 나를 보고 놀라는 박승호 원장.
“그럼요. 원장님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죠. 하하.”
“물건은?”
“보내주신 목록대로 수량이랑 챙겨서 공급실에 넣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가서 물건 봐야겠네. 우선 앉지.”
“넵.”
나는 그의 앞에 있는 의자에 착석했다.
박 원장과 납품한 품목 리스트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그때.
그가 사담을 꺼내기 시작했다.
“민 대리. 가을 메디컬 이야기 들었는가?”
“이상일 선배님이요? 무슨 이야기 말씀이십니까?”
그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을 메디컬 결국 없앴다고 하더라고.”
“네? 벌써 폐업했다는 뜻인가요?”
“어. 조금 전에 상일이한테 연락 왔더라고.”
놀라웠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도 안 한 가을 메디컬.
이상일 차장의 계획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한태준을 영입하려고 했던 이 차장은 직원 영입의 실패를 시작으로, 모던 정형외과의 영업 실패까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빨리 사업장 폐업을 할 줄은 몰랐었다.
“제가 듣기로는 가을 메디컬 차린 지 한 달도 채 안 된 거로 알고 있었는데.”
“민 대리가 아는 게 맞을 거야.”
“아… 폐업했다는 거 보면 아직 아무 거래처도 없었나 보네요.”
“그러게. 광주 바닥에 이미 소문이 날 대로 났는데, 메디컬 회사를 차렸다는 거 자체가 무모하긴 했지.”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직원 한 명 데리고 올 예정인데, 거래처 들고 올 거라고 했었거든. 그것마저도 무산됐나 보더라고.”
역시였다.
한태준이 거래처를 들고나오리라 생각했던 이상일 차장.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되지 않자, 폐업을 선택했던 것.
“아무튼, 상일이가 너무 부탁하길래 도와주려 했었는데, 그랬으면 나도 큰일 날뻔했지.”
“저한테 믿고 맡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장님.”
그렇게 이상일 차장의 가을 메디컬.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가장 짧은 계절인 ‘가을’.
그의 회사 역시, 유난히 짧은 가을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 * *
업체별 분석 자료를 보고하기 위해 사무실에서 자료 정리를 시작했다.
담당 병원의 매출 그래프를 하나씩 살펴보던 중 이상하리만큼 급격하게 뚝 떨어지는 그래프 하나.
‘찬성 정형외과’.
찬성 정형외과는 기존에 받고 있는 메디컬 회사가 있어, 우리 회사에서는 소모품 2가지만 납품하고 있는 병원이다. 그렇기에 매출이 애초에 적은 병원.
하지만 그 2가지 품목의 매출은 크게 상승하지도, 크게 하락하지도 않을 정도로 유지가 되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매출이 대폭 하락한 그래프를 보고, 나갈 채비를 했다. 비록 품목은 적어도 어떠한 이유로 매출이 빠지는지 확인을 해야 했기에.
보통 매출이 급격히 하락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병원의 매출 하락, 또는 병원에서 메디컬 업체를 바꾸는 경우.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중 하나이다.
병원에서 메디컬 업체를 바꾸려고 한다는 것은 담당인 내 잘못이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매출이 하락하는지를 먼저 확인해야 했다.
나는 서둘러 최근 3개월간의 찬성 정형외과 매출원장을 출력해 병원으로 출발했다.
병원에 도착해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
바로 병원 로비의 환자 수이다.
병원에서 메디컬로 발주가 적어지는 이유 중 하나인 병원 매출 하락.
그건 직접 듣지 않아도 내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환자의 수가 많으면 당연히 병원 매출이 많을 테고, 반대로 환자의 수가 적으면 그만큼 매출이 적을 수밖에 없기에.
찬성 정형외과는 광주를 대표하는 병원이거나, 큰 병원은 아니다.
하지만 동네에서 오래된 작은 병원으로 그만큼 꾸준히 오는 환자가 많은 병원이다.
이런 병원일수록 매출이 대폭 상승하거나 대폭 하락할 일이 적다.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이 꾸준히 진찰을 받으러 오기에, 매출이 항상 기본을 찍는 병원이다.
찬성 정형외과에 물건을 납품하러 오거나, 원장님을 만나러 올 때면 늘 로비에 환자들이 적어도 열댓 명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파리가 날리고 있는 로비.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 해석하자면 병원의 매출이 확 떨어졌을 것으로 예상됐다.
나는 급히 공급실로 향했다. 메디컬 회사를 바꾼 것이 아니라, 병원 자체의 매출이 떨어진 것인지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대리님 오셨어요?”
“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로비에 환자분들이 엄청 없네요.”
공급실 담당 선생님은 내 질문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게요. 큰일이에요. 근데 저희 발주한 품목 없는데, 무슨 일로 오셨어요?”
그녀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내 손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즘 너무 발주가 안 나오길래, 무슨 일 있나 싶어서 확인차 왔습니다.”
“그렇죠? 잠시만요.”
그녀는 나를 뒤로 한 채 책상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트 한 권을 꺼내 나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저희 요즘 죽겠어요. 이것 보세요.”
그녀가 나에게 펼쳐 내민 노트 한 권.
물품 재고 목록이었다.
그 재고 목록에는 우리 회사 품목을 포함해 다른 메디컬에서 납품 받고 있는 품목들까지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한눈에 보이는 재고 개수와 매출 개수.
두 달여 전부터 매출이 눈에 띄게 줄고 있었고, 재고가 굉장히 많이 쌓여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병원 로비에서부터 예상했지만, 이곳에서 확실히 알게 된 사실.
병원 매출 하락.
병원의 환자가 많고, 매출이 많아야 우리 회사도 매출 상승이 되는 상생 관계였기에, 병원 매출 하락은 나에게도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선생님. 병원에 무슨 일 있었어요?”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게…….”